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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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 딛고 흥겨운 연주 공연은 신 나고 행복은 커가고

‘한경희 씨 가족 밴드’ 강원도 곳곳서 공연 요청

  • 백경선 자유기고가 sudaqueen@hanmail.net

    입력2012-02-27 14: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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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련 딛고 흥겨운 연주 공연은 신 나고 행복은 커가고
    2월 15일 오전 강원도 철원군 근남면 마현리에 소재한 마현보건진료소가 평소와 다르게 시끌시끌하다. 이 마을에 행복한 웃음을 전해주려고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기 때문. 그 손님은 바로 한경희(57) 씨와 그의 아내 최순덕(52) 씨, 아들 필규(26) 씨로 구성된 가족 밴드.

    최씨와 필규 씨의 색소폰 반주에 맞춰 한씨가 노래를 부르며 멋지게 신고식을 했다. 그러고 나서 본격적으로 마현리 주민 노래자랑이 시작됐다. 진행을 맡은 한씨의 입담 덕분에 시간이 지날수록 주민들의 박수소리와 웃음소리가 커졌고, 주민들이 즐거워하니 한씨 가족은 더 흥이 났다.

    그저 신나고 행복하게 살아왔을 법한 한씨가 주민들에게 충격적인 고백을 했다. 2003년 간암 2기 판정을 받고 수술을 11번이나 했다는 것이다. 그는 “간 이식이 아니었으면 나는 지금 지하에 있을 것”이라며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얼마나 고맙고 행복한지 모른다”고 말했다. 그러니 신나게 또 즐겁게 웃으란다.

    간암 말기 기적적인 완치

    한씨 가족의 본업은 따로 있다. 철원군 서면 자등리에서 ‘바우네 집’(바우는 그의 가족이 키우던 개로, 2010년에 죽었다고 한다)이라는 한식집을 운영한다. 음식점을 운영하면서 틈틈이 공연 봉사를 다니는 것. 매달 첫째 주 수요일 요양원이나 양로원 등을 찾아다니되, 그들을 찾는 곳이 있으면 언제라도 달려간다. 최근에는 부쩍 찾는 곳이 많아져 본업이 역전될 상황이라고 한다.



    원래 경찰 공무원이었던 한씨는 2005년 6월, 26년 공직생활을 마감하고 명예퇴직했다. 아니, 해야만 했다. 간암 말기 상태로 더는 근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건강상 다닐 수 없었고, 또 그만두고도 싶었어요. 제 생이 얼마 안 남았다고 생각하니 직장에 더 다녀 뭐하나 싶고, 가족과 한 시간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었죠.”

    한씨는 가족과 함께 사진관에 가서 가족사진을 찍고, 독사진도 찍었다. 영정사진을 준비한 것이다. 그는 “늘 언제 죽을까 겁났다”고 털어놨다.

    “죽음에 대한 무서움보다 죽음 때문에 ‘쪼는’ 저 자신을 더 견딜 수 없었어요. 제가 너무 싫었죠. 겁먹고 쫄면서 사느니 그냥 죽는 게 더 낫겠다 싶었고, 그래서 유서까지 썼어요.”

    그런데 차마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가 없었다. 가족이 눈에 밟혔기 때문이다. 세상 물정 모르고 착하기만 한 아내와 치매를 앓는 어머니가 눈에 밟혔다.

    그 누구보다 장애가 있는 아들이 그를 붙잡았다. 필규 씨는 안면 기형을 동반하는 크루존병 탓에 태어날 때부터 복합적인 장애를 안고 있었다. 태어난 다음 날부터 30여 차례 수술을 받은 필규 씨는 현재 지적 장애, 척추 장애, 호흡 장애 등을 안고 살아가는데 올봄에도 호흡 장애 때문에 수술을 받아야 한다.

    나와 가족이 즐거워 즐긴다

    시련 딛고 흥겨운 연주 공연은 신 나고 행복은 커가고
    가족을 두고 도저히 죽을 수 없었던 그는 하늘을 향해 간절히 빌었다. 살려달라고. 결국 하늘은 그의 가족에게 기적을 선물했다. 2005년 간 이식수술을 받고 ‘기적처럼’ 건강을 회복한 것이다. 2005년 10월 첫 번째 간 이식수술 후 이식한 간이 기능을 상실해 사경을 헤매기까지 했지만, 하늘이 도와 그해 말 재이식수술을 했고 경과가 좋았다.

