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보고 한옥에 우르르…옹기종기 사는 맛을 느껴야죠”

기자는 2003년 9월 서울 종로구 가회동과 계동 등 흔히 ‘북촌’이라 부르는 한옥마을을 취재했다. 문화계 인사 사이에서 ‘한옥의 발견’이 화두로 부상하던 시점이다. 돈 얘기부터 하려니 좀 그렇지만, 당시 대지 40평대(약 130㎡) 한옥을 평당(3.3㎡) 1100만 원(약 5억 원)에 거래하기 시작했다. 사대문 안 토박이 사이에선 “무척 올랐다” “빨리 팔고 떠야겠다” 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로부터 9년이 흐른 지금, 북촌은 명사의 수집 목록이자 자산 목록 1호로 떠올랐을 정도로 각광받는다. 전통거리엔 고급 부티크와 카페가 들어섰고, 외국인 관광객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골목골목을 헤집는다. 일전에 “6억5000만 원만 주면 바로 팔아치우겠다”고 호언했던 가회동의 한 할머니는 그사이 30억 원대 자산가로 변신했다.

“이게 무슨 한옥 보존인가요? 한옥 재개발이지. 영화 세트장과 큰 차이가 없는 신축 한옥이에요. 한 일본인 관광객이 유심히 바라보더니 ‘아타라시네(새것이네)’하고 실망하더군요. 제 맘도 똑같아요. 이런 현상이 서촌(서울 경복궁 서쪽 동네)에서는 벌어지지 않았으면 합니다.”

북촌 보며 서촌도 곧 망가질까 염려돼

서촌주거공간연구회(이하 연구회) 회장인 로버트 파우저(Robert J Fouser·51) 서울대 국어교육과 교수는 일종의 ‘선교사’다. 다만 종교가 아닌 한글과 한옥의 복음(福音)을 전파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렇다고 파란 눈의 이방인이 전통 한옥의 아름다움에 빠져들었다는 전형적인 스토리는 아니다. “평범함과 불편함이 행복하다”는 발상의 전환으로 서촌을 선택하고 동지를 규합해 연구회를 창립했다.



“한국인의 전형적 개발 패러다임을 한옥에도 적용하더군요. 일단 부수고 다시 짓는 것을 선(善)이라고 생각하죠. 북촌과 달리 서촌 한옥은 대개 1920년대 이후에 지은 평범한 일반주택이에요. 양반집 북촌도 모두 재건축하는 수준인데 그냥 놔두면 서촌의 미래가 없을 것 같다는 절박함이 있었어요.”

서촌의 가장 대표적 이슈는 통의동 154-10, 천재 시인 이상(李箱·1910∼37)의 집터 보존운동이다. 언뜻 납득하기 어려운 얘기다. 우리나라가 근대 문화유산 하나 제대로 보존하지 못할 나라가 아니지 않은가. 전말은 이렇다. 시인 이상이 세 살 때부터 스물세 살 때까지 살았다고 알려진 한옥이 2004년 문화유산으로 지정돼 문화유산국민신탁이 매입까지 했다. 그런데 이상이 이사하고 난 뒤 새로 지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면서 2008년 문화유산 지정이 취소됐다. 집 관리를 맡은 문화유산국민신탁과 재단법인 아름지기는 한옥을 허물고 이상 기념관을 신축하기로 했다.

“서촌이 처한 가장 상징적인 사건이에요. 시인의 손때가 묻었는지, 아닌지는 그다지 중요치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 보존해서 기념해도 충분해요. 여기에 번듯한 새 건물을 짓는다고 더 큰 의미가 생기는 것은 아니거든요. 지나치게 한옥 자체에 집중하다 보니 생긴 오류예요.”

미시간 출신인 파우저 교수의 아버지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으로 파병된 미군이었다. 그 영향으로 파우저 교수도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동아시아 문화를 접했고, 대학에서 일문학을 전공했다. 그러다 관심이 한국으로 쏠렸다. 1983년 한국어를 본격적으로 공부한 그는 격동의 19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 KAIST와 고려대에서 교양 영어 강사로 일했다.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영어교육과 교수로 활약했는데, 2000년 가고시마대에서는 처음으로 ‘교양 한국어’ 강의를 개설하며 일본에서 한국어를 강의하는 최초의 미국인이 되기도 했다. 2008년 미국인으로 서울대 국어교육과에 부임한 것도 진기록이다.

