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관론적 인식론에 따르면, 개가 지각하는 세상과 인간이 지각하는 세상, 꿀벌이 지각하는 주관적 세상은 모두 다르다고 한다. 예를 들어 달팽이에게 세상의 움직이는 모든 것은 어지러울 만큼 고속의 물체로 느껴진다. 결국 달팽이나 거북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느림의 세계가 아니라, 주변의 많은 것들이 광속으로 스쳐 지나가는 빠름의 세계를 견디며 살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가 축조한 냄새의 세상이야말로 한 후각 천재에 의해 새롭게 만들어진 경탄할 만한 가공의 세계라 할 수 있겠다. 대체 누가 다음과 같은 문장을 쓸 수 있을까.
“그곳에는 사람 냄새와 짐승 냄새, 음식 냄새와 질병 냄새, 물과 돌 냄새, 재와 가죽 냄새, 비누 냄새, 갓 구워낸 빵 냄새, 초에 넣고 끓인 계란 냄새, 국수 냄새, 반질반질 윤이 나게 닦은 놋그릇 냄새, 샐비어와 맥주와 눈물 냄새, 기름 냄새 그리고 마르거나 젖은 지푸라기 냄새 등이 뒤범벅되어 있었다.”
파트리크 쥐스킨트 원작소설 … 생생한 후각적 묘사
소설은 책 갈피마다 수억 개의 후각세포가 엉켜 있는 듯한 생생한 후각적 묘사로 뒤덮여 있다. 그것은 한 개인이 마련한 감각의 제국으로 가는 초대장이며, 어두컴컴한 파리의 뒷골목으로 스며 들어가는 냄새 여행이나 다름없다.
‘향수’를 영화화하겠다는 제안이 처음 나왔을 때부터 ‘원작이 갖는 천재적 후각 묘사를 영화가 따라갈 수 있겠냐’는 우려가 제기됐다. 원작자 쥐스킨트도 이 점을 알았는지 지난 15년간 ‘향수’의 영화화를 극력 반대해왔다. 그러나 진드기보다 더 질겼던 제작자 베른트 아이힝어(영화 ‘장미의 이름’을 만든 장본인)가 15년간 삼고초려한 끝에, ‘노(no)’라는 대답으로 일관하던 작가에게서 처음으로 ‘메이비(아마도)’라는 답변을 들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20년간 묵은 프로젝트가 드디어 독일의 떠오르는 감독 톰 티크베어에 의해 빛을 봤다.
보통 사람들은 ‘향기로운 냄새’만을 좇아 코를 벌름거리지만, 후각 천재인 영화 속 주인공 그루누이에게는 세상 모든 냄새가 소중하다. 마치 평생 기차 소리를 사랑했던 드뷔시가 지나가는 기차 엔진 소리만 듣고도 기차가 고장난 것을 알아맞혔듯이. 바로 그 안에 아름다움을 전복하는 역설이 들어 있을 것이다.
가장 추한 것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탄생하는 미학적 역설. 시장 한복판, 지독한 생선 냄새가 풀풀 풍기는 ‘냄새의 혼돈’ 속에서 태어난 그루누이는 세상 여자들의 가장 아름다운 냄새만을 모아 단 한 방울로도 세상 모든 사람을 복속시킬 수 있는 ‘불가능한 향수’를 창조하는 꿈을 꾼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살인도 서슴지 않는 주인공
영화를 보다 보면 제작자인 아이힝어나 감독인 티크베어의 속내를 짐작할 수 있다. 왜 제작자, 원작자, 감독까지 독일 사람인 이 영화에서 단 한마디의 독일어도 나오지 않겠는가. 이 영화는 단지 독일 내수시장을 겨냥한 것이 아니다. 벤 위쇼와 더스틴 호프먼 같은 영국과 미국 배우들을 총동원해, 할리우드 영화처럼 전 세계 시장을 겨냥하는 것이다. ‘향수’는 범유럽의 대동단결된 힘이 농축된 ‘할리우드 냄새 나는 유럽 영화’다. 따라서 이 영화의 진정한 핏줄 영화는 ‘장미의 이름’과 ‘제5원소’가 될 것이다. 그러니 티크베어가 어떤 연출 방식을 취했을지도 상상이 갈 것이다.
‘롤라 런’으로 갈고닦은 영화적 기교를 한껏 자랑했던 티크베어는 아주 화려한 세트와 (이에 반해) 아주 간단한 전략으로 주인공 그루누이의 후각적 예민함을 시각화한다. 바로 ‘코’를 클로즈업하고, 그가 맡는 냄새의 길을 따라 카메라가 훑고 지나가는 방식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600여 억원의 돈을 쏟아부었으나, 티크베어 감독의 후각 묘사는 줄거리에 길을 터주는 것 외에 쥐스킨트의 묘사력을 따라가지 못한다. 서사가 아닌 묘사의 힘으로, 쥐스킨트는 티크베어를 한판승으로 압도해버린다.
