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별왕 대별왕이 두 개의 해, 두 개의 달을 하나씩 정리하고 이승과 저승을 가르고 있다.
이쯤 되자 소별왕이 드디어 승패를 가릴 수 있는 결정적인 내기 한 판을 제안한다.
이승 주인 걸고 꽃 피우기 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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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별왕의 이승 차지 대결을 놓고 ‘수수께끼’에서 ‘꽃 피우기’로 다툼이 번졌다. 그런데 왜 하필 꽃 피우기 내기였을까? 꽃은 씨앗을 맺으려는 식물이 자신을 나타내는 최고의 표현이다. 벌이나 나비를 유혹하는 향기와 다채로운 색깔과 각각의 다른 모양새, 그리고 곧 지고 말 터이지만 아름다움까지 갖추고 있는 ‘살아 있는 존재 그 자체’다. 또한 그것은 ‘사랑’의 메신저로서 수많은 연인들을 울리기도 하고 웃기기도 한다.
꽃은 민족이나 종교에 따라 여러 가지 상징으로 쓰인다. 우리 신화에서는 꽃이 어떤 상징으로 등장할까? 먼저 같은 탐라신화의 ‘할락궁이’ 이야기에 나오는 서천꽃밭으로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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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맹이와의 싸움에서 패한 천지왕이 무쇠 철갑을 들고 도망치려 하는 모습.
소별왕과 대별왕이 피우고자 하는 ‘꽃’이 상징하는 바는 바로 ‘생명’이리라. 강릉의 ‘당고마기 노래’는 소별왕과 대별왕의 꽃 피우기 내기를 불교의 석가와 미륵의 내기로 윤색한 것처럼 보이는데, 이야기 속의 꽃은 모란꽃에서 ‘은둔 발환화’로 변했으나 그 꽃의 능력이나 상징은 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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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별왕 잠든 틈 소별왕 꽃 꺾어
우리 신화에 나오는 꽃 피우기야말로 생명활동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두 별왕은 이승을 차지하기 위해 수수께끼로 생명의 속성에 대한 지혜 다툼을 벌이더니 꽃 피우기에서는 생명을 죽이고 살리는 능력 자체를 놓고 대결을 벌인 것이다. 꽃 피우기 내기는 모든 삼라만상의 생명을 관장할 자를 판별하려는 한 판 내기였던 것이다.
아니, 그런데 그 모란꽃이 대별왕 무릎 위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이 아닌가! 모란꽃이 가지가지 활짝 피어 봉오리를 맺는 게 아닌가!
자, 여기서 소별왕이 ‘이승을 차지하려고 벌이는 궁량’은 무엇일까, 어떤 색깔일까 하는 점이 이야기의 초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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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소별왕의 ‘궁량’이라는 것이 다름 아닌 ‘속임수’가 아닌가? ‘귀신과 생인이 합도하여 귀신을 부르면 생인이 대답하고, 생인을 부르면 귀신이 대답하는’ 천지개벽 시대의 대혼돈을 극복하기 위한 ‘궁량’이 한낱 속임수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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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대별왕과 소별왕 형제가 갈라서고, 대별왕은 저승을 차지하고 소별왕은 이승을 차지하여 다스린다.
자, 그렇다면 이승을 차지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소별왕과 대별왕이 이승을 차지하기 위해 다투는 진정한 뜻은 ‘인간 백성 낮에는 볕발에 잦아 죽고 밤엔 얼어 고사 죽고, 가지나무에 목매어 죽고 접시물에 빠져 죽는’ 인간들을 구하고, 또 귀신과 생인을 가르고 세상을 이승과 저승으로 나누어 천지개벽 시대의 ‘대혼돈’에 어떻게 마침표를 찍느냐는 데 있다.
‘귀신과 생인이 합방하여 귀신을 부르면 생인이 대답하고, 생인을 부르면 귀신이 대답한다’고 하는 것은 사람이 살기 어려운 세상, 사람과 귀신이 구별되지 않는 세상, 따라서 사람이 죽지도 못하고 귀신처럼 오래 사는 세상, 더 나아가서 나무와 돌과 모든 푸성귀가 말을 하고 모든 짐승이 말을 하여 사람과 다르지 않은 세상을 표현한 것이다. 사람이 죽지도 못한다는 것은 제대로 살지도 못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소별왕이 인간 세상에 내려와서 보고는 ‘인간 도업이 아니로다’ 한탄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탐라의 심방 고창학은 초감제에서, 두 별왕이 천지왕과 총명왕 총명부인의 아들이라고 하지 않고 ‘어디에서인가’ 솟아났다고 노래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귀신과 생인을 구별하여 이승과 저승으로 나눠서 보내고 경계를 지어야 비로소 인간세상이 열린다. 지금의 인간 세상이라는 것은 ‘아직’ 없다. 대혼돈 속에 내재해 있을 뿐이다. 이승과 저승도 마찬가지다. 이미 존재하는 이승과 저승을 차지하기 위해 다투는 것이 아니다. 이승과 저승도 없던 시절에 새로운 법을 만들어서 다스리고자 ‘솟아난’ 별왕 둘이서 누가 어떻게 만들어 다스릴 것인지를 놓고 경쟁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특별한 대왕, 별대왕인 것이다.
그러므로 두 별왕의 경쟁은 인간세상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나 다툼이 아니다. 인간세상을 차지한다는 것은 이승법과 저승법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질서’의 결과일 따름이다.
이 점을 혼동하면 우리 신화의 참된 뜻을 왜곡하게 된다. 세월이 흐르면서 원본이 사라지고 이본이 많이 생겼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이야기를 전하는 이본들을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소별왕의 속임수는 인간세상을 구하기 위한 ‘큰 속임수’로 해석할 수도 있고, 아니면 치졸하기 짝이 없는 그야말로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고 볼 수도 있다.
하여튼 필자는 여기에서 ‘인간세상을 다시 만들다’라고 표현했다.
그것은 하늘로부터 금벌레 은벌레를 내려받아 인간을 창조한 창세의 여신 마고 시대가 지나가고, 천지개벽 시대의 새로운 인간 세상이 등장했다는 이야기다. 새로운 인간들은 흙으로 만들어졌다고 할 수도 있고, 대홍수에 살아남은 인간의 후손들이라고 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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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고는 하늘로부터 금벌레 은벌레를 내려받아 인간을 만들었지만, 소별왕은 인간세상을 새로 만들었다고 해야 한다. 그러므로 필자는 소별왕 읽기의 초점이 ‘인세(人世) 차지’가 아니라 ‘인세 창조’라는 데 있다고 감히 생각해본다.
소별왕의 인간세상 창조가 인간 창조와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몽골의 부리야트족 신화를 보면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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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세상을 만드는 능력, 창조하는 능력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나누고 이승과 저승을 갈라 새롭게 세상을 창조하는 능력일 것이다. 물론 그 핵심은 ‘꽃 피우기’가 상징하는 ‘삶’의 능력이다.
생명을 기르는 능력, 삼라만상의 생명을 관장할 수 있는 능력을 상징하는 ‘꽃 피우기’의 능력은 원래 대별왕이 갖고 있던 것이다. 소별왕이 속임수를 써서 그 능력을 훔쳐서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이제 우리는 왜 도적이 들끓는 세상에 사는지, 왜 불평등과 차별과 싸우며 살아야 하는지 안다. 우리는 ‘현실’이라는 잣대의 혼탁한 이승법이 다스리는 세상의 기원 신화에 위안을 받기도 한다. 그래! 우리는 ‘원칙’이라는 잣대의 맑고 청랑한 법이 다스리는 저승을 향해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렷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