“일본 교토에선 1950년대 지은 비좁은 흙집에서 살았어요. 고려대 강사 시절엔 혜화동 한옥에서 살았고요. 특별할 것 없는 그냥 사람이 살아가는 집이에요. 그런 집이 옹기종기 모여 경관을 이루고 살맛 나는 커뮤니티를 만드는 거죠. 한마디로 사는 맛이 납디다. 그게 바로 보존할 만한 진짜 가치라고 생각해요. 북촌은 너무 빠르게 영화 세트장처럼 변해버려 서둘러 서촌으로 이주할 계획을 잡고 있어요.”

청와대 부근인 서촌은 얼핏 보면 오래되고 평범한 살림살이 집이 오밀조밀 모인 낙후한 지역으로 오인하기 쉽다. 그러나 1920년대부터 80년대까지 삶의 형태가 지층을 이루듯 켜켜이 쌓인 근현대 생활박물관이라 해도 좋을 풍경이다.

김한울 서촌주거공간연구회 사무국장(왼쪽)과 대화하는 파우저 교수.

그런데 평화로운 마을에 한옥 열풍과 ‘제2의 삼청동’ 바람이 불어닥쳤다. 부동산 투기와 개발 바람을 타고 한옥 가치가 상승하자 이를 비싸게 매입한 투자자는 다시 대규모 투자를 통해 한옥을 환골탈태시키는 것이다. 그러는 사이 한옥에 살고자 하는 이들은 밀려나고 마을은 놀이공원으로 바뀌었다.

그러다 보니 서울시와 원주민, 그리고 새로 이주해온 이들 간에 복잡 미묘한 갈등도 감지된다. 파우저 교수로 대표되는 연구회의 취지는 “무리한 개발을 지양하고 기존 한옥을 수리해가며 살기 좋은 ‘우리 동네’로 만들자”다. 현재 400여 명의 주민과 지식인이 이 같은 취지에 동조했다.

자기결정권 없는 한국인 안타까워

따지고 보면 경관이 아닌 건물에 집중하는 변태적 문화가 비단 한옥 보존 행정에만 나타난 것은 아니다. 그가 재직하는 서울대의 건축 행정도 마찬가지다. 모든 학과가 경쟁적으로 면적과 위세에 집착한 건축에 매진하다 보니, 관악산 기슭에 자리 잡은 고즈넉한 캠퍼스가 거대한 빌딩숲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건물이 중심이 되면 사람은 소외된다. 교수나 학생 모두 수업이 끝나면 학교 밖으로 도망치듯 빠져나간다고 한다.

“한국의 문제점에 대해 얘기해달라는 부탁을 받곤 해요. 자기결정권이 없다고 해야 할까요. 북한식으로 하면 주체가 부족하다고 말할 수도 있죠(웃음). 학문 평가도 외국인 시선으로, 인재 평가도 외국어 평가로…. 난센스죠. 그러다 보니 자기가 살아온 주거 형태를 버린 채 우르르 아파트로 몰려가고 다시 강남으로 몰려요. 진짜 가치는 스스로 발견하고 부여하는 것인데 말이죠.”

그의 독특한 ‘한옥관(觀)’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아시아의 전통과 가치, 그리고 미래로 확장되고 있었다. 문득 언어학자로 활동한 그가 미국과 일본, 한국에 적잖은 부동산(?)을 소유하게 된 배경이 궁금해졌다.

“돈이요? 제 나름대로 관리 잘했어요. 한국이 외환위기를 겪었지만 그래도 저력이 있다고 믿었고, 빌 클린턴 대통령 시절엔 ‘닷컴’에 투자해 성공한 안목(?)도 있죠. 어휴, 부동산으로 돈 벌자는 게 절대 아니에요. 한옥의 패러다임을 바꾸자는 거죠. 소장품이나 투자처가 아닌 살가운 커뮤니티, 정겨운 경관이 핵심이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