껄끄러운 관계였던 포스코 전 회장 박태준씨(전 국무총리·위)와 김만제 의원(아래)의 화해 소식에 유상부 회장 등 포스코 관계자들은 미묘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어제의 ‘적’에서 오늘의 ‘친구’로 변한 두 주인공은 박태준 전 국무총리(TJ)와 김만제 전 포스코 회장(현 한나라당 의원). 김만제 의원의 한 측근은 “두 분은 올 5월 서울 논현동 TJ 전셋집에서 만나 그동안의 오해를 풀고 화해했다”고 전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부터 잘 알고 지내는 사이인 데다 포스코를 위해서도 포스코 회장을 역임한 두 사람이 화합해야 한다는 주변의 권유를 받아들여 자연스럽게 두 사람 간 만남이 이뤄졌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포스코 주변에선 두 사람 간 ‘정치적 이해’가 맞아떨어진 결과라고 분석하고 있다. 한나라당 집권시 포스코를 ‘관리 감독’할 적임자로는 김영삼 정부 시절 포스코 회장을 역임한 김만제 의원이 첫손에 꼽힌다. 이 경우 김의원으로서는 TJ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TJ 역시 김의원과의 ‘연대’를 통해 포스코에 대한 영향력을 계속 행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두 사람 간 화해는 ‘윈윈 게임’이라는 얘기다.
두 사람 화해는 ‘윈윈 게임’
두 사람 간 화해는 나아가 TJ와 한나라당 이회창 대통령후보 간 연대가 이뤄진 게 아닌가 하는 관측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자민련 총재 시절 TJ의 비서실장을 지냈던 조영장 전 의원은 “박 전 총리가 5월 귀국 이후 과거 정치를 함께 하던 여야 정치인 50여명을 만나긴 했지만 정치에서는 이미 떠났다”면서 ‘연대’ 운운하는 것 자체가 난센스라고 말했다. 잘 알려진 대로 TJ는 ‘DJT(김대중 김종필 박태준) 연대’를 통해 현 정부를 탄생시킨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다.
두 사람 간 화해 소식은 포스코 내에 미묘한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당장 유상부 현 회장의 임기 연장 노력도 더 이상 힘을 얻기 어렵게 됐다는 게 포스코 안팎의 분석이다. 유회장의 임기는 내년 3월까지다. 포스코 주변에선 “TJ와 김만제 의원이 93년과 98년 각각 회사를 떠난 O씨와 K씨를 내년 3월 주총에서 회장과 사장으로 앉힌다는 데 합의했다”는 얘기마저 나돌고 있다.
황경로(전 포스코 회장),박득표(포스코건설 회장),안병화(전 포스코 사장),여상환(전 포스코 부사장)(왼쪽부터)
98년 정권교체로 두 사람의 사정은 단번에 역전됐다. 98년 3월 주총에서 TJ의 추천을 받은 유상부씨가 회장에 선임되는 등 ‘TJ 사단’ 인맥이 화려하게 부활한 반면 김종진 당시 사장을 비롯해 김진주 부사장, 이동춘 부사장 등 김만제 회장 인맥은 회사를 떠나야만 했다. 설상가상으로 김만제 의원은 8개월 동안 감사원 특별감사에 시달려야 했다. 당연히 김만제 회장에 대한 ‘TJ 사단’의 구원(舊怨)이 작용한 ‘표적 감사’ 시비가 일었다.
두 사람 간 화해 사실이 포스코 임원들 사이에 알려진 것은 8월 중순 무렵. 전직임원들 사이에 유상부 회장 담당 재판부인 서울형사지법 23부에 제출할 탄원서가 돌던 때였다. 이 무렵 “TJ와 김만제 의원이 화해한 후 함께 탄원서에 서명했다”는 얘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유상부 회장은 6월28일 미래도시환경 대표 최규선씨의 청탁을 받고 타이거풀스 주식 20만주를 시세보다 비싼 70억원에 매입토록 계열사 등에 지시한 혐의로 불구속기소됐다. 유회장에 대한 첫 공판은 9월12일 이뤄졌고, 두 번째 공판은 한 차례 연기 끝에 10월 말로 예정돼 있다.
유회장은 그러나 여전히 무죄를 주장하고 있다. 그는 첫 공판에서도 “당시 회계법인 분석자료 등을 토대로 타이거풀스 주식이 충분히 투자가치가 있고, 싸다고 판단해 매입을 추천한 것이지 지시한 건 아니다”고 주장했다. 그가 TJ측의 무언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퇴임을 거부하고 있는 것은 이런 확신 때문이다.
유회장측 인사들은 아울러 TJ가 유회장을 비난할 자격이 있는지 자문해봐야 한다고 맞서고 있다. 설사 유회장이 정치권 실세의 ‘외압’에 의해 타이거풀스 주식 매입을 지시했다고 해도 적어도 TJ 시절보다는 훨씬 ‘싸게 때웠다’고 주장한다. 유회장측 인사는 “TJ는 과거 자신의 자리 유지를 위해 전두환 대통령 처남 등에게 ‘특혜’를 주는 등 회사에 많은 손해를 끼쳤던 사람 아니냐”고 반문했다.
