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스’의 멤버인 크리스토퍼 오웬(위)과 쳇 화이트.
간접경험이 없다면 인간 사회는 어떻게 될까. 모르긴 해도 그 세상에서는 ‘X인지 된장인지 먹어봐야 안다’는 속담을 쓸 것이다. 나는 수잔 베가의 ‘루카(Luka)’나 벨 앤 세바스티안의 ‘샬럿 라인’(Charlot Line), 태미 와이넷의 ‘D.I.V.O.R.C.E.’를 들으며 한 다리 건너의 경험을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지금에 만족한다. 가정폭력과 데이트 강간, 이혼 등의 이슈는 4분짜리 노래를 통해 경험하는 것만으로 이미 참혹하고 섬뜩하니까.
밴드 ‘걸스(Girls)’의 리더 크리스토퍼 오웬은 간접경험으로조차 알고 싶지 않은 생애를 살아온 뮤지션이다. 그는 ‘하나님의 자녀파(派)’라는, 이름만으로도 으스스한 종교집단에서 태어나 자랐다. 외부와 단절된 채 자급자족으로 살아가는 이 공동체에서 그의 형제가 죽었다. 의학적 치료를 거부하라는 자체 지침을 따랐기 때문. 이후 가족은 충격을 받고 뿔뿔이 흩어졌다. 폐쇄적 종교공동체에서의 이탈이란 목숨을 건 모험이었을 것이다.
현대 도시생활에 백지상태인 채 대도시로 나온 그에게 세상은 차갑고 매몰찬 곳이었다. 비참한 노숙자 생활을 전전하는 동안 진짜 악마의 손길이 다가왔다. 알코올과 마약. 다행히 오웬은 폐사 직전 한 복지사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살아났다. 하지만 그 악몽 같은 기억을 완전히 떨쳐낼 수 없었는지, ‘걸스’의 데뷔 앨범인 ‘앨범(Album)’에는 그의 ‘직접경험’이 듬뿍 담겨 있다. 늦은 시간 약간의 취기를 벗 삼아 이 앨범을 듣고 있노라면, “동네 뒷산에서 본드를 불던 중 남산에 괴수가 출현한 것을 보고 손가락에서 레이저 광선을 발사해 지구를 지켰다”던 친구의 친구 이야기가 떠오르곤 했다.
전작의 성공에 이은 그들의 새 앨범 ‘무너진 꿈의 클럽(Broken Dreams Club)’은 ‘약 기운’이 쫙 빠진 대신 1960년대 팝의 황금기를 떠올리게 하는 단순, 소박한 음률로 가득 찼다. 노랫말은 실연 후 강해지는 자기 연민을 주로 다룬다. “나는 영원히 외로울 거라던 네 목소리가 머릿속에 맴돌아/ 텔레비전을 켜고, 전화기를 꺼봐도”(‘Heartbreaker’)라든가 “넌 내 인생의 유일한 사랑/ 하지만 넌 날 완전히 돌아버리게 만들어”(‘Alright’) 같은 가사가 실제 오웬의 경험담인지는 알 수 없지만, 꼭 오래전에 내가 쓴 습작처럼 아련하게 느껴진다.
과학자들의 보고에 따르면 열정적인 사랑에 빠진 사람의 뇌는 마약 중독자의 뇌 활동과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고 한다. 쾌락 중추를 자극하는 도파민, 그 강력한 천연각성제는 고통을 잊게 하고 헛것을 보게 만들며 끝없는 집착을 불러일으킨다. 이는 마약에 중독된 사람도 공통적으로 보이는 증상이라는 것. 마약과 금단 증상은 경험한 적 없지만 연애와 실연이라면 나도 좀 해봤다. 오웬의 상처 입은 초식동물 같은 눈망울을 보며 ‘걸스’의 ‘무너진 꿈의 클럽’을 듣노라니, 이젠 ‘간접경험’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정바비는 1995년 인디밴드 ‘언니네 이발관’ 원년 멤버로 데뷔한 인디뮤지션. ‘줄리아 하트’ ‘바비빌’ 등 밴드를 거쳐 2009년 ‘브로콜리 너마저’ 출신의 계피와 함께 ‘가을방학’을 결성해 2010년 1집 ‘가을방학’을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