영화에서는 절대적으로 부족한 게 있다. 원작소설 ‘향수’에서는 단지 냄새로 훑어 내려가는 절대왕정 시대 유럽의 외면만이 볼거리가 아니다. 거기에는 ‘천재가 무엇으로 사는가’ 하는 문제의식이 함께 숨겨 있다. 꿈틀거리는 생명력으로 평생 냄새만을 뒤쫓아 질주하던 천재 주인공은 자신의 목표를 위해서라면 살인도 서슴지 않는 열정과 폭발하는 내면적 동기의 힘으로 뭉쳐 있다.
냄새 천재인 그루누이가 냄새가 없는 절대영점의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사실, 그가 착취당하고, 그를 이길 수 있다고 믿는 온갖 어리석은 자들에 둘러싸여 있는 모습을 통해 쥐스킨트는 자신의 고뇌를 반영한 하나의 천재상을 그려낸 듯하다(실제로 그의 각본 ‘로시니 혹은 누가 누구와 잤는가 하는 잔인한 문제’에 등장하는 대인기피증을 가진 작가는 쥐스킨트 자신을 모델로 한 것이다).
그루누이가 자신이 냄새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고 단 하나의 절대적 냄새를 갈구하며,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친다는 줄거리는 마치 예수나 부처처럼 거대한 메타포(은유)를 품고 있는 영웅신화의 구조와 흡사하다. 그러니까 원작 ‘향수’는 냄새에 의해 살아났다 냄새로 죽어가는 일그러진 영웅의 우화로도 볼 수 있다.
스릴러 임무에 충실 국적 불명의 냄새
그러나 영화 ‘향수’ 속에 냄새라는 본능적 감각의 묘사는 진부하고, 영화는 가면 갈수록 스릴러 본연의 임무를 더 충실히 수행하는 쪽을 택한다. 그래서 영화 ‘향수’에는 향기만 나는 것이 아니다. 온갖 상업적 고려가 뒤섞인 영화는 국적 불명의 냄새를 풍기면서 재미있는 ‘냄새 블록버스터’의 한계에 스스로를 안착시키는 데 만족한다.
그러한 면에서 ‘향수’는 오늘날 유럽이 품고 있는 할리우드에 대한 경쟁심이나 문학에 대항하는 영화의 열등감을 느끼게 하는 데 그친다. 뿐만 아니라 유럽식의 세련되고 간명한 위트와 촌철살인의 재능을 보여주는 데는 실패한다. 역시 누가 누구를 베꼈느냐 하는 잔인한 문제, 그것이 문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가 축조한 냄새의 세상이야말로 한 후각 천재에 의해 새롭게 만들어진 경탄할 만한 가공의 세계라 할 수 있겠다. 대체 누가 다음과 같은 문장을 쓸 수 있을까.
“그곳에는 사람 냄새와 짐승 냄새, 음식 냄새와 질병 냄새, 물과 돌 냄새, 재와 가죽 냄새, 비누 냄새, 갓 구워낸 빵 냄새, 초에 넣고 끓인 계란 냄새, 국수 냄새, 반질반질 윤이 나게 닦은 놋그릇 냄새, 샐비어와 맥주와 눈물 냄새, 기름 냄새 그리고 마르거나 젖은 지푸라기 냄새 등이 뒤범벅되어 있었다.”
파트리크 쥐스킨트 원작소설 … 생생한 후각적 묘사
소설은 책 갈피마다 수억 개의 후각세포가 엉켜 있는 듯한 생생한 후각적 묘사로 뒤덮여 있다. 그것은 한 개인이 마련한 감각의 제국으로 가는 초대장이며, 어두컴컴한 파리의 뒷골목으로 스며 들어가는 냄새 여행이나 다름없다.
‘향수’를 영화화하겠다는 제안이 처음 나왔을 때부터 ‘원작이 갖는 천재적 후각 묘사를 영화가 따라갈 수 있겠냐’는 우려가 제기됐다. 원작자 쥐스킨트도 이 점을 알았는지 지난 15년간 ‘향수’의 영화화를 극력 반대해왔다. 그러나 진드기보다 더 질겼던 제작자 베른트 아이힝어(영화 ‘장미의 이름’을 만든 장본인)가 15년간 삼고초려한 끝에, ‘노(no)’라는 대답으로 일관하던 작가에게서 처음으로 ‘메이비(아마도)’라는 답변을 들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20년간 묵은 프로젝트가 드디어 독일의 떠오르는 감독 톰 티크베어에 의해 빛을 봤다.