최근 포스코가 막대한 순이익을 거둔 것을 두고 일부에서는 단기 업적주의의 산물이라는 견해도 있다. 사진은 포스코 광양제철소.
김만제 의원의 한 측근은 “‘최규선 게이트’ 연루 의혹을 받아 회사 이미지에 나쁜 영향을 미친 유회장이 스스로 물러나지 않고 있는 데다 재판이 장기화되면 그때마다 회사 이름이 거론될 것으로 보여 재판을 빨리 끝내달라는 취지의 탄원서를 작성, 제출하게 됐다”고 탄원서 제출 배경을 밝혔다.
탄원서에 서명한 사람은 TJ와 김만제 의원을 비롯해 황경로 전 회장, 안병화 전 사장 등 모두 80여명인 것으로 알려졌다. 전직임원 대부분이 “유회장이 스스로 물러나야 한다”는 취지에 공감을 표시한 셈이다. 포스코 안팎에서 “유상부 회장을 비롯한 현직임원 대 전직 임원 간 대결 구도가 형성됐다”는 얘기가 나돈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현직임원 가운데 탄원서 서명에 참여한 사람도 있다는 점. 박득표 포스코건설 회장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포스코 관계자는 “박회장이 서명에 참여한 후 유상부 회장에게 전화를 걸어 양해를 구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박회장측 관계자는 “포스코 전직임원들 모임인 ‘중우회’ 차원에서 이뤄진 일이어서 중우회 회원인 박회장으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고 해명했다.
반면 중우회 회원 가운데서도 이동춘 전 감사와 조말수 전 사장은 서명을 거부해 박회장과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다. 두 사람을 잘 아는 포스코 관계자는 “93년 사장 재직 당시 ‘TJ 흔적 지우기’에 앞장섰다는 ‘오해’를 받았던 조말수 전 사장이야 TJ 쪽에서도 별 기대를 하지 않았겠지만 이동춘 전 감사의 거부는 ‘의외’였을 것”이라면서 두 사람의 ‘깔끔한’ 처신을 보여준 사례라고 평가했다. 이미 회사를 떠난 사람들이 ‘집단적인’ 의사 표시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 두 사람의 생각이라는 것.
포스코 직원들 역시 비슷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한 과장급 직원은 “유상부 회장은 어차피 내년 3월이면 물러날 사람이라고 생각해 직원들 사이에서는 더 이상 왈가왈부할 대상이 아닌 상태지만 그렇다고 해서 ‘TJ 사단’이 다시 포스코를 접수하는 것도 대안은 아니라는 게 직원들 정서”라고 전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게 직원들 생각이라는 얘기다.
전직임원들의 서명운동 사실이 알려지면서 포스코 내에서는 “유회장이 내우외환에 시달리게 됐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포스코 내부에서도 유회장에 대한 직원들의 불신감이 높기 때문. 더구나 7월 중순 과장급 이상 직원 1900여명 가운데 5% 정도를 ‘희망’ 퇴직시킨다는 방침을 세웠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직원들은 노골적으로 유회장을 성토하는 분위기.
회사 사표 종용 직원들 반발
현재 회사측은 10월 초 ‘희망’ 퇴직 대상자를 선별해 본인에게 사표를 종용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희망’ 퇴직 신청자가 없는 데 따른 고육책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일부는 “유회장이 나를 심판할 자격이 있느냐”면서 사표 제출을 거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의 반발은 사실 유회장이 자초한 측면이 있다. 유회장은 98년 취임 이후 고용안정을 명분으로 임금동결을 계속해왔다. 그런 상황에 ‘희망’ 퇴직을 강요하자 이제는 고용안정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렸다는 불만이 제기되고 있는 것. 반면 임원들에게는 스톡옵션(정해진 가격에 회사 주식을 매입할 수 있는 권리)을 부여하는 등 많은 혜택을 주었다. 유회장이 받은 스톡옵션은 모두 10만주.
유상부 회장을 비롯한 포스코의 현 임원들은 중우회 회원들의 탄원서 제출에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유회장의 한 측근은 “두 사람이 화해했다면 반가운 일임이 틀림없다”고 전제하면서도 “그러나 두 사람이 합의해 신임회장을 선임한다거나 하는 일은 난센스”라고 반박했다. 민영화된 지 2년이 지난 ‘주식회사’ 포스코 임원은 주주들이 선임할 일이지, 그 두 사람이 관여할 일은 아니라는 것.
경영학적으로야 틀린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TJ-김만제 화해 소식이 알려진 이후 현실적인 힘은 두 사람에게 급격히 쏠리고 있다. 그리고 그 주변에는 이들의 파워를 ‘이용’하려는 일부 인사들이 모여들고 있다는 얘기마저 나온다. 어쩌면 포스코 민영화 이후 가장 큰 도전이라고 할 수 있는 ‘정치 외풍’이 서서히 불어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