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노’ 드라마가 화제다. 문자 그대로 ‘노비를 쫓는다’는 뜻인데, 드라마를 보던 아내가 ‘원손마마’가 누구냐고 물어왔다. 그 참에 잠시 들여다본 것이 필자가 이 드라마를 시청하게 된 계기다. 드라마의 배경은 조선 효종 시대. 문제의 원손마마를 제대로 알려면 병자호란으로 인조의 큰아들 소현세자와 둘째 봉림대군이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간 사실에서 출발해야 한다.
청과 명의 전쟁이 막바지에 다다르던 시점에서, 청나라가 조선을 침공한 이유는 명나라와 ‘군신관계’를 맺고 있는 조선이 청의 배후를 위협할 가능성 때문이었다. 강화조약의 조건은 ‘신하의 나라’가 될 것을 약속하고 그 이행조건으로 왕자와 대신을 볼모로 잡아가겠다는 것. 비극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청’의 가능성을 간파한 소현세자는 볼모로 있는 동안 청나라 실력자들과 교유하고, 문물을 공부했으며, 실리 위주의 외교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뼈저리게 체험했다. ‘명’이 망하고 더 이상 조선이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청 태종은 소현세자를 조선으로 돌려보내겠다는 결정을 내린다. 청 태종은 소현세자에게 왕의 복색을 상징하는 ‘자의(紫衣)’를 내림으로써 신임을 확인한다. 노련한 외교술을 배운 볼모 신분의 조선 왕자가 신흥강국 청과 우호적인 협력관계를 맺는 데 성공한 것이다.
문제는 인조였다. 청 황제가 임금의 복식을 하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인조는 소현을 의심한다. 청 태종이 자신을 밀어내고 소현을 왕으로 삼으려 한다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것. 귀국 후 동궁에 유폐된 소현세자는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고 둘째 봉림이 세자가 된다. 장자가 사망하면 당연히 손자에게 왕위가 돌아가야 함에도 둘째 아들 봉림(효종)에게 왕위를 물려주려던 인조는 소현세자 비(妃) 강씨를 역적으로 몰아 사사하고, 소현의 세 아들을 제주도로 유배 보낸다. 제주도는 풍토병이 심해 약한 어린아이가 살아가기 힘든 곳. 그곳에서 소현의 큰아들과 둘째 아들이 풍토병으로 사망하고 셋째 아들만 살아남게 된다.
이 일이 바로 조선조 당쟁의 본격적인 시발점. 당시 집권세력인 서인(西人) 중에는 이것이 사실상 왕권계승의 정통성을 어긴 것이라는 시선이 있었다. 효종은 이에 정통성 강화를 위해 청나라에 대한 복수에 집착했다. 효종의 북벌주장에 형식적으로는 동조하면서도 ‘시기상조론’을 들어 지연시킨 세력이 송시열의 ‘노론’이다. 이들은 조선이 선비의 나라이며 왕의 나라가 아니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죽은 소현세자 비 강씨의 신원운동을 전개하기도 하고, ‘효종’은 장자가 아닌 ‘차자(서자)’라는 입장을 견지한다. 왕가의 법도도 사대부와 같아 비록 왕통은 둘째에 전해졌더라도 ‘차자(次子)’는 적자가 아니라는 주장.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예송논쟁(禮訟論爭)’이다. 이 과정에서 ‘노비추쇄도감’이라는 기관이 등장한다. 정통성을 위해 북벌에 집착한 효종은 민생이 우선이라는 송시열과 노론 등의 반대를 잠재우고자 노비를 이용해 10만 군대를 충원할 계획을 세운다. 임진왜란 이후 노비들이 도망을 쳐 한때 15만에 이르렀던 노비가 2만5000명 정도로 줄었다는 점에 착안한 것. 도망친 노비들을 잡아 군사로 징발하겠다는 취지에서였다. ‘추노’라는 드라마의 배경도 이것인 듯하다.
