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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덜 먹고 덜 입고, 보장성 지출 늘리고

글로벌 금융위기가 소비행태 바꿔…문화·레저 등에 지출 삶의 질 향상 추구

  • 유정완 KB경영연구소 책임연구원 jungwan.you@kbfg.com

덜 먹고 덜 입고, 보장성 지출 늘리고

덜 먹고 덜 입고, 보장성 지출 늘리고

10월 20일 강원 속초시 설악산을 찾은 등산객들이 붉게 물든 단풍 사이로 걷고 있다.

2008년 9월 15일 리먼브러더스가 파산하면서 시작된 글로벌 금융위기는 전 세계에 유례없는 충격과 공포를 안겨줬다. 5년여 시간이 지난 지금도 곳곳에 남은 여진 속에서 우려와 기대가 교차하는 상황이다.

위기 이후 눈에 띄는 변화 가운데 하나는 글로벌 유동성의 증가다. 각국 정부가 경기 부양을 위해 유동성을 공급하면서 금융위기 이후 글로벌 유동성은 통상 2~3배가량 증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따져볼 문제는 이렇게 공급된 유동성이 경제 주체의 두 축인 기업과 가계로 과연 얼마나 흘러들어 투자와 고용을 촉진했느냐는 것. 소비 증대를 통해 경기 회복을 이끌어내고자 했던 각국 정부의 정책적 선택이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에 대한 물음이다. 각국의 실물경기 지표가 아직 뚜렷한 개선 기미를 보이지 않는 것이 현실인 점을 감안하면, 효과를 기대하기엔 좀 더 시간이 필요한 상황인 듯하다.

그렇다면 한국의 경우, 특히 내수 상황은 어떨까. 글로벌 금융위기와 이를 극복하기 위한 정부의 정책운용은 한국 소비자들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왔을까. 내수경기를 가늠하는 데 사용 가능한 지표는 다양하지만, 그중 가장 피부에 와닿는 지표로 가계의 소비지출 변화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가계의 소비지출이 증가한다는 것은 내수가 회복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특히 내구재 소비의 증가는 제조업을 비롯한 산업 전반에 활기가 돌면서 경제의 기초체력이 건실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이기도 하다.

‘더 나쁜 상황’에 대비하는 심리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실질기준으로 국내 가계의 월평균 지출은 2003년 265만 원에서 2012년 302만 원으로 37만 원가량 증가했다. 반면 같은 기간 소득은 58만 원 증가했다. 금액만 놓고 보면 지출도 소득 못지않게 증가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연평균 증가율로 환산하면 얘기가 좀 달라진다. 지난 10년 동안 가계소득은 매년 1.9% 증가한 반면, 지출은 1.5% 증가하는 데 그친 것이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도 한층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다. 2003년부터 2007년까지 5년 동안 가계의 소비지출은 연평균 1.5% 증가한 반면, 2008년부터 2012년까지 5년 동안은 1.0% 증가에 그쳤다. 위기 이후 가계의 소비지출이 억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지출 억제의 주된 원인은 실질 가계소득 증가율의 둔화에 있다.

한 예로 2007년까지 연평균 2.2% 증가하던 가계소득은 금융위기 이후 1.3% 증가로 둔화됐다. 하지만 좀 더 세밀히 살펴보면 위기와 변화를 반복해 겪으면서 한국 소비자의 지출 심리나 패턴 자체가 근본적으로 변화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는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지난 10년 동안 가계의 소비지출은 연평균 1.1% 증가한 반면, 비(非)소비지출은 2.9% 증가했다. 비소비지출 증가율이 같은 기간 소득 증가율을 상회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다시 말해 경기 부진이 지속되면서 가계의 생활비 지출은 억제됐지만, 보험이나 연금 등 불확실한 미래를 대비하는 보장성 지출은 증가했다는 뜻이다. 상황이 나쁠수록 허리띠를 졸라매며 ‘더 나쁜 상황’에 대비하는 심리가 커졌다는 의미다.

