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답사기’가 세상에 이름을 알린 1993년에는 민족주의적 정서가 폭발했다. 영화 ‘서편제’가 우리 영화사상 최다 관객을 동원하면서 이청준 원작소설집도 밀리언셀러가 됐다. 또 조선시대 규장각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추리기법으로 파헤친 이인화의 장편소설 ‘영원한 제국’(세계사)이 밀리언셀러가 됐고, 핵무기를 둘러싼 민족주의적 정서를 아낌없이 표현한 김진명 장편소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전 3권, 새움)는 1년 만에 400만 권이나 팔리는 대기록을 세웠다.
이후 20년 동안 우리나라는 급속히 변했다. 1995년에는 세계무역기구(WTO)에 정식으로 가입하고 윈도95가 일상화돼 세계화, 정보화 흐름을 탔지만, 1997년 말 외환위기를 맞았다. 이 위기에 생존을 걱정하던 삼성, 현대자동차, LG, SK 등 몇몇 대기업은 불과 10년 만에 세계시장을 주도하는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동남아를 압도하던 한류는 어느덧 세계로 뻗어나갔고 케이팝(K-pop)은 유럽과 미국까지 진출하는 쾌거를 이뤘다. 이렇게 우리 사회의 역동성은 세상을 완전히 뒤바꿔놓았다. 그 사이 앞에서 언급한 문화상품은 ‘이름’만 남고 실체는 거의 잊힌 존재가 됐다.
그럼에도 ‘답사기’가 20년 동안 인기를 누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 ‘답사기’는 책을 낼수록 질적으로 진화했다. 1권은 “전 국토가 박물관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구호로 대중의 인식 지평을 넓히려는 의도성을 노출해 다소 거북하다는 반응을 낳았다. 그러나 6권 ‘인생도처유상수’에서는 상수(上手)들의 입을 통해 문화를 바라보는 안목을 넓혀주는 넉넉함을 보였다. 문화재를 설명하는 내용의 격을 높임으로써 인식이 높아진 독자 눈높이를 거스르지 않았다.
1권에서는 저자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것만 이야기해 한계를 다소 노출했다. 하지만 6권에서는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는 날, 근정전 앞마당의 박석 이음새를 따라 빗물이 제 길을 찾아가는 경복궁의 아름다움에 대해 들려주는 경복궁 관리소장 같은 이들의 관록을 통해 삶의 진면목을 저절로 깨우칠 수 있다. 이는 저자가 관직 등을 맡아 하며 문화유산에 대한 다양한 데이터베이스를 확보했을 뿐 아니라, 이념과 세대를 뛰어넘어 다양한 계층의 사람과 책에 대한 경험을 공유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답사기’의 최대 매력은 이야기성이 확실하다는 점이다. 저자는 각기 다른 등장인물과 함께 문화유산을 찾아나서는 과정을 마치 소설처럼 전개한다. 그리고 독자는 자신이 직접 참여하는 듯한 느낌으로 우리 문화유산과 조우한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역사적 지식을 체득하고 감동도 공유한다.

1958년 출생.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학교도서관저널’ ‘기획회의’ 등 발행. 저서 ‘출판마케팅 입문’ ‘열정시대’ ‘20대, 컨셉력에 목숨 걸어라’ ‘베스트셀러 30년’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