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신음하고 있다. 사상 최악의 대지진, 쓰나미(지진해일), 원전의 연쇄 폭발로 수많은 사상자를 냈다. 자연재해의 무서움 앞에 힘없이 무릎 꿇고 스러져간 사망자와 실종자의 슬픔과 억울함이 남아 있다. 살아남은 자는 가족 잃은 슬픔과 분노를 가슴에 안고, 평생 트라우마(정신적 외상)에 시달릴 것이다.
우리는 일본인이 당한 처참한 피해를 안타까워하면서도 대재앙 앞에서 침착하고 질서 정연한 그들의 모습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영국 신문 ‘파이낸셜타임스’(FT)는 3월 14일자 칼럼에서 “인류가 더 강해지고 있다는 것을 일본이 보여줬다. 일본의 시민의식은 인류의 정신이 진화한다는 사실을 보여줬다”며 격찬했다. 우리 언론도 그들의 질서의식과 남을 배려하는 문화에 찬사를 보낸다.
일본의 중국 유학생은 ‘파이낸셜타임스’ 기고문에서 “일본이란 나라를 좋아하지 않지만, 이번 지진을 통해 일본인은 믿을 수 있다고 느꼈다”고 썼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우리의 속마음은 과연 어떠한지 알아보자. 일본의 불행을 혹시 외면하고 싶은 마음이 있지는 않은가. 혹은 누구의 말대로 벌 받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그렇다면 무서운 일이다. 우리의 마음에 분노와 원한이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대재앙 앞에서도 일본인은 인간의 위대한 본성 중 하나인 이타주의를 보여줌으로써 우리를 감동시키고 있다. 이타주의는 정신의학적 방어기제 중 하나이기도 하다. 남의 탓을 하는 ‘투사’나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합리화’ 등과는 차원이 다른 훌륭한 방어기제다. 이는 본능적인 자기만족을 포기하고 다른 사람을 건설적으로 도와줌으로써 대리만족을 얻는 것이다.
한국인이 진심으로 돕는 ‘공감’ 능력 발휘할 때
이러한 대리만족은 더 큰 자기만족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즉각적인 만족이 아니라 추후의 보다 깊이 있고 오래 지속되는 만족이다. 이제는 우리가 그들에게 중요한 덕목을 배울 때다. 그들을 도와줌으로써 이타주의와 인류애를 실천하는 것이다.
어려움에 처한 일본을 도와주는 것은 우리에게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다. 일본인에 대해 부러움과 시기, 미움과 거부감 등 복잡한 심리를 갖고 있던 우리 한국인에게 비로소 화해와 관용, 이해의 순간이 온 것이다. 내 마음속 부정적 감정의 찌꺼기를 청소하는 데 필요한 덕목이 이타주의요, 인류애다.
그전에 요구되는 덕목이 하나 더 있다. ‘공감’의 능력이다. 일본인의 아픔과 어려움을 나의 가족, 친구, 이웃 또는 나 자신의 그것처럼 느끼는 것이다. 그래야 진정한 도움을 줄 수 있다. 외교적 관례처럼 위로의 말을 던지거나 나중의 이익을 위해 지금 도와준다는 식의 계산적 행동을 해서는 그들의 마음을 얻지 못한다. 도와주더라도 정말 가슴 아파하면서 도와줄 때 남을 위한 행동은 빛을 발한다.
일본인이 지금 보여주는 배려와 질서, 나아가 이타주의는 인류의 본성을 한 단계 발전시키고 있으며 인류애를 자극한다. 지구촌은 이를 본받아 민족과 종교, 이념이 다른 사람끼리도 서로 배려하고 위해주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일본이여, 어서 빨리 일어서라!
우리는 일본인이 당한 처참한 피해를 안타까워하면서도 대재앙 앞에서 침착하고 질서 정연한 그들의 모습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영국 신문 ‘파이낸셜타임스’(FT)는 3월 14일자 칼럼에서 “인류가 더 강해지고 있다는 것을 일본이 보여줬다. 일본의 시민의식은 인류의 정신이 진화한다는 사실을 보여줬다”며 격찬했다. 우리 언론도 그들의 질서의식과 남을 배려하는 문화에 찬사를 보낸다.
일본의 중국 유학생은 ‘파이낸셜타임스’ 기고문에서 “일본이란 나라를 좋아하지 않지만, 이번 지진을 통해 일본인은 믿을 수 있다고 느꼈다”고 썼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우리의 속마음은 과연 어떠한지 알아보자. 일본의 불행을 혹시 외면하고 싶은 마음이 있지는 않은가. 혹은 누구의 말대로 벌 받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그렇다면 무서운 일이다. 우리의 마음에 분노와 원한이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대재앙 앞에서도 일본인은 인간의 위대한 본성 중 하나인 이타주의를 보여줌으로써 우리를 감동시키고 있다. 이타주의는 정신의학적 방어기제 중 하나이기도 하다. 남의 탓을 하는 ‘투사’나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합리화’ 등과는 차원이 다른 훌륭한 방어기제다. 이는 본능적인 자기만족을 포기하고 다른 사람을 건설적으로 도와줌으로써 대리만족을 얻는 것이다.
한국인이 진심으로 돕는 ‘공감’ 능력 발휘할 때
이러한 대리만족은 더 큰 자기만족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즉각적인 만족이 아니라 추후의 보다 깊이 있고 오래 지속되는 만족이다. 이제는 우리가 그들에게 중요한 덕목을 배울 때다. 그들을 도와줌으로써 이타주의와 인류애를 실천하는 것이다.
어려움에 처한 일본을 도와주는 것은 우리에게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다. 일본인에 대해 부러움과 시기, 미움과 거부감 등 복잡한 심리를 갖고 있던 우리 한국인에게 비로소 화해와 관용, 이해의 순간이 온 것이다. 내 마음속 부정적 감정의 찌꺼기를 청소하는 데 필요한 덕목이 이타주의요, 인류애다.
그전에 요구되는 덕목이 하나 더 있다. ‘공감’의 능력이다. 일본인의 아픔과 어려움을 나의 가족, 친구, 이웃 또는 나 자신의 그것처럼 느끼는 것이다. 그래야 진정한 도움을 줄 수 있다. 외교적 관례처럼 위로의 말을 던지거나 나중의 이익을 위해 지금 도와준다는 식의 계산적 행동을 해서는 그들의 마음을 얻지 못한다. 도와주더라도 정말 가슴 아파하면서 도와줄 때 남을 위한 행동은 빛을 발한다.
일본인이 지금 보여주는 배려와 질서, 나아가 이타주의는 인류의 본성을 한 단계 발전시키고 있으며 인류애를 자극한다. 지구촌은 이를 본받아 민족과 종교, 이념이 다른 사람끼리도 서로 배려하고 위해주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일본이여, 어서 빨리 일어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