보통 사람들은 ‘향기로운 냄새’만을 좇아 코를 벌름거리지만, 후각 천재인 영화 속 주인공 그루누이에게는 세상 모든 냄새가 소중하다. 마치 평생 기차 소리를 사랑했던 드뷔시가 지나가는 기차 엔진 소리만 듣고도 기차가 고장난 것을 알아맞혔듯이. 바로 그 안에 아름다움을 전복하는 역설이 들어 있을 것이다.
가장 추한 것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탄생하는 미학적 역설. 시장 한복판, 지독한 생선 냄새가 풀풀 풍기는 ‘냄새의 혼돈’ 속에서 태어난 그루누이는 세상 여자들의 가장 아름다운 냄새만을 모아 단 한 방울로도 세상 모든 사람을 복속시킬 수 있는 ‘불가능한 향수’를 창조하는 꿈을 꾼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살인도 서슴지 않는 주인공
영화를 보다 보면 제작자인 아이힝어나 감독인 티크베어의 속내를 짐작할 수 있다. 왜 제작자, 원작자, 감독까지 독일 사람인 이 영화에서 단 한마디의 독일어도 나오지 않겠는가. 이 영화는 단지 독일 내수시장을 겨냥한 것이 아니다. 벤 위쇼와 더스틴 호프먼 같은 영국과 미국 배우들을 총동원해, 할리우드 영화처럼 전 세계 시장을 겨냥하는 것이다. ‘향수’는 범유럽의 대동단결된 힘이 농축된 ‘할리우드 냄새 나는 유럽 영화’다. 따라서 이 영화의 진정한 핏줄 영화는 ‘장미의 이름’과 ‘제5원소’가 될 것이다. 그러니 티크베어가 어떤 연출 방식을 취했을지도 상상이 갈 것이다.
‘롤라 런’으로 갈고닦은 영화적 기교를 한껏 자랑했던 티크베어는 아주 화려한 세트와 (이에 반해) 아주 간단한 전략으로 주인공 그루누이의 후각적 예민함을 시각화한다. 바로 ‘코’를 클로즈업하고, 그가 맡는 냄새의 길을 따라 카메라가 훑고 지나가는 방식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600여 억원의 돈을 쏟아부었으나, 티크베어 감독의 후각 묘사는 줄거리에 길을 터주는 것 외에 쥐스킨트의 묘사력을 따라가지 못한다. 서사가 아닌 묘사의 힘으로, 쥐스킨트는 티크베어를 한판승으로 압도해버린다.
영화에서는 절대적으로 부족한 게 있다. 원작소설 ‘향수’에서는 단지 냄새로 훑어 내려가는 절대왕정 시대 유럽의 외면만이 볼거리가 아니다. 거기에는 ‘천재가 무엇으로 사는가’ 하는 문제의식이 함께 숨겨 있다. 꿈틀거리는 생명력으로 평생 냄새만을 뒤쫓아 질주하던 천재 주인공은 자신의 목표를 위해서라면 살인도 서슴지 않는 열정과 폭발하는 내면적 동기의 힘으로 뭉쳐 있다.
냄새 천재인 그루누이가 냄새가 없는 절대영점의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사실, 그가 착취당하고, 그를 이길 수 있다고 믿는 온갖 어리석은 자들에 둘러싸여 있는 모습을 통해 쥐스킨트는 자신의 고뇌를 반영한 하나의 천재상을 그려낸 듯하다(실제로 그의 각본 ‘로시니 혹은 누가 누구와 잤는가 하는 잔인한 문제’에 등장하는 대인기피증을 가진 작가는 쥐스킨트 자신을 모델로 한 것이다).
그루누이가 자신이 냄새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고 단 하나의 절대적 냄새를 갈구하며,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친다는 줄거리는 마치 예수나 부처처럼 거대한 메타포(은유)를 품고 있는 영웅신화의 구조와 흡사하다. 그러니까 원작 ‘향수’는 냄새에 의해 살아났다 냄새로 죽어가는 일그러진 영웅의 우화로도 볼 수 있다.
‘향수’
그러나 영화 ‘향수’ 속에 냄새라는 본능적 감각의 묘사는 진부하고, 영화는 가면 갈수록 스릴러 본연의 임무를 더 충실히 수행하는 쪽을 택한다. 그래서 영화 ‘향수’에는 향기만 나는 것이 아니다. 온갖 상업적 고려가 뒤섞인 영화는 국적 불명의 냄새를 풍기면서 재미있는 ‘냄새 블록버스터’의 한계에 스스로를 안착시키는 데 만족한다.
그러한 면에서 ‘향수’는 오늘날 유럽이 품고 있는 할리우드에 대한 경쟁심이나 문학에 대항하는 영화의 열등감을 느끼게 하는 데 그친다. 뿐만 아니라 유럽식의 세련되고 간명한 위트와 촌철살인의 재능을 보여주는 데는 실패한다. 역시 누가 누구를 베꼈느냐 하는 잔인한 문제, 그것이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