2006년 독일월드컵 때 한국 선수단이 이용한 버스는 사실 독일제 ‘세트라’다. 현대자동차는 월드컵만을 위해 유럽 기준에 맞는 버스를 따로 만들기 어렵다는 이유로 세트라 버스를 대여해 각 선수단에 제공했다.
문득 1년 전 독일월드컵 때의 다양한 구호가 생각났다. 당시 독일에선 32개 출전국 모두 공식 스폰서인 현대자동차가 제공한 버스에 구호를 써붙이고 다녔다. 이를 새겨 읽으면 각국의 역사와 문화를 떠올릴 수 있다.
물론 ‘열정’이나 ‘승리’ 같은 밋밋한(!) 구호가 많았다. 한국 팀의 첫 상대 토고는 ‘승리에 대한 열정, 성공을 향한 목마름’이라고 써붙였는데, 그 말대로 토고의 열정은 안타까운 목마름이 되고 말았다.
프랑스 ‘자유, 평등, 줄 리메’ … 한국 ‘끝나지 않은 신화’
승리나 열정이라는 상투적 표현 대신 자국 역사와 문화 전통을 앞세운 나라도 있었다. 우리의 두 번째 상대였던 프랑스는 ‘자유, 평등, 줄 리메!’라고 적었다. 월드컵 창시자이자 40년대 국제축구연맹(FIFA) 회장이던 줄 리메를 앞세워 월드컵의 뿌리가 자신들에게 있음을 강조한 것. 멕시코는 ‘세계를 건너온 아스텍의 열정’이라는 말로 고대 문명의 힘을 빌렸고, 파라과이는 라틴아메리카에 인디오 뿌리를 내린 역사를 드높여 ‘아메리카의 심장에서 온 것, 그것은 과라니족의 투혼’이라고 했다. 북아프리카 튀니지는 고대 명장 한니발을 기리며 ‘카르타고 독수리들이여. 더 높이, 더 강하게’라고 외쳤다.
이 모든 구호는 월드컵을 통해 국가 통합이라는 또 하나의 상징 게임을 치르는 하나의 과정이기도 하다. 그것은 때때로 역설적인 의미로 읽히기도 한다. 이를테면 미국은 ‘United we play, United we win’이라면서 ‘하나 됨’을 강조했는데, 이는 다인종 합중국의 또 다른 표현이다. 스페인 역시 ‘하나 된 국가, 하나의 목표’라는 구호를 채택했다. 이 구호는 바스크 분리주의 운동 등 크고 작은 독립 요구가 끊이지 않는 스페인의 현실을 잘 보여준다.
필자의 눈에 유독 인상 깊었던 것은 스위스의 구호. 명품 시계의 본고장답게 스위스는 ‘2006, 스위스의 시간!’이라는 명징한 구호를 써붙였다. 여기에 약간의 아픔이 있다.
필자는 우리의 세 번째 상대인 스위스를 취재하기 위해 개막 직전 취리히에 들렀다. 어느 호텔에서 인터넷을 사용하고 있는데, 그만 서비스를 차단당하고 말았다. 이유인즉 정해진 시간에서 3분이 지났다는 것이었다. 필자는 저 멀리 한국 땅으로 원고를 넘겨야 한다고 통사정했지만, 호텔 직원은 냉엄한 표정으로 약정한 시간이 지났다며 자신의 손목시계를 가리켰다. 나는 호텔에서 쫓겨나왔다. ‘스위스의 시간’이라는 구호가 엄정하다는 사실을 그날 몸소 깨달았다.
그렇다면 당시 한국 팀 버스에 적힌 구호는? 2002년의 염원을 담은 ‘끝나지 않은 신화, 하나 되는 한국’이었다. 아쉽게도 그 신화는 이어지지 않았으며, 지금 한국 축구는 하나 되지 못한 채 모진 성장통을 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