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기부 X파일’ 사건으로 온 나라 안이 뒤숭숭하다.
- 90분 분량의 안기부 도청 테이프는 우리 사회의 최고위층이라고 할 수 있는 정치 지도자, 재벌그룹 총수, 언론사 사주 등의 부패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윗물이 썩은 대한민국. 그 ‘썩은 물’은 어디까지 흘러갔을까. ‘주간동아’는 2002년 출범한 부패방지위원회(현 국가청렴위원회)가 지난 3년간 ‘청소’해온 부패사건들에 대한 다각적 분석을 통해 우리 사회의 부패지도를 그려본다. 1급에서 9급 공무원까지, 대학교수에서 환경미화원까지 돈에 눈멀고 직권 남용에 양심을 판 대한민국 공직사회의 우울한 초상화가 그대로 드러났다.〈편집자주〉
주간동아가 단독입수한 부패방지위원회(이하 부방위)의 3년치 심의·의결례집에는 모두 234건의 부패사건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부패사건’은 부방위에 신고·접수된 사건들 중 신빙성이 높은 것으로 인정된 사건들. 부방위는 이들 사건을 조사·수사기관으로 이첩해 부패 사실 여부를 규명한다. 감사원과 대검찰청, 경찰청 순으로 부패사건을 많이 이첩했으며 지난 3년간 63건의 부패사건 연루자들이 형사처벌을 받았고, 69건의 연루자들은 소속 기관으로부터 징계 등 신분상 행정조치를 받았다.
부패 공직자가 가장 많이 속한 조직은 단연 중앙정부(37%)였으며, 지방자치단체(32.2%)와 공기업 등이 속한 공직 유관단체(15%)가 그 뒤를 이었다. 두드러지는 점은 교육 현장이 ‘부패 현장’으로 신고된 경우가 많다는 것. 모두 326건의 부패신고 중 20건(6%)이 지방교육청과 일선 초·중·고등학교의 부패 사실을 폭로했다.
부패의 내용을 기준으로 234건의 부패사건을 분류해보면 건설·건축 관련 부패가 47건으로 단연 돋보인다. 5건의 부패사건 중 1건이 건설·건축 관련 부패인 셈. 그 뒤로 교육(29건), 검찰·경찰 등 수사기관(18건), 세무(13건), 조달(10건), 국방(9건)이 한국사회 부패의 주류를 이뤘다.
서울시 모 구청의 건설과 안내판과 모 세무서 전경. 지난 3년간 부방위에서 처리한 부패사건 중 건설과 세무 관련 사건의 비중이 컸다.
가장 깨끗해야 할 교육 분야는 부패·비리의 주요 활동무대 제2 순위에 올랐다. 총 29건의 교육 분야 부패사건은 초·중·고등학교가 11건, 대학이 10건, 교육부와 지방교육청이 7건, 교원단체 1건으로 골고루 나눠 가졌다. 한 공립 중학교 교장은 학부모들로부터 교사 수고비 1200만원, 시험 채점비 500만원을 거둬들이고, 특정 학생을 교장실에서 불법 과외지도를 해준 사실이 신고되어 경고 처분을 받았다. 2003년 4월 한 지방교육청 교육감은 사무관 승진 예정자에게 승진 청탁과 함께 1000만원을 받는 등 여러 차례 승진 예정자들에게서 수천만원의 금품을 수수한 혐의로 구속됐다. 한 공립 중·고교 체육교사가 한국프로농구연맹의 지원금, 농구팀의 전국체전 포상금, 훈련비 등을 횡령해 불구속 입건되는 일도 있었다.
뇌물을 받고, 거둬들여야 할 세금을 눈감아준 ‘양심불량’ 세무공무원들도 다수 처벌됐다. 지난해 12월 한 세무서 공무원이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됐는데, 그는 학원 운영자에게서 3000만원을 받고 이미 부과된 양도소득세 3억2000만원을 면제해주는 부패 행위를 저질렀다. 2003년 7월에는 지방세 환급을 담당하는 세무공무원 2명이 6300만원의 뇌물을 받고 벤처기업가에게 추징금 19억원을 부정 환급해줘 구속됐다.
