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사암을 구릉에 두고 새인봉을 맞쳐다보는 고갯길에 700년 수령을 자랑하는 노거수 한 그루가 정정하다. 예부터 운림동 마루턱에서 마을 지킴이로 서 있으니 당산나무다. 접신(接神)을 해도 일곱 번은 더 했을 나이. 이 노거수가 없었다면 무등산 산행이 얼마나 팍팍했으랴. 이 고갯길에 700년 그늘을 친 당산나무가 있음은 광주인에겐 큰 행운이요, 영원한 휴식처다.
“어따마시, 우리 그늘 속에서 보리밥 한술 어떤가?” 이는 배고프던 시절의 식담이 아니라 빈부 격차가 크긴 해도 무엇을 먹을 줄 몰라 고민하는 이 시대 사람들의 대화다. 광주인이면 휴일을 맞아 무등산을 오르자는 약속이 아니던가. 이 대화 속의 그늘이 바로 ‘당산나무 보리밥집’을 뜻하기 때문이다. 충장로의 우다방(우체국)쯤 될까.
보리밥집이 잘되다 보니, 또 그 위켠에 등을 맞댄 ‘새끼보리밥집’(대호정) 또는 ‘작은보리밥집’도 있다. 이는 등반객들이 예우로 붙여준 이름이다. 그러니 ‘큰보리밥집’(박승운ㆍ41ㆍ062-227-1859) ‘작은보리밥집’(062-227-7833) 중 ‘큰집’에서 만나자거나 ‘작은집’에서 만나자거나 한다. 큰집은 당산나무 그늘을 깔고 있는 ‘송풍정’(松風亭)을 이른다. 송풍정의 보리쌈밥은 1인분에 5000원이다.
그늘 두텁기야 당산나무 그늘만한 두터운 그늘이 따로 없을 터. 원래 당산나무는 이파리가 세밀하고 촘촘하며 오밀조밀해서, 바람결을 부드럽게 여과시키면서 햇빛을 막아주기에 선조들은 대대로 이 나무를 마을 앞에 심어 왔으리라. 그리고 당산을 지키는 접신나무로 받들어 왔으며, 천년 세월을 조감하게 했으리라. 궁동 예술의 거리나 개미장터에 나가보면 참귀목의 쌀궤나 보석함, 서상대, 장롱 같은 목물들이 수백만원 호가하는 것을 본다. 이 나무들이 좀도 슬지 않고 목질도 단단하기 때문이다. 또 이것이 바로 참귀목인 당산나무 또는 미루나무, 느티나무로 불리는 까닭이다. 천년이 가고 또 천년 세월이 와도 당산나무를 다시 심고 가꿀 줄 알았던 사람들, 그 사람들의 끈이 아니었다면 도시가 산이고 산이 도시 자체인 무등산은 오늘처럼 우뚝 서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늘’과 ‘끈’-이것이야말로 가장 남도다운 생생력의 문화에 깊이 뿌리박은 사람들의 근성이고 성품이며 체질에서 흘러나온 이야기인 것이다. ‘그늘’이 있는 사람들의 손과 머리, 발에서 ‘그늘 있는 문화’가 창출됨은 당연하다. 그래서 ‘그늘 있는 음식’이 나오고, ‘그늘 있는 소리’ ‘그늘 있는 보리밥 방귀’의 빛깔과 울음이 새나오는 것이다.
어디 나무뿐이랴. 한지(韓紙)를 뜨는 통꾼들에 의해 한지에서 가냘픈 난초꽃이 피고, 이 순간에도 이 그늘을 지펴 사라져가는 황금빛 숭어알에 참기름칠을 해서 ‘어란’을 만드는 것이다. 참으로 그늘 속에서 끈을 잡고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넉넉한 풍토와 남도 자연의 문빈(文彬)을 읽고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다. 그 길이 아무리 서럽고 고되더라도 얼마간의 여유와 공간을 터두면서 멋과 맛을 향유할 줄 알았고, 저 느티 잎새들의 촘촘한 그물코에 걸려 퍼덕거리는 영원의 하늘을 손짓해 불러올 줄도 알았다.
‘반보기’(中路)의 지혜도 이 나무 그늘에서 생겨났다. 남도에는 이런 고갯길에 수도 없이 보리밥집이 널려 있다. 금곡리나 동복으로 넘어가는 무등산의 잣고개나 배고개, 약사암에서 중심사로 넘어가는 중거릿재의 ‘당산나무보리밥집’도 마찬가지다. 조계산 선암사에서 송광사로 넘어가는 장군봉 밑의 보리밥집도 인상에 남는데 이 둘을 일러 유명세 타는 보리밥집이라고도 한다. 그러한 쉼터에서 ‘반보기’로 만나 ‘보리밥쌈’을 들고 선풍을 타는 방귀 한번 뀌면 우중충한 겨울하늘 속에서도 땀을 닦는 청잣빛 매운 하늘이 얼비쳐 보이기도 하리라.
