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보험료(이하 의보료) 연체 기간중 보험 혜택을 받은 국민을 대상으로 정부가 치료비(보험급여) 강제환수에 나서자 각계에서 비난의 목소리가 쏟아지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3월 건강보험공단에 의보료 체납 중 진료에 따른 ‘부당이득금’ (150만건, 638억원·1998년 9월 이전 분)에 대한 환수를 지시하고, 대상자에 대한 보유재산 조사에 착수케 했다.
부당이득금이란 의보료를 2개월에서 3개월(99년 3월 이후) 이상 체납한 보험가입자가 체납 기간중에 받은 병원 진료에 대해 건강보험공단이 병·의원에 보험급여로 부담한 진료비. 현행 건강보험법(구 의료보험법)은 공단이 연체 기간중에 가입자에 대한 보험급여를 제한할 수 있으며, 이미 지급된 보험급여(부당이득금)에 대해서는 추후에 환수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부당이득금 환수 포기했다 복지부 감사 후 번복
의보료 체납자에 대한 복지부의 부당이득금 강제징수는 언뜻 보기에는 당연한 행정행위인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우선 의보료 징수기관인 보험공단은 98년 9월 이전까지 의보료 체납자에 대해 보험료 연체 사실과 그로 인한 보험혜택(보험급여) 제한 통지를 아예 하지 않거나 형식상으로만 통지했다.
이는 84년 이후 의료보험법상 의보료 연체자에 대한 보험급여 제한 사전통지 의무조항이 신설과 폐지를 반복하며 법체계의 혼란상이 계속된 때문. 심지어 98년 10월부터 5개월간은 보험료 연체자에 대한 급여 제한 조항 자체가 의보법에서 삭제되기도 했다. 통지 조항이 있을 당시에도 수취인이 반드시 받아보게끔 하는 등기우편 통지제도는 실시되지 않았다.
건강보험관리공단(오른쪽). 부당이득금 일괄 취소의 최고 결정자 박태영 전 이사장(왼쪽)은‘정치적인 인물’이라는 이유로 복지부의 징계대상에서 제외됐다.
주목할 점은 공단이 이러한 이유로 문제의 부당이득금 환수를 모두 포기한 적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공단은 지난해 8월 보험급여 제한 사실을 개별통보하지 않은 채 부당이득금으로 고지한 150만건, 638억원에 대해 박태영 당시 이사장의 결재를 받아 전격 취소(일괄 고지 취소) 결정을 내린 후, 대상자의 재산에 대해 행해진 압류조치를 해제했다.
공단의 이 같은 파격적 결정은 99년 5월 서울 도봉구 임모씨(40)가 공단을 상대로 낸 행정소송에서 승소한 데 따른 것이다. 당시 임씨는 ‘사전고지 없는 부당이득금 환수는 부당하다’라는 주장을 펴 1심과 2심에서 모두 승소 판결을 받아냈고, 공단은 대법원 상고를 포기했다. 당시 법원의 확정 판결 내용은 ‘보험 급여를 제한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고 고지한 부당이득금 환수 처분은 그 하자가 중대하고 명백하여 무효’라는 내용. 사전통보 조치나 보험계약 해지와 같은 보험제한 조치가 없는 부당이득금 환수는 ‘원인무효’라는 취지의 판결이었다.
지역보험 가입자인 임씨는 의보료 자동이체 통장의 잔고 부족으로 의보료가 3개월간 연체된 줄 모른 채 병원에서 136만원 상당의 보험 혜택을 받았는데, 공단에서 이를 부당이득금이라며 환수를 요구하자 소송을 냈었다.
이후 공단은 체납자에 대하여 급여 제한 사실을 사전통지하도록 공단정관을 개정하고, 지난해 12월부터는 등기우편으로 체납자에게 급여 제한 사실을 개별적으로 사전통보하고 있다.
문제는 행정행위의 잘못을 인정하고 부당이득금 고지를 취소했던 공단이 올 3월 갑자기 이 결정을 다시 번복함으로써 불거졌다. 지난해 8월 공단이 내린 부당이득금 일괄 취소 결정을 복지부가 감사를 통해 7개월 만에 다시 원상회복토록 한 것. 법원 판결에 의해 이루어진 공단 결정이 상위기관의 행정감사를 통해 어떻게 한순간에 뒤집힐 수 있었을까.
건보료를 내기 어려운 사람들 중에는 극빈자가 많다. 이들이 몇 달 보험료를 연체했다 해서 그 기간중에 받은 의료혜택을 모두 환불하라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이는 한나라당 심재철 의원(국회 보건복지위)이 지난해 11월23일 뿌린 보도자료를 보면 다시 한번 확인된다. 심의원은 당시 보도자료를 통해 “부당이득금의 사전통보를 하지 않는 등 공단의 잘못이 법원에 의해 지적되자 공단이 이를 은폐하기 위해 부당이득금 638억원을 전산에서 무단 삭제하고, 결국 국민의 돈을 눈 깜짝 않고 날려버렸다”고 주장한 뒤 “파탄 난 건강보험 재정 확보를 위해 노력해야 할 공단의 도덕적 해이가 극에 달했다”며 관계자에 대한 엄중 처벌을 요구했다.
