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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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권력 콩밭 보면서 좋은 책 만들 순 없지”

재야출판계의 큰형 김대웅 번역가

  • 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

    입력2012-02-27 14: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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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과 권력 콩밭 보면서 좋은 책 만들 순 없지”
    1980년대 ‘원전(原典) 출간’ 열기를 기억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마르크스, 엥겔스 원전을 소개한 사람은 누구일까.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의 전 남편으로 더 알려진 김태경 이론과실천 대표일까, 아니면 주황색 표지를 앞세운 ‘자본론’의 김수행 성공회대 석좌교수일까. 출판계 비화이긴 하지만 정답은 당시 백산서당 편집장이던 김대웅(57) 씨다.

    1986년 엄혹했던 봄, 그는 엥겔스의 ‘가족, 사적 소유, 국가의 기원’을 번역해 아침출판사에서 출간했다. 그리고 두 달 뒤, 이론과실천의 ‘자본론’이 세상에 나오면서 금기가 깨졌다. 당시 당국은 ‘마르크스 원전’에 관여한 거의 모든 출판인을 구속했지만, 그는 무사했다. 책 제목을 ‘가족의 기원’으로 바꿔 출간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법무부가 관리하는 교도소에서도 ‘추천도서’ 격으로 이 책이 들어갔어요. 당국이 가족에 대한 가슴 따뜻한 내용이라고 착각했나 봐요(웃음).”

    가명으로 번역 출간한 책 수십 권

    한국외국어대 독일어과 74학번인 그는 이른바 1980년대 출판시장의 부활을 이끈 ‘무서운 아이들’에 속한다. 살벌했던 긴급조치 시대와 1980년 ‘서울의 봄’을 겪으면서 “이론 공부를 더해보자”는 욕심으로 출판계에 투신한 것. ‘민주화’나 ‘변혁’을 외치며 사회과학 출판사를 우후죽순 설립하던 시대였다.



    백산서당을 창립한 그는 이어 ‘까치출판사’ ‘두레출판사’ ‘한울출판사’ ‘한마당’ ‘산하출판사’ 등 1980년대를 주름잡은 출판사 설립에도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 백산서당 편집장으로 일하면서 본격적으로 마르크스주의 번역자로 활약했다.

    “당시엔 운동권 내부에서도 ‘변혁’에 대한 열망이 충만했지만 방법론에 대한 연구가 부족했어요. 게다가 읽을 만한 책도 ‘씨알의 소리’ ‘사상계’ ‘창작과 비평’ 이후에는 완전히 끊겼고…. 결국 해외 이론과 사례를 공부하자는 움직임이 바로 ‘원전 출간 붐’으로 연결된 거예요.”

    그는 1981년 테다 스코치폴 교수의 ‘국가와 사회혁명’이란 책을 가명으로 번역해 까치출판사에서 출간하며 번역자로 데뷔했다. 이어 ‘라틴아메리카 노동운동사’ ‘경제사 입문’ 등을 펴내 베스트셀러 작가 대열에 올랐다. 물론 실명을 밝히지 않고 ‘편집부’나 ‘가명’을 내세운 경우가 태반이다.

    그가 번역한 책은 널리 알리진 것만 해도 ‘마르크스, 엥겔스 평전’ ‘루카치 미학이론’ ‘독일이데올로기’ ‘게오르그 루카치의 미학사상’ 등 40여 권에 이른다. 1980년대 사회과학 출판계의 ‘큰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분명 1980년대 사회과학 출판계에도 유행이 있었죠. 초기엔 일본 해설서를 도입하다가 이어 프랑크푸르트학파와 종속이론이 인기를 끌었고, 곧이어 사회구성체론으로 절정을 누렸어요. 그렇게 방법론을 공부하고 내공을 쌓은 덕분에 오늘날 우리 토양에서 우리 처지와 시대를 반영하는 사회과학이 가능해진 거죠.”

