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무고시 9기(1975년)인 이선진(64) 한림대 교수. 33년을 정통 외교관으로 활약한 그는 주로 미국과 중국 등 주요 2개국(G2) 외교에 투신했다. 참여정부 시절에는 외교통상부(이하 외교부) 정책실장으로서 다자외교의 총괄사령관을 맡아 맹활약했다. 2004년 이라크 무장단체에 의한 김선일 씨 피랍사건 당시에는 사건 수습의 총책임자였다. 퇴직한 지금은 ‘동남아시아 바로 알기’ 전도사로 활약하고 있다.
“저의 33년 외교 인생에 전환점이 된 사건이 두 번 있었어요. 첫 번째는 1997년 일본으로 연수를 가서 방 한 칸 구해보려고 복덕방을 돌아다녔을 때였어요. 아, 그런데 세입자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안 집주인들이 계약을 족족 취소하더라고요. 아니, 내가 미국과 소련의 핵위협을 다뤄온 사람인데…. 우리 이웃나라의 실상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걸 보니 허무하더라고요.
두 번째는 2005년부터 인도네시아 대사로 일할 때였어요. 정말 깜짝 놀랐어요. 우리나라 외교와 경제에서 인도네시아를 포함한 아세안(ASEAN)이 그토록 중요할 수 없더군요. 그런데 제가 한 실수를 후배들도 반복하고 있더라고요. 제가 그래도 정책실장 출신인데 외교부에서 인니(印泥)는 안중에도 없었거든요. 앞으로도 ‘4대 열강 중심 외교’를 한다면 우리나라는 망한다고 느꼈어요. 그래서 결심했죠.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면 바로 ‘동남아시아 전도사’가 되겠노라….”
“2015년까지 아세안 경제공동체 가능”
2009년 정년퇴임한 그는 한림대 국제학부 객원교수로 자리를 옮기며 그 다짐을 실천했다. 먼저 중국과 동남아 각국에 주재했던 전직 대사들의 정기모임을 만든 것이다. 신정승 전 주(駐)중국 대사, 이원형 전 주캄보디아 대사, 임홍재 전 주베트남 대사, 양봉렬 전 주말레이시아 대사 등 아시아 외교 현장에서 다년간 활약했던 동지들을 규합해 ‘아세안 바로 알리기’ 강연과 저술 활동에 나선 것. 그 결과로 나온 첫 작품이 지난해 12월 출간한 ‘중국의 부상과 동남아의 대응’이다.
기자는 지난해 6월 광화문의 한아세안센터에서 열린 ‘아세안 바로 알기’ 연속강좌를 통해 그의 열정을 처음 확인했다. ‘동남아 경제통합의 현 주소와 미래 전망’이라는 주제의 강연에서 그는 “한국의 제1경제 파트너인 아세안에 대한 획기적 인식 개선 없이는 국가의 미래가 어둡다”며 특히 “2015년까지 아세안은 경제공동체로 자리 잡을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아 청중에게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그는 매년 방학 때면 배낭 하나 들쳐 메고 동남아로 취재여행을 떠났다. 비행기가 아닌 기차, 버스를 타고 중국과 아세안 국경지대를 답사한 것이다. 전혀 색다른 경험이었다. 의전에 바쁜 외교관 시절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2010년 미얀마와 중국 국경에 가서 20t 이상 대형 트럭의 수를 세어봤죠. 시간당 약 40대가 오갔을까요? 올 2월에 다시 가서 세어보니 시간당 120대가 넘더군요. 정말 대단한 광경이었어요. 더 놀라운 사실은 이런 물동량이 공식 통계엔 안 잡힌다는 점이에요. 현장에서 경험하는 중국 남부와 아세안의 역동성은 충격적인 수준이에요.”
그가 아시아 외교에 본격적으로 눈을 뜬 것은 중국의 적극적인 움직임 때문이다. 2000년대 들어 자신감을 부쩍 회복한 중국은 동남아시아를 무대로 적극적인 외교 전략을 구사하기 시작했다. 철도와 고속도로를 건설하고 가스 파이프라인을 협력해 짓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중국의 서부대개발 같은 국토대개발 전략과 에너지 전략의 핵심에 ‘동남아 지역’이 포함됐다.
미국과 중국이 동시에 미얀마로 달려간 이유가 여기에 있고, 남사군도(南沙群島)를 놓고 치열하게 대립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나아가 동남아시아에서 보이는 G2의 대결 양상은 북한에서 유사하게 반복되는 패턴이기도 하다.
“사실 아세안의 매력이란 세계 열강들이 펴는 외교 전략의 핵심인 동시에 가장 가파르게 성장하는 경제공동체라는 점이에요. 이제는 우리도 동북아 구도에서 벗어나 동아시아 전체를 바라봐야 할 시점입니다.”
