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전 노 전 대통령은 약 4600억 원에 달하는 비자금을 조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검 중앙수사부(현 반부패부)가 ‘6공 비자금’ 수사 결과를 바탕으로 1995년 12월 공표한 액수다. 이 중 2682억 원은 추징했으나 나머지 금액은 출처가 확인되지 않아 환수하지 못했다. 그런데 강 국세청장의 인사청문회에서 노 전 대통령 비자금 일부가 회수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이 처음 제기된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의 배우자 김옥숙 여사는 딸인 노 관장과 최 회장의 이혼 과정에서 1990년대 초 선경(현 SK) 측에 300억 원이 전달됐다고 주장했다. 노 관장 측은 법정에서 50억 원짜리 약속어음 6매와 관련 내용이 기재된 ‘김옥숙 메모’를 제시했다.
노태우 비자금을 추징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현재로서는 없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가족에게 승계된 부분들에 대해서는 상속·증여세법을 통해 징수가 가능하다는 게 전문가들 시각이다. 국세기본법(제26조의2 제5항)에 따르면 과세관청은 납세자가 부정행위로 상속·증여세를 포탈한 경우 해당 재산의 상속 또는 증여가 있음을 안 날로부터 1년 이내에 세금을 부과할 수 있다.
이런 가운데 7월 22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에서 열린 국세청 업무보고에서 ‘6공 비자금’과 관련한 ‘김옥숙 메모’가 공개됐다. 국세청 차장과 서울지방국세청장을 지낸 더불어민주당 임광현 의원이 공개한 이 메모에는 1998년 4월 1일과 1992년 2월 12일 김옥숙 여사가 자필로 작성한 ‘맡긴 돈’ 리스트가 등장한다. 여기에는 ‘노재우(노 전 대통령 동생) 251억’ ‘선경 300억’ 등 실명과 액수가 기재돼 있다.
임광현 의원 “세무조사로 盧 비자금 환수해야”
최태원 SK그룹 회장(왼쪽)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 [뉴스1]
1991년쯤 노 전 대통령이 최종현 SK 선대회장에게 300억 원을 증여했다면 시효 때문에 과세가 어렵고, 국세기본법 제26조의2 제5항은 이후에 만들어져 적용이 안 된다는 해석도 있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이 300억 원을 차명으로 맡겼거나 받아야 하는 채권이었다면 상속재산이라서 과세 대상이 된다.
노 전 대통령 일가의 은닉재산이 실재할 경우 과세 가능성에 대해서는 전문가들 의견이 갈린다. 증여냐 상속이냐에 따라 과세 가능성이 달라지기 때문인데, 어떤 경우든 사실관계 파악이 우선이라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다.
우선 SK에 실제로 문제의 300억 원이 흘러갔는지부터 확인해야 한다. 이혼소송 재판 과정에서는 비자금 전달 시점과 전달자, 전달 방식 등 구체적인 내용이 특정되지 않았다. 300억 원을 현금으로 전달하려면 사과박스 기준으로 트럭 2대가 필요한 양이다.
이외에도 ‘김옥숙 메모’에 나온 디테일한 내용들도 검증이 이뤄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선경 외에도 ‘이병기 52억’ ‘정해창 30억’ 등 노태우 정부 시절 주요 인사들이 언급됐고, ‘별채 5억 원’ ‘금고 10억1000만 원’ 등 적힌 내용이 모두 구체적이라는 점이 눈길을 끈다.
은닉 재산이 존재할 경우 비자금을 숨기는 세탁 행위나 ‘현금화’를 위한 행위가 있으면 범죄수익은닉 규제법에 따라 처벌과 몰수도 가능하다. 2001년 시행된 범죄수익은닉 규제법 부칙에는 법 시행 전 발생한 범죄수익도 법 시행 후 새로운 은닉이나 처분을 위한 가장행위가 있으면 적용할 수 있다고 규정돼 있다. 2013년 노 관장 측이 약속어음 300억 원 중 100억 원을 SK에 요구했는데 이를 ‘현금화’를 위한 행위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은닉 재산 현금화 경우 처벌과 몰수 가능
향후 국세청이 ‘300억 원 비자금’을 조사할 경우 판단은 크게 △노태우→최종현 증여 △노태우→가족 상속 △유입 자체가 없었거나 확인 불가능 중 하나로 귀결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먼저 국세청이 노 전 대통령이 최종현 선대회장에게 300억 원을 증여한 것으로 판단하는 경우에는 증여세 과세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국세기본법에 따라 증여세 부과 시효는 10년이다. 항소심 재판부는 노 전 대통령이 최 선대회장에게 300억 원을 전달한 시기를 1991년쯤으로 봤다. 노 관장 측 입장에선 ‘300억 원 비자금’이 노태우→최종현 증여로 인정받는 게 최상의 시나리오다. 이 경우 항소심 판결과 국세청 조사 결과가 합치될 뿐 아니라, 세금 부담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증여로 인정될 경우 채권-채무 관계가 성립하지 않기에 노 관장 측의 ‘약속어음’ 주장과는 상충하게 된다.
‘300억 원 비자금’을 가족이 노 전 대통령으로부터 상속받은 재산으로 보는 경우도 가능하다. 노 관장 측은 이혼소송 과정에서 ‘300억 원 비자금’을 SK로부터 ‘받을 돈’이라고 주장했다. 그 주장대로 노 전 대통령이 SK에 300억 원을 무상 증여한 게 아니라 빌려준 것이라면, 이를 돌려받을 권리가 일종의 채권 형태로 가족에게 상속됐다고 볼 수 있다. 국회에서 임 의원이 지적한 과세 필요성도 바로 여기에 착목한 것이다. 현행 상속세율은 과세표준이 30억 원을 초과할 경우 50%에 달한다. 최근 정부가 발표한 세법 개정안에 따른 상속세 최고세율은 40%다. 상속세 부과는 상속 발생 시점의 자산가치를 기준으로 한다. 노 관장이 최대 수천억 원에 달하는 세금을 납부하게 될 가능성이 제기되는 이유다.
만약 국세청이 ‘300억 원 비자금’이 전달된 사실을 인정하지 않거나, 확인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는 경우에는 이혼소송 항소심 판결이 전제부터 흔들릴 수 있어 상당한 파장이 예상된다.
한편 최태원 회장의 법률대리인은 8월 5일 대법원에 상고이유서를 제출했다. 500쪽 분량의 상고이유서는 노 전 대통령 비자금 문제를 주요 쟁점으로 다룬 것으로 알려졌다. 상고이유서에는 항소심 판결 이후 쟁점이 됐던 김옥숙 여사의 300억 원 메모의 진위 여부, SK가 6공 특혜로 성장했다는 논란, 재산분할액 산정 시 오류, 친족 증여분에 대한 보유 추정 법리 등이 포함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우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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