    건강을 회복한 한씨는 2008년부터 색소폰을 배웠다. 어려서부터 음악을 좋아한 그는 일찍부터 색소폰을 배우고 싶었다. 2003년 간암 판정을 받자 바로 색소폰부터 살 정도였다. 그는 자신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필규 씨와 아내에게도 색소폰을 배우게 했다.

    “가족까지 색소폰을 배우게 한 것은 가족 밴드를 만들기 위해서였어요. 가족 밴드는 저의 오랜 꿈이었으니까요.”

    사실 ‘한씨네 가족 밴드’는 1998년 그가 정선경찰서로 발령받아 서울에서 정선으로 이사 오면서부터 시작됐다(한씨는 정선에서 3년간 근무한 뒤 2001년 철원경찰서로 옮기면서 철원에 정착했다). 당시에는 집에 손님이 오면 발표회 수준으로 보여주거나, 요양원을 찾아가 공연하더라도 지금처럼 계획적이고 적극적이지는 않았다.

    한씨네 가족 밴드가 제대로 모양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2010년 초. 음식점을 하면서 1년에 두 번 동네 어르신들을 모셔다 잔치를 벌이고 공연을 했는데, 그것이 입소문이 나 주변 요양원이나 노인대학 등에서 공연 요청을 해온 것이다.

    그는 “이왕 하는 것 제대로 공연하기 위해 투자도 많이 했다”고 귀띔했다. 음향장비를 마련하는 데만 900만 원이 들었고, 악기까지 합하면 1000만 원 남짓 들었다는 것.

    이렇게까지 투자해서 봉사하는 이유를 묻자 그는 “무엇을 얻고자 하는 건 아니다”라며 “그저 나와 가족이 즐거우니까 즐긴다”고 말했다.

    “저는 봉사라 생각 안 해요. 공연하면서 오히려 저와 제 가족이 얻는 것이 더 많거든요. 사람들이 즐거워하고 행복해하면 우리 가족은 몇 배 더 즐겁고 행복하죠. 무엇보다 아들이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즐거워하니까 좋아요. 게다가 공연 때마다 어머니를 모시고 다니는데, 어머니에게 즐거운 나들이 시간이 되니까 금상첨화죠.”

    원래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성격이라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부끄러워했다는 최씨는 “공연 봉사를 다니면서 많이 변했다”며 “이런 기회를 준 남편한테 고맙다”고 말했다. 인터뷰 다음 날 제36회 삼성효행상 대상을 수상하게 된 최씨는 “많은 사람 앞에서 수상 소감을 전해야 한다는 생각에 예전 같으면 가슴이 두근두근했을 텐데, 이젠 여유가 조금 있다”며 수줍게 웃었다.

    장애를 안고 사는 아들, 치매를 앓는 어머니, 간암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한씨. 시련이 겹겹이 쌓여 삶이 참으로 버거울 법도 한데, 이들은 “행복하다”며 웃었다. 한씨는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며 “우리 가족에겐 시련이 아니라 일상일 뿐”이라고 말했다.

    “언젠가 고교 동창모임에 갔는데 한 친구의 얼굴빛이 안 좋은 거예요. 알고 보니 그 친구 아내가 디스크 때문에 수술을 받을지도 모른다고 하더라고요. 아내가 디스크 수술을 받은 것도 아니고 받을지도 모르는 것 때문에 세상 걱정을 다 짊어진 얼굴을 하고 있었던 거죠. 저와 우리 가족에겐 디스크 수술쯤은 아무것도 아닌데 말이에요. 시련의 크기보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러시아의 시인 푸시킨이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하거나 서러워하지 마라. 절망의 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 반드시 찾아오리라’라고 했던가. 삶이 아무리 속일지라도 노하거나 서러워하지 않는 그의 가족에게 응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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