한국 외교의 맹점이라면 ‘북한’에 발목 잡혀 세계 흐름을 정확히 집어내지 못한다는 점이다. 자연스레 북한과 주변 4대 열강(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에 모든 외교 역량을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외교부 내에서 “지역 전문가를 양성하지 못한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 역시 이 같은 ‘냉전 프레임’에 갇혀 있었다고 토로했다.
“처음 인도네시아에 부임해서는 ‘이 나라를 활용해 북한을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을까’라는 고민에 머물렀어요. 철저하게 미국 관점에서 바라봐야 했고요. 그런데 지금 이 땅은 우리의 가장 활발한 교역 상대국이자 투자 대상국이에요. 그동안 지나치게 구시대적 정치논리에 매몰돼 있었던 거죠. ‘도대체 나는 어느 나라 외교관인가’ 하는 생각까지 들더군요.”
10억 규모의 새로운 시장 탄생
우리가 동남아시아에 대해 오해하기 쉬운 이유는 국내총생산(GDP)이나 시장규모로만 판단해 ‘고만고만한 나라들의 집합’으로 인식하기 때문. 그래서 큰 영향력이 없다고 생각해 경시한다.
“제가 언제나 강조하는 대목은 개별 국가로 동남아시아를 바라보지 말고 6억 인구의 통합된 아세안 경제공동체로 바라보자는 거예요. 중국 남부까지 포함할 경우 10억 규모의 새로운 시장이 탄생하죠. 하루빨리 이에 대비해야 한다는 절박함을 느낍니다.”
전문가들도 쉽사리 확답을 내놓을 수 없는 ‘아세안 경제공동체’가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그는 탄탄한 현장경험을 바탕으로 “된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그 흐름을 놓치지 않는 것이 국가 발전 전략의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저는 33년 가운데 딱 3년을 동남아시아에서 근무했을 뿐이에요. 그런데 정말 중요한 이웃입니다. 저 같은 선배 외교관의 책임도 크다는 것을 알아요. 그래서인지 동남아시아에 대한 인식 개선을 위해서라면 어디든 나설 거예요.”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정통 외교관의 외침은 결국 우리나라 젊은이들로 향했다.
“청년실업이다, 내수경기 침체다 그러잖아요. 저도 이 나이에 배낭 메고 계속 밖으로 나가 현장을 살피고 공부합니다. 젊은이들도 계속 밖으로 나가고 아시아를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일본이 왜 이렇게 침체일로일까요? 바로 국내에 안주하는 ‘내부 지향성’ 때문이에요. 우리는 절대 일본의 실패를 답습해선 안 돼요. 해외에 나가 이웃과 만나고 교역해야 해요. 그게 우리의 미래가 됩니다.”
“저의 33년 외교 인생에 전환점이 된 사건이 두 번 있었어요. 첫 번째는 1997년 일본으로 연수를 가서 방 한 칸 구해보려고 복덕방을 돌아다녔을 때였어요. 아, 그런데 세입자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안 집주인들이 계약을 족족 취소하더라고요. 아니, 내가 미국과 소련의 핵위협을 다뤄온 사람인데…. 우리 이웃나라의 실상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걸 보니 허무하더라고요.
두 번째는 2005년부터 인도네시아 대사로 일할 때였어요. 정말 깜짝 놀랐어요. 우리나라 외교와 경제에서 인도네시아를 포함한 아세안(ASEAN)이 그토록 중요할 수 없더군요. 그런데 제가 한 실수를 후배들도 반복하고 있더라고요. 제가 그래도 정책실장 출신인데 외교부에서 인니(印泥)는 안중에도 없었거든요. 앞으로도 ‘4대 열강 중심 외교’를 한다면 우리나라는 망한다고 느꼈어요. 그래서 결심했죠.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면 바로 ‘동남아시아 전도사’가 되겠노라….”
“2015년까지 아세안 경제공동체 가능”
2009년 정년퇴임한 그는 한림대 국제학부 객원교수로 자리를 옮기며 그 다짐을 실천했다. 먼저 중국과 동남아 각국에 주재했던 전직 대사들의 정기모임을 만든 것이다. 신정승 전 주(駐)중국 대사, 이원형 전 주캄보디아 대사, 임홍재 전 주베트남 대사, 양봉렬 전 주말레이시아 대사 등 아시아 외교 현장에서 다년간 활약했던 동지들을 규합해 ‘아세안 바로 알리기’ 강연과 저술 활동에 나선 것. 그 결과로 나온 첫 작품이 지난해 12월 출간한 ‘중국의 부상과 동남아의 대응’이다.
