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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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올 한올 땀땀이 신의 솜씨 빌린 듯

  • 글·사진/ 전화식 다큐멘터리 사진가 utocom@kornet.net

    입력2002-10-23 14: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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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올 한올 땀땀이 신의 솜씨 빌린 듯

    벽에 새겨진 태피스트리 장인의 모습이 이곳이 태피스트리의 본고장임을 느끼게 한다.

    태피스트리는 여러 가지 색실로 무늬를 짜 넣은 직물을 말한다. 손 또는 기계로 짠 태피스트리는 가구덮개, 벽걸이, 양탄자 등 그 쓰임새가 다양하다. 카펫이 바닥 전체를 덮는 것을 주목적으로 해 만들어진 것이라면, 태피스트리는 장식의 의미가 한층 가미된 것이라 하겠다.

    프랑스 오뷔송은 태피스트리의 본고장이라 일컬어지는 곳이다. 프랑스 내에서도 웅장하고 가파른 주변 경치로, 가장 깊숙하게 숨겨져 있는 ‘보물지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푸른 나무들이 웅장한 숲과 한적한 시골풍경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오뷔송은 실제 숲속 낙원을 연상케 한다.

    사람들 역시 우리네 시골 농부와 아낙의 이미지 그대로다. 그러나 그들의 손끝에서 아름다운 태피스트리가 만들어지는 만큼, 그들한테서는 예술가에게서 느낄 수 있는 따뜻한 마음과 섬세함을 발견할 수 있다.

    이곳에는 사람들의 마음만큼 맑고 투명한 강이 흐르는데, 바로 이 강물이 오뷔송을 태피스트리의 고장으로 만드는 원동력이다. 이 강물이 태피스트리와 융단에 사용할 염색액을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건장한 남자들이 강물을 떠다 염색액을 만들고 실을 물들여 놓으면, 아낙들은 날실을 세우고 씨실을 교차하며 밑그림에 맞춰 정성껏 풍경화를 만들고 정물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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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성된 태피스트리는 한 폭의 그림을 연상시킨다.

    이렇게 만들어진 태피스트리는 유럽을 비롯해 전 세계 각 지역으로 퍼져 나갔고 오뷔송의 이름도 이때부터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산업화 속에서도 수공업 맥 이어

    태피스트리가 전성기를 맞게 된 것은 17세기경 플랑드르의 직공들이 이주해 오면서부터다. 플랑드르는 그 미술 경향을 이탈리아에까지 전파시킨 예술의 나라였으나, 프랑스와 벨기에, 네덜란드로 나눠지면서 지도상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작은 공국인 플랑드르 출신의 직공들이 프랑스로 건너온 이후 베르사유 궁전과 왕실에 사용되는 태피스트리 제작소가 따로 만들어질 만큼 프랑스에서는 태피스트리 전성시대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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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태피스트리 공방에서 태피스트리를 짜고 있는 여인.양지바른 곳에서 잘 염색된 실을 말리고 있다.(위 부터)

    태피스트리의 재료로는 가공이 쉽고 내구력이 강하며 염색이 잘 되는 양모가 주로 사용된다. 또한 모사에 아마사, 견사, 면사를 날실로 섞어 사용하기도 한다. 이렇게 다른 재질의 날실을 이용하는 것은 더욱 다양한 색상과 질감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태피스트리는 날실이 씨실에 의해 감춰지도록 짜여진 평직이다. 즉 날실이 나타나지 않고 씨실만으로 여러 가지 무늬를 짜 넣었다. 일반적으로 직물에서는 씨실이 직물의 밑단에서부터 1줄의 실로 짜여지지만, 태피스트리는 미리 패턴을 만들어 틀 아래에 두고 몇 종류의 색실로 그림에 맞춰 짜나가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태피스트리 작업이 다른 직물에 비해 어려운 것은, 특정한 디자인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실을 정확하게 짜 넣어야 하며 이때 고도의 숙련과 치밀함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태피스트리를 완성하는 데는 오랜 기간과 세심한 작업이 필요하다. 오뷔송의 태피스트리가 돋보이는 것도 바로 그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솜씨 있게 만들어내는 장인 덕분이다.

    오뷔송에서 태피스트리를 짤 때는 여러 가지 도구가 동원된다. 고블랭 타입의 업라이트 수직기나 보통 수평형 직조기가 이용되고, 작은 것을 짤 때는 4각나무를 사용하기도 한다. 또 나무틀로 소품을 짤 경우에는 보빈을 사용하여 한줄 한줄 짜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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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뢰즈 강은 오뷔송을 태피스트리의 고장으로 만드는 원동력이다.완성된 태피스트리 작품들.(위 부터)

    물론 태피스트리의 운명에도 굴곡은 있었다.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 이후, 혁명의 후유증과 벽지 생산으로 인해 태피스트리 제조가 거의 소멸되다시피 했다. 단지 몇몇 장인들의 수작업에 의해 겨우 명맥이 이어져오던 오뷔송의 태피스트리가 다시금 전성기를 맞게 된 것은 1940년대의 일. 태피스트리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잊지 않고 있던 화가이자 디자이너인 장 뤼르사가 태피스트리를 도안하고 짜는 기술을 부흥시키면서부터였다. 그는 소멸해버린 태피스트리 제조 기술을 복원하고, 오뷔송에 현대화된 태피스트리 제조 센터를 건립했다.

    그러나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기계를 이용해 직물을 짜게 되자 전통적인 수공품인 태피스트리 공예는 또다시 생존의 위협을 받게 되었다. 점점 사장의 길로 들어선 태피스트리는 영국의 미술 공예 운동가들에 의해 다시 되살려지게 된다. 이들은 산업혁명에 의한 대량생산으로 개인의 창의성이 훼손당하자, 이에 맞서 수공업 장인들의 기량을 되살리려고 노력했던 것.

    이처럼 옛것을 아끼고 되살리려는 노력에 의해 태피스트리의 맥은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져오고 있다. 현재 오뷔송에서는 대중들이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든 공예품들에서부터 예술성이 돋보이는 작품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태피스트리가 제작되고 있다. 오뷔송 태피스트리의 인기 비결은 대중들과 쉽게 호흡할 수 있는 태피스트리라는 데 있다 하겠다. 이곳 사람들을 지켜보면서 이름도 없이 사라져만 가는 우리 전통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마음 한켠이 서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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