“어따마시, 우리 그늘 속에서 보리밥 한술 어떤가?” 이는 배고프던 시절의 식담이 아니라 빈부 격차가 크긴 해도 무엇을 먹을 줄 몰라 고민하는 이 시대 사람들의 대화다. 광주인이면 휴일을 맞아 무등산을 오르자는 약속이 아니던가. 이 대화 속의 그늘이 바로 ‘당산나무 보리밥집’을 뜻하기 때문이다. 충장로의 우다방(우체국)쯤 될까.
보리밥집이 잘되다 보니, 또 그 위켠에 등을 맞댄 ‘새끼보리밥집’(대호정) 또는 ‘작은보리밥집’도 있다. 이는 등반객들이 예우로 붙여준 이름이다. 그러니 ‘큰보리밥집’(박승운ㆍ41ㆍ062-227-1859) ‘작은보리밥집’(062-227-7833) 중 ‘큰집’에서 만나자거나 ‘작은집’에서 만나자거나 한다. 큰집은 당산나무 그늘을 깔고 있는 ‘송풍정’(松風亭)을 이른다. 송풍정의 보리쌈밥은 1인분에 5000원이다.
그늘 두텁기야 당산나무 그늘만한 두터운 그늘이 따로 없을 터. 원래 당산나무는 이파리가 세밀하고 촘촘하며 오밀조밀해서, 바람결을 부드럽게 여과시키면서 햇빛을 막아주기에 선조들은 대대로 이 나무를 마을 앞에 심어 왔으리라. 그리고 당산을 지키는 접신나무로 받들어 왔으며, 천년 세월을 조감하게 했으리라. 궁동 예술의 거리나 개미장터에 나가보면 참귀목의 쌀궤나 보석함, 서상대, 장롱 같은 목물들이 수백만원 호가하는 것을 본다. 이 나무들이 좀도 슬지 않고 목질도 단단하기 때문이다. 또 이것이 바로 참귀목인 당산나무 또는 미루나무, 느티나무로 불리는 까닭이다. 천년이 가고 또 천년 세월이 와도 당산나무를 다시 심고 가꿀 줄 알았던 사람들, 그 사람들의 끈이 아니었다면 도시가 산이고 산이 도시 자체인 무등산은 오늘처럼 우뚝 서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늘’과 ‘끈’-이것이야말로 가장 남도다운 생생력의 문화에 깊이 뿌리박은 사람들의 근성이고 성품이며 체질에서 흘러나온 이야기인 것이다. ‘그늘’이 있는 사람들의 손과 머리, 발에서 ‘그늘 있는 문화’가 창출됨은 당연하다. 그래서 ‘그늘 있는 음식’이 나오고, ‘그늘 있는 소리’ ‘그늘 있는 보리밥 방귀’의 빛깔과 울음이 새나오는 것이다.
어디 나무뿐이랴. 한지(韓紙)를 뜨는 통꾼들에 의해 한지에서 가냘픈 난초꽃이 피고, 이 순간에도 이 그늘을 지펴 사라져가는 황금빛 숭어알에 참기름칠을 해서 ‘어란’을 만드는 것이다. 참으로 그늘 속에서 끈을 잡고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넉넉한 풍토와 남도 자연의 문빈(文彬)을 읽고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다. 그 길이 아무리 서럽고 고되더라도 얼마간의 여유와 공간을 터두면서 멋과 맛을 향유할 줄 알았고, 저 느티 잎새들의 촘촘한 그물코에 걸려 퍼덕거리는 영원의 하늘을 손짓해 불러올 줄도 알았다.
‘반보기’(中路)의 지혜도 이 나무 그늘에서 생겨났다. 남도에는 이런 고갯길에 수도 없이 보리밥집이 널려 있다. 금곡리나 동복으로 넘어가는 무등산의 잣고개나 배고개, 약사암에서 중심사로 넘어가는 중거릿재의 ‘당산나무보리밥집’도 마찬가지다. 조계산 선암사에서 송광사로 넘어가는 장군봉 밑의 보리밥집도 인상에 남는데 이 둘을 일러 유명세 타는 보리밥집이라고도 한다. 그러한 쉼터에서 ‘반보기’로 만나 ‘보리밥쌈’을 들고 선풍을 타는 방귀 한번 뀌면 우중충한 겨울하늘 속에서도 땀을 닦는 청잣빛 매운 하늘이 얼비쳐 보이기도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