가계의 소비지출 안에서도 항목별로 일정한 트렌드 변화가 감지된다. 먼저 내구재 소비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정체되는 양상을 보였다. 외환위기와 카드 사태의 충격이 어느 정도 진정된 2004년 이후 자동차, 가전, 가구 등 한국 가계의 내구재 소비지출은 2007년까지 가파른 증가세를 보였다. 하지만 글로벌 금융위기가 덮친 2008년 내구재 소비지출은 큰 폭으로 감소했고, 이후 증가세는 크게 둔화돼 아직까지도 회복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그래프1’ 참조).

덜 먹고 덜 입고, 보장성 지출 늘리고
좀 더 흥미로운 대목도 있다. 2003년 이후 통계청 가계수지 동향(전국 2인 이상 가구, 실질금액 기준)을 살펴보면, 국내 소비자는 금융위기 이후 의식주나 교통 같은 전통적인 소비항목 지출은 억제한 반면, 문화와 생활수준 향상에 따라 오락, 스포츠, 레저, 여가, 영화관람, 문화공연 관련 소비는 꾸준히 늘려온 것으로 나타났다. 일단 스마트폰 보급이 확대되면서 통신비 지출이 금융위기 이전보다 가파른 증가세를 기록했고 영상, 음향, 사진, 정보처리 관련 기기에 대한 지출도 큰 폭으로 증가한 반면, 서적이나 인쇄물, 문구, 복권 관련 지출은 감소했다. 한마디로 문화생활과 취미생활의 트렌드 자체가 정보기술(IT)이나 전자기기를 활용하는 방향으로 크게 변화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그래프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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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인 가구가 증가함에 따라 식생활이나 펫(Pet) 비즈니스 관련 지출이 증가한다는 점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가정에서 조리해야 하는 육류, 신선식품, 곡물, 과일, 채소 등 ‘가정식 재료 및 음식’ 소비액은 2003년 가구당 월평균 20만7000원에서 지난해 16만9000원으로 감소했다. 반면 빵, 떡, 곡물 및 육류 가공품 등 조리하지 않고 바로 먹을 수 있는 ‘가공식품 및 주류’ 소비액은 같은 기간 8만2000원에서 9만1000원으로 증가했다. 외식 및 배달음식 소비액은 금융위기와 상관없이 일정 수준의 지출 규모를 유지하고 있다. 동물병원 등 펫 비즈니스와 화훼, 캠핑, 취미용품 등 힐링 산업의 지출도 꾸준히 증가하는 모습을 보인다. 전반적으로 가족 중심 소비보다 개인 중심 소비가 늘고 있다는 뜻이다.

의료·보험·연금 지출 증가세

한편 고령화 및 노후 준비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경기 침체로 보장심리가 확산되면서 의료비나 보험, 연금 등의 지출이 높은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그래프3’ 참조). 금융위기 당시에도 증가세를 보이던 가계의 교육비 지출은 저출산 추세와 e러닝(e-learning)의 확산, 무상급식 실시 등의 영향으로 2010년 이후 감소세를 보이는 것도 특기할 만하다.

언제나 그렇듯이 위기는 변화를 흔적으로 남겨 자신의 위력을 기억하게 만들 것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는 언젠가 말끔히 사라지겠지만, 그 경험이 우리 사회에 남긴 소비 트렌드 변화는 생각보다 오래 지속될 것이다. 이 변화 추세를 제대로 이해하고 활용하는 일이 한국 사회의 미래를 읽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한다. 지금 한국 소비자들은 전통적 소비항목인 의식주 지출을 줄이고 문화, 레저, 통신 관련 지출을 늘리며 삶의 질 향상을 추구하고 있다.



주간동아 2013.11.25 914호 (p24~25)

유정완 KB경영연구소 책임연구원 jungwan.you@kbf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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