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언론에서 크게 보도한 삼성전자의 공정위 조사방해 행위는 지난해 3월 일어난 일이다. 이에 앞서 2004년과 2005년 조사 때도 삼성전자 직원들이 공정위 조사를 방해했다가 과태료 처분을 받았다. 이뿐 아니다. 2000년 삼성카드 직원 두 명이 조사방해 행위로 각각 1000만 원의 과태료를 부과받았고, 2005년에는 삼성토탈 직원, 2006년에는 삼성전자 자회사 세메스 직원이 같은 처분을 받았다. 공정위가 삼성전자에 과태료 역대 최고액을 부과했다는 보도 이후 ‘조선일보’는 사설에서 “제 힘센 것만 믿고 하늘 끝까지 다다른 용에겐 반드시 후회하는 날이 온다”는 항룡유회(亢龍有悔)의 고사를 들어 비판했다.
공정위의 거듭된 처벌에도 삼성전자 직원들은 왜 공정위 조사를 자꾸 방해한 것일까. 그 이유는 2005년 12월 2일 공정위가 전원회의에서 의결해 발표한 의결서(판결문과 유사한 것으로 공정위에서 내린 결정문)에 잘 나타나 있다. 의결서 맨 뒤쪽에는 삼성전자가 작성한 ‘공정위 조사대비요령 지침’이란 대외비 문건이 첨부돼 있다. 삼성전자가 본사는 물론 계열사에 ‘대외비(對外秘)’ 표시를 해 내려보낸 지침서다.
‘사전 준비사항’에 명시
공정위 의결서에 첨부된 삼성전자 ‘공정위 조사대비요령 지침’.
공정위 측은 당시 조사공무원들이 신분을 밝히고 관련 부서로 가려고 출입을 요청했지만, 삼성전자 보안담당 직원들은 ‘내부규정상 사전 약속을 하지 않은 경우 담당자가 나와야 출입을 허용할 수 있다’는 이유로 출입을 막았다고 밝혔다. 공정위는 또 조사공무원의 출입이 지연되는 동안 삼성전자 고위 간부의 지시에 따라 직원들이 조사 대상 자료를 폐기하고 핵심 조사 대상자의 개인용 컴퓨터(PC)까지 교체했다고 밝혔다.
삼성전자 직원들의 이 같은 조사방해 행위는 회사가 마련한 ‘지침’에 충실히 따른 결과다. 문서에는 조사공무원이 사업장에 도착했을 때 ‘조사관이라는 이유만으로 사업장 내 출입을 허용치 말고, 해당 조사 관련 공문 확인 후 입장 유도’하도록 보안담당 직원을 교육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내용이 담겼다. 또한 ‘조사관 도착 즉시 본사 T/F 혹은 업무그룹으로 연락하라’는 항목도 있다. 보안담당 직원이 조사공무원의 출입을 지연시킨 것은 삼성전자의 조사대비요령 지침에 따른 정상적 행위였던 셈이다.
조사 대상 자료를 폐기하고 PC를 교체한 것 역시 지침에 충실히 따른 것으로 보인다. ‘사전 준비사항’ 항목에는 ‘문서파일 박스를 정리하고 필요할 경우 이관’하도록 명시돼 있다. 전 직원의 PC를 점검하고, 특히 ‘휴지통 비우기’를 확실히 할 것을 강조했다. 강제 압수조사가 가능한 ‘직원들의 비망록(특히 여직원 수첩)은 반드시 폐기 혹은 치울 것’도 규정해놓았다. 이 밖에 ‘가급적 보관 중인 전 문서를 전수검사한 후 불필요하고 오해 소지가 있는 문서는 폐기 혹은 이관’할 것이라며 상세한 대응요령도 적시해놓았다. 즉 공정위 조사공무원의 출입을 지연시키는 사이 삼성전자 직원들이 조사 대상 자료를 폐기하고 조사 대상자들의 PC를 교체한 것 역시 사내 지침을 충실히 따른 셈이다.