기자는 지난해 6월 광화문의 한아세안센터에서 열린 ‘아세안 바로 알기’ 연속강좌를 통해 그의 열정을 처음 확인했다. ‘동남아 경제통합의 현 주소와 미래 전망’이라는 주제의 강연에서 그는 “한국의 제1경제 파트너인 아세안에 대한 획기적 인식 개선 없이는 국가의 미래가 어둡다”며 특히 “2015년까지 아세안은 경제공동체로 자리 잡을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아 청중에게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그는 매년 방학 때면 배낭 하나 들쳐 메고 동남아로 취재여행을 떠났다. 비행기가 아닌 기차, 버스를 타고 중국과 아세안 국경지대를 답사한 것이다. 전혀 색다른 경험이었다. 의전에 바쁜 외교관 시절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2010년 미얀마와 중국 국경에 가서 20t 이상 대형 트럭의 수를 세어봤죠. 시간당 약 40대가 오갔을까요? 올 2월에 다시 가서 세어보니 시간당 120대가 넘더군요. 정말 대단한 광경이었어요. 더 놀라운 사실은 이런 물동량이 공식 통계엔 안 잡힌다는 점이에요. 현장에서 경험하는 중국 남부와 아세안의 역동성은 충격적인 수준이에요.”
그가 아시아 외교에 본격적으로 눈을 뜬 것은 중국의 적극적인 움직임 때문이다. 2000년대 들어 자신감을 부쩍 회복한 중국은 동남아시아를 무대로 적극적인 외교 전략을 구사하기 시작했다. 철도와 고속도로를 건설하고 가스 파이프라인을 협력해 짓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중국의 서부대개발 같은 국토대개발 전략과 에너지 전략의 핵심에 ‘동남아 지역’이 포함됐다.
2006년 6월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오른쪽)과 청와대에서 얘기를 나누는 이선진 주인도네시아 대사.
“사실 아세안의 매력이란 세계 열강들이 펴는 외교 전략의 핵심인 동시에 가장 가파르게 성장하는 경제공동체라는 점이에요. 이제는 우리도 동북아 구도에서 벗어나 동아시아 전체를 바라봐야 할 시점입니다.”
한국 외교의 맹점이라면 ‘북한’에 발목 잡혀 세계 흐름을 정확히 집어내지 못한다는 점이다. 자연스레 북한과 주변 4대 열강(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에 모든 외교 역량을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외교부 내에서 “지역 전문가를 양성하지 못한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 역시 이 같은 ‘냉전 프레임’에 갇혀 있었다고 토로했다.
“처음 인도네시아에 부임해서는 ‘이 나라를 활용해 북한을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을까’라는 고민에 머물렀어요. 철저하게 미국 관점에서 바라봐야 했고요. 그런데 지금 이 땅은 우리의 가장 활발한 교역 상대국이자 투자 대상국이에요. 그동안 지나치게 구시대적 정치논리에 매몰돼 있었던 거죠. ‘도대체 나는 어느 나라 외교관인가’ 하는 생각까지 들더군요.”
10억 규모의 새로운 시장 탄생
우리가 동남아시아에 대해 오해하기 쉬운 이유는 국내총생산(GDP)이나 시장규모로만 판단해 ‘고만고만한 나라들의 집합’으로 인식하기 때문. 그래서 큰 영향력이 없다고 생각해 경시한다.
“제가 언제나 강조하는 대목은 개별 국가로 동남아시아를 바라보지 말고 6억 인구의 통합된 아세안 경제공동체로 바라보자는 거예요. 중국 남부까지 포함할 경우 10억 규모의 새로운 시장이 탄생하죠. 하루빨리 이에 대비해야 한다는 절박함을 느낍니다.”
전문가들도 쉽사리 확답을 내놓을 수 없는 ‘아세안 경제공동체’가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그는 탄탄한 현장경험을 바탕으로 “된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그 흐름을 놓치지 않는 것이 국가 발전 전략의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저는 33년 가운데 딱 3년을 동남아시아에서 근무했을 뿐이에요. 그런데 정말 중요한 이웃입니다. 저 같은 선배 외교관의 책임도 크다는 것을 알아요. 그래서인지 동남아시아에 대한 인식 개선을 위해서라면 어디든 나설 거예요.”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정통 외교관의 외침은 결국 우리나라 젊은이들로 향했다.
“청년실업이다, 내수경기 침체다 그러잖아요. 저도 이 나이에 배낭 메고 계속 밖으로 나가 현장을 살피고 공부합니다. 젊은이들도 계속 밖으로 나가고 아시아를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일본이 왜 이렇게 침체일로일까요? 바로 국내에 안주하는 ‘내부 지향성’ 때문이에요. 우리는 절대 일본의 실패를 답습해선 안 돼요. 해외에 나가 이웃과 만나고 교역해야 해요. 그게 우리의 미래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