국세청 공무원들도 세무 비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지난해 3월 경찰은 식품회사에 대한 특별세무조사를 벌이면서 룸살롱 향응과 2000만원의 금품을 수수한 국세청 공무원을 뇌물수수 혐의로 검찰에 넘겼다. 2003년에는 95억원의 세금을 탈루한 기업에게 뇌물을 받아 챙긴 뒤 세무조사 담당자들에게 외압을 행사해 관련 서류를 불법적으로 회수, 파기한 국세청 공무원이 신고됐다. 이 공무원은 직권 남용, 공문서 변조 혐의 등으로 불구속 기소됐다.
조달 관련 부패신고는 대개 액수가 크다. 재고번호를 조작해 허위 정비계약을 체결, 24억원의 예산을 낭비했다는 신고나 물품 대금을 과다 지급해 42억원을 낭비했다는 신고가 대표적. 현재 감사원에 이첩되어 조사 중인 조달 관련 사건도 부당 보상으로 인해 무려 73억원의 국고금을 손실했는지 여부를 다투고 있다.
국민 59% “공직 부패” … 이권 보장 등 유사 행위 사례 증가
부방위가 처리한 국방 관련 부패사건은 언론에 보도돼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기도 했다. 7월 감사원은 국방부가 해외에서 무기를 구매하는 과정에서 국내 브로커에게 속아 400억원 상당의 사기를 당한 사건에 대한 조사 결과를 언론에 발표했는데, 이는 부방위가 지난해 1월 감사원으로 이첩한 사건이다. 지난해 4월 보도된 ‘특수전사령부 내 부대배치 청탁사건’ 또한 부방위가 국방부 합동조사단으로 이첩한 사건. 군부대 장교가 청탁을 받고 전산 프로그램을 조작해 신병을 분류 배치한 혐의로 구속된 사건이다. 19명의 현역군인 청탁자 중에는 준장과 중장 등 장성이 6명 포함돼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이밖에도 국가와 연구개발 계약을 맺은 대학교수나 연구소 등이 연구비를 횡령하거나 폐기물 처리업자가 폐기물량을 속여 국가로부터 처리비용을 과다하게 타내는 비리, 그리고 국가로부터 정책기금을 대출받은 사기업체가 고의로 부도를 내 이를 갚지 않는 부패 행위 등이 다수 적발되어 어떤 분야가 쉽게 비리·부패에 노출되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산자부와 연구개발협약 체결을 맺은 한 연구조합의 사무국장은 연구개발비로 지원받은 3억5900만원을 유용한 혐의로 최근 불구속 기소됐다. 지난해 여름에는 지자체 환경보호과 공무원들과 폐기물처리업체가 서로 짜고 폐기물량을 부풀려 모두 10억원 상당의 국가예산을 착복한 사실이 적발됐다. 모 업체는 기술신용보증기금 등으로부터 무려 45억원을 융자받은 뒤 유령회사를 설립해 돈을 빼돌리고 고의로 부도를 냈다가 지난해 1월 횡령 및 조세포탈 혐의로 형사 처벌됐다.
부방위가 부패 사건을 가장 많이 이첩해준 감사원 전경.
정성진 국가청렴위원장은 “해마다 부패사범 기소 건수가 감소하고 공직사회의 관행적인 떡값 수수 등은 개선되는 추세지만, 사업 관련 이권 보장, 퇴직 후 취업 보장이나 자녀 취업 보장 등의 부패 유사행위 사례는 증대하는 경향이 있다”면서 “과거에는 부패로 여기지 않던 정책과정의 영향력 행사도 부패 행위로 인식하는 등 국민의 도덕적·윤리적 기준이 상승한 만큼 투명한 공직사회를 이루기까지 아직 갈 길이 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