사림과 성리학의 중흥, 실학의 태동, 상업과 수공업의 발달, 대동법과 공납제도의 등장 등 조선조의 최고 격동기가 바로 이 시기다. 그럼에도 이 시기의 정사(正史)를 통사적으로 다루면서 일반 교양서로서도 재미있게 읽을 만한 책은 눈에 쉽게 띄지 않는다. 지나치게 학술적이거나, 허구적 소설에 불과한 역사왜곡의 드라마만 난무한다. 이 책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김영사 펴냄)는 이 지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조선왕조실록’과 방대한 개인문집을 바탕으로 역사를 씨줄과 날줄로 엮어 격동의 조선시대로 독자를 안내한다. 비단 ‘추노’ 드라마 때문만이 아니라 이 시기 우리 역사에 대한 지적 호기심을 충분히 풀어줄 수 있는 책이 바로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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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과 명의 전쟁이 막바지에 다다르던 시점에서, 청나라가 조선을 침공한 이유는 명나라와 ‘군신관계’를 맺고 있는 조선이 청의 배후를 위협할 가능성 때문이었다. 강화조약의 조건은 ‘신하의 나라’가 될 것을 약속하고 그 이행조건으로 왕자와 대신을 볼모로 잡아가겠다는 것. 비극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청’의 가능성을 간파한 소현세자는 볼모로 있는 동안 청나라 실력자들과 교유하고, 문물을 공부했으며, 실리 위주의 외교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뼈저리게 체험했다. ‘명’이 망하고 더 이상 조선이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청 태종은 소현세자를 조선으로 돌려보내겠다는 결정을 내린다. 청 태종은 소현세자에게 왕의 복색을 상징하는 ‘자의(紫衣)’를 내림으로써 신임을 확인한다. 노련한 외교술을 배운 볼모 신분의 조선 왕자가 신흥강국 청과 우호적인 협력관계를 맺는 데 성공한 것이다.
문제는 인조였다. 청 황제가 임금의 복식을 하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인조는 소현을 의심한다. 청 태종이 자신을 밀어내고 소현을 왕으로 삼으려 한다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것. 귀국 후 동궁에 유폐된 소현세자는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고 둘째 봉림이 세자가 된다. 장자가 사망하면 당연히 손자에게 왕위가 돌아가야 함에도 둘째 아들 봉림(효종)에게 왕위를 물려주려던 인조는 소현세자 비(妃) 강씨를 역적으로 몰아 사사하고, 소현의 세 아들을 제주도로 유배 보낸다. 제주도는 풍토병이 심해 약한 어린아이가 살아가기 힘든 곳. 그곳에서 소현의 큰아들과 둘째 아들이 풍토병으로 사망하고 셋째 아들만 살아남게 된다.
이 일이 바로 조선조 당쟁의 본격적인 시발점. 당시 집권세력인 서인(西人) 중에는 이것이 사실상 왕권계승의 정통성을 어긴 것이라는 시선이 있었다. 효종은 이에 정통성 강화를 위해 청나라에 대한 복수에 집착했다. 효종의 북벌주장에 형식적으로는 동조하면서도 ‘시기상조론’을 들어 지연시킨 세력이 송시열의 ‘노론’이다. 이들은 조선이 선비의 나라이며 왕의 나라가 아니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죽은 소현세자 비 강씨의 신원운동을 전개하기도 하고, ‘효종’은 장자가 아닌 ‘차자(서자)’라는 입장을 견지한다. 왕가의 법도도 사대부와 같아 비록 왕통은 둘째에 전해졌더라도 ‘차자(次子)’는 적자가 아니라는 주장.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예송논쟁(禮訟論爭)’이다. 이 과정에서 ‘노비추쇄도감’이라는 기관이 등장한다. 정통성을 위해 북벌에 집착한 효종은 민생이 우선이라는 송시열과 노론 등의 반대를 잠재우고자 노비를 이용해 10만 군대를 충원할 계획을 세운다. 임진왜란 이후 노비들이 도망을 쳐 한때 15만에 이르렀던 노비가 2만5000명 정도로 줄었다는 점에 착안한 것. 도망친 노비들을 잡아 군사로 징발하겠다는 취지에서였다. ‘추노’라는 드라마의 배경도 이것인 듯하다.
박경철<br>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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