심의원의 자료가 발표된 뒤 언론은 이를 대서특필했고, 복지부는 일주일 후인 11월30일부터 12월8일까지 공단에 대한 감사를 벌였다. 복지부가 밝힌 공단에 대한 감사 배경은 ‘언론의 비난성 기사가 보도되는 등 국민건강보험 행정의 대국민 신뢰도 실추’, 감사 결과 처분 사항은 ‘부당이득금 취소 처분의 번복’과 ‘관련자 징계’였다. 이 결과 당시 공단 상무였던 주씨는 해임됐고, 3명의 직원은 감봉 등 중징계를 받았다.
심재철 의원측은 “당시 보도자료는 이미 부당이득금을 납부한 사람들(400억원)에 대한 형평성 문제를 고려하고, 보험재정이 파탄 난 상황에서 문제가 된 638억원에 대해 국회에서 함께 논의를 벌여 해결책을 찾자는 취지였지 공단의 부당이득금 고지 일괄 취소 결정을 다시 번복하라는 이야기는 아니었다”고 해명했다.
그렇다면 과연 복지부가 공단의 부당이득금 고지 취소를 다시 번복하게 한 것은 타당한 이유가 있는 것일까. 복지부가 감사 결과 공단의 부당이득금 고지 취소 처분에 대해 그 부당성을 지적한 부분은 크게 두 가지다. 우선 복지부는 ‘건강보험재정에 중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결정은 공단 이사회와 재정운영위원회의 심의의결을 거쳤어야 함에도 공단이 이를 무시하고 공단 이사장의 단독 결재로 처리했으며 상위 기관과 사전협의가 없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공단측은 “복지부의 관련 부서와 충분한 사전협의를 거쳤으며, 현재에도 잘못된 부당이득금 고지 취소 처분은 각 지사장의 결재 절차를 거쳐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인데 150만건에 달하는 분량을 한꺼번에 공단 이사장이 처리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됐느냐”며 반박한다.
실제 복지부의 주장은 당시 공단 이사장에 대한 처리를 보면 설득력을 잃는 부분이 많다. 복지부는 공단에 대한 감사 이후 부당이득금 고지 취소 결정에 참가했던 실무진들에게만 해직 등 징계조치를 내렸을 뿐, 정작 취소 처분의 마지막 결정자였던 박태영 당시 공단 이사장에 대해서는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심지어 복지부측은 박 이사장을 징계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정치적인 인물’이기 때문”이라고 둘러대 빈축을 사기도 했다. 또 복지부와 사전협의가 없었다는 주장 역시 당시 복지부와 협의를 했던 공단 직원들의 출장명령서 등 관련 서류가 공단에 남아 있어 설득력을 잃고 있다.
복지부가 그 다음으로 지적한 부분은 ‘공단이 법원의 판결사항을 확대 적용했다’는 것. 복지부는 감사 결과 처분요구서를 통해 “법원의 판결은 재판 당사자에게만 효력을 가지는 것일 뿐 부당이득금 고지 대상자 전체에게 효력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공단 관계자는 “공단의 부당이득금 일괄 직권취소의 적법, 위법 여부를 따지기 위해 각종 법무법인과 고문변호사에게 자문을 구했고 일괄 취소를 해야 한다는 답변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잘못된 행정처리를 과감하게 고쳐 가입자의 피해를 줄이려는 차원인데 복지부가 무엇 때문에 이러는지 이유를 알 수 없다”는 항변이다.
당시 공단의 법률자문을 맡은 변호인측(법무법인 세창, 법무법인 광장)은 법리해석에서 “행정행위의 하자가 중대하고 명백하다는 법원의 판결에 따라 보험자(공단)가 보험급여 제한 사실의 사전안내가 없는 경우의 부당이득금 고지는 ‘당연 무효’이기 때문에 공단의 직권취소는 타당하다. 다만 이미 부당이득금을 납부한 사람에게는 납입 금액을 반환하는 것이 원칙이나 재정 손실을 감안해 소송이나 행정심판 등을 해오는 사람에 한하여 반환하라”는 의견을 개진했다.
복지부의 논리가 설득력이 약하다는 사실은 부당이득금 고지를 일괄 취소했다는 이유로 해임된 공단 상무 주씨에 대한 해임처분취소소송 결과에서도 증명됐다. 1심 법원이 복지부의 해임조치가 부당하다며 주씨의 손을 들어준 것.
서울대 보건대학원 김창엽 교수는 “복지부의 사고방식은 집단소송제가 아직 도입되지 않는 나라에서 수만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모두 개별적으로 소송을 해서 잘못된 행정행위를 수정하라는 이야기인데 이게 말이 되는 이야기냐”며 “어떻게 이 문제가 직원의 해임과 징계로 연결될 사안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개탄했다.
과연 건강보험제도는 누구를 위한 제도인가? 이 물음에 복지부가 떳떳하게 대답할 수 있을 때 건강보험료에 얽힌 난맥상도 하나 둘씩 풀릴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