    당시엔 주로 수배된 지식인이 생활고를 해결하려고 번역 작업에 매달렸다. 반체제 지식인처럼 그도 구속을 각오하고 원전 번역에 투신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런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다. 잠시 사무실을 비우거나 화장실을 간 사이에 공안요원이 출판사에 들이닥쳤기 때문이다. 그는 술자리에서 “그때 구속됐어야 훗날 민주화보상 신청이라도 했을 텐데…”라는 농담을 즐긴다.

    사회주의 붕괴가 임박하자 그는 변화된 세상을 살피겠다며 유학길에 올랐다. 독일에서 황태연(동국대), 김호균(명지대) 교수 등과 어울리며 유럽 문화를 체험했다. 성대한 프랑크푸르트도서전은 그의 머릿속을 뒤흔들었다. 1989년 10월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두 눈으로 목격한 그는 세계사적인 변화를 감지하고 서둘러 귀국을 결심했다. ‘이제는 문화의 시대’임을 깨우친 것이다.

    실제로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1990년대에는 사회과학 시장이 몰락하고 대중교양 시장이 팽창했다. 인문학의 시대가 온 것이다. 출판계에는 혁명을 위한 이론 대신, 산업화로 허기진 마음을 채울 양식이 줄을 이었다. 그도 사회과학에서 벗어나 예술, 고고학, 언어학, 신화학을 거쳐 패션, 음식 등 대중문화 전반을 소개하는 교양서적 출간에 앞장섰다. 따지고 보면 ‘교양의 대중화’도 운동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는 문화운동에서 발군의 실력을 보였다. 1980년대 이화여대 앞에 만든 술집 ‘목마름’은 문화운동가의 사랑방으로 기능했다. 이어 연세대 인근의 카페 ‘섬’과 사회과학 서점의 정점인 ‘오늘의책’에도 관여했다. 사회과학 출판인이 할 수 있는 모든 분야에 손을 댄 것이다.

    출판 및 문화계 마당발

    연극판에도 관여했다. 김명곤 전 문화부 장관과 함께 1986년 ‘극단 아리랑’을 창단하고 이어 진보문화인사인 유인택, 박인배, 문호근 등과 함께 민중문화연구회 창립에 관여했다.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이하 민예총)의 전신이 되는 모임이다. 민예총 국제교류국장을 거친 그는 김대중(DJ) 정부와 참여정부에서 문예진흥원 심의위원,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그러자 문화계에선 그를 두고 “국민의 정부 시절엔 상대적으로 어렸고, 참여정부 시절에는 지나치게 늙었다”는 우스갯소리가 돌았다. 지금도 여전히 그는 ‘진보문화계의 마당발’ 혹은 ‘문화계 인사의 네트워커’로 통한다.

    비인기 사회과학 서적과 한평생을 살아온 그가 1996년엔 ‘배꼽티를 입은 문화’를 번역해 약 20만 권을 팔아치웠다. 그런데 인세계약이 아닌 번역료 계약이었다. 재물운이 없었던 셈이다. 가난한 출판인의 길에 아쉬움은 없을까.

    “에이, 돈을 좇은 사람치고 제대로 된 책을 내놓은 사람을 한 명도 못 봤어요. 정신이 산만해지거든…. 권력을 좇아도 마찬가지죠. 책 만드는 사람은 열심히 쓰고 번역해 작업하는 기쁨이 있으니까요. 돈이야 없으면 어쩔 수 없는 거죠.”

    그는 요즘도 신화학을 번역하고, 과거에 자신이 번역한 원서를 개정하는 작업에 매달린다. 친구와 함께 만든 인사동 ‘포도나무집’은 여전히 문화계 인사의 사랑방이다.

    “돈과 권력 콩밭 보면서 좋은 책 만들 순 없지”
    책이란 어찌 보면 그의 평생 화두일지도 모른다. 그는 지금도 인생에서 가장 아쉬운 일로 1991년 막 개방한 러시아를 가장 빨리 횡단하고도 책으로 쓰지 못한 일을 꼽는다.

    “그 많은 사진과 자료를 딱 모아놓고는 베를린에서 소매치기를 당했어요. 왜 하필 그 할아버지가 내 가방을 가져갔을까. 그게 20년 전인데, 지금도 그 자료가 너무 아까워 잠을 못 자요.”

    이런 모습이 ‘출판인의 인생’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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