2004년, 2005년 삼성전자와 계열사 직원이 공정위 조사를 방해한 것 역시 지침을 충실히 따랐기 때문이다. 공정위는 2004년 11월 22일 세메스 사무실에서 하도급 실태를 조사할 때 담당 직원이 사용하는 PC를 검색했는데 갑자기 ‘싱글(삼성그룹 내 문서통신망)’의 가동이 중단돼 조사가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다고 밝힌 바 있다.
삼성전자가 세메스에 내려보낸 ‘지침’에는 ‘공정위 조사 대비 사전 준비사항’ 항목에 ‘조직도, 전화번호부, 부서별 업무분장표 삭제 및 싱글 가동 중단’이 명시돼 있다. 즉 공정위 조사 중에 싱글 가동을 멈춘 것 역시 지침대로 행한 것이다. 이처럼 과태료 처분을 받은 삼성전자 직원들은 사내 지침을 준수하려다 공정위 조사를 방해한 꼴이 됐다. 그 결과 적게는 1000만 원에서 많게는 5000만 원까지 과태료 처분을 받았다.
과태료 납부라는 막대한 금전적 손실을 감수하면서까지 삼성전자 직원들이 지침 준수에 매달린 이유는 뭘까. 재계 관계자들은 “조직을 우선시하는 삼성의 회사 문화”를 그 이유로 꼽았다. 재계의 한 인사는 “‘회사 이익이 곧 자기 이익’이라고 생각하게끔 평소 교육받은 직원들이 외부(공정위) 조사보다 지침을 더 따른 것 아니겠느냐”고 풀이했다.
삼성 직원들이 상습적으로 공정위 조사를 방해한 데는 과태료 처분을 받아도 사내 징계나 인사상 불이익이 크지 않았다는 점도 요인으로 꼽힌다.
2005년 공정위 조사를 방해한 혐의로 5000만 원의 과태료 처분을 받은 삼성 계열사 임원은 상무보에서 상무를 거쳐 지금은 다른 계열사 전무로 재직 중이다. 외형상 인사 불이익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2011년 3월 24일 삼성전자 수원사업장을 찾은 공정거래위원회 조사공무원들을 건물 보안을 맡은 에스원 직원들이 출입구에서 막고 있다(왼쪽). 같은 시간 삼성전자 무선사업부 직원들이 관련 자료를 폐기하는 장면이 폐쇄회로(CC) TV에 잡혔다.
2005년에 같은 혐의로 과태료 처분을 받은 또 다른 부장급 그룹장은 현재 전무로 승진해 같은 업무를 담당하고 있으며, 같은 시기 과태료 처분을 받은 삼성전자 계열사 직원 역시 당시 과장에서 현재는 부장으로 승진해 같은 업무를 맡고 있다. 정부 기관의 조사를 방해하는 불법행위를 저질러 과태료 처분까지 받았지만 회사에서는 별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한 경제컨설턴트는 “조직원은 외부 평가보다 내부 평가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며 “대외적으로 처벌받았다 하더라도 조직에서 인정받는다는 인식이 자리 잡았기 때문에 같은 행위가 반복적으로 이뤄진 것 아니겠느냐”고 해석했다. 공정위 관계자도 “삼성 직원들 사이에 정당한 공무집행을 방해하면 회사에서도 징계를 받는다는 인식이 있었다면 조사방해 행위가 되풀이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은 공정위 조사방해로 과태료 역대 최고액 처분을 받은 지 사흘 뒤인 3월 21일 강도 높은 대책을 발표했다. 김순택 삼성 미래전략실장은 “정부의 정당한 공무집행을 방해하는 행위는 명백한 잘못”이라며 “조사를 방해하는 행위가 회사를 위한 것이라고 잘못 여기는 것은 그릇된 인식”이라고 못 박았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사장단 회의에서 조사방해에 대해 토론하고 대책을 마련할 정도로 그룹에서는 심각하게 생각한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재발 방지를 약속한 삼성의 약속이 공약(空約)이 아닌 공약(公約)이 될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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