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93

2011.06.27

뚝심 김경문의 ‘野人시대’

두산 감독 전격 사퇴 후 재충전 위해 미국행…올 시즌 후 프로야구로 복귀 가능성

  • 김도현 스포츠동아 기자 dohoney@donga.com

    입력2011-06-27 11: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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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뚝심 김경문의 ‘野人시대’
    두산 김경문(53) 감독이 전격적인 중도 자진사퇴로 프로야구계를 발칵 뒤집어놨다. 한국프로야구 사상 자진사퇴 형식을 빌린 감독의 퇴장은 많았지만, 김 전 감독처럼 순수하게 스스로 옷을 벗은 사례는 유례를 찾기 힘들다. “중간에 포기하기에는 너무 빠른 느낌이 있다”는 SK 김성근 감독의 말처럼 ‘전격적인 결단’이었다.

    그러나 김 전 감독을 아는 사람들은 “시점이 예상보다 일렀을 뿐이지, 그의 스타일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는다”는 반응을 보였다. 적잖은 시간 동안 두산 담당 기자로 그를 접했던 필자도 ‘올스타 브레이크 즈음까지 한국시리즈 우승에 대한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면 스스로 시원하게 사표를 던질 것’이라고 일찌감치 예상했다.

    한국시리즈 ‘무관의 한’

    김 전 감독은 온화한 겉모습과 달리 맺고 끊음이 확실한 지도자였다. 2003년 10월 전임 김인식 감독의 뒤를 이어 두산 새 사령탑으로 취임한 뒤 그는 시종일관 ‘외유내강’의 면모를 보였다. 의리를 중시하고, 소신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이었다. 그는 한때 재정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때 친구 5명에게 100만 원씩 도움을 받아 500만 원짜리 옥탑방에서 다시 삶을 시작했다. 스스로의 표현대로 ‘스타플레이어도 아니고, 야구를 그렇게 잘하던 선수 출신도 아니지만’ 뚝심으로 바닥을 치고 일어섰고, 그라운드 안팎에서 강단 있는 모습을 보였다.

    2004년 두산 감독에 올라 지난 7년 중 6년 동안 팀을 포스트시즌에 진출시켰고, 한국시리즈 준우승을 세 번이나 일궈내며 ‘2000년대 가장 성공한 감독’으로 평가받았다. 국내 프로야구 사상 최초로 6년 연속 5할 이상의 승률을 기록하는 위업을 달성하기도 했다. 현역 시절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던 그가 프로감독으로서 명성을 얻고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9전 전승이라는 전무후무한 신화를 창조하며 국민에게 금메달을 선물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준비된 감독’이었기 때문이다.



    2003년 10월 두산은 김인식 감독의 후임으로 선동열 당시 KBO 홍보위원을 낙점하고 사실상 공개협상을 벌였다. 이 와중에 김인식 감독은 자진사퇴를 선언했으나 선동열 위원이 계약조건에 난색을 표하며 협상이 깨지자 두산의 감독직은 돌연 무주공산이 됐다. 결국 당시 김경문 배터리코치가 두산 지휘봉을 잡았지만 여기에는 일화가 있다.

    1998년부터 그해까지 6년간 모셨던 스승이 물러나자 김경문 코치 역시 다음 시즌 롯데에서 새 출발하기로 마음먹고 친정에 작별을 고했다. 그러나 졸지에 감독직이 공석이 된 두산 구단이 전격적으로 김경문 코치를 붙잡으면서 ‘김경문 감독’이 탄생했던 것. 당시 김경문 감독의 최종 경쟁자는 양승호 수비코치(현 롯데 감독)였다. 이런 배경 속에서 출발한 탓에 ‘김경문 체제’의 안정화를 점친 야구인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김 전 감독은 취임 첫 해 팀을 정규시즌 3위로 플레이오프까지 진출시켰다. 이어 2005·2007·2008년 등 3차례에 걸쳐 한국시리즈 무대를 밟으며 두산을 2000년대 중·후반 프로야구의 강자로 만들었다. 무엇보다 서울의 간판 팀은 LG라는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두산을 수도권 제1명문 팀으로 가꿨다.

    그가 감독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부드러운 이미지와 달리 무게 있는 말 한 마디, 원칙에 입각한 신상필벌로 개성 강한 두산 선수단을 철저히 장악한 결과였다. 선수에게 유독 근성을 강조하는 그는 그라운드에서 혼을 불사르는 선수를 좋아했을 뿐 아니라 김현수, 이종욱, 최준석, 정수빈 등 무명 선수를 일약 스타로 일궈내며 선수 발굴에도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은 지도자 김경문에게 큰 전환점이었다. 2007년과 2008년 2년 연속 숙적 SK의 벽에 막혀 한국시리즈 준우승에 그치며 한계도 노출했지만, 베이징올림픽에서 그는 한국야구와 자신의 위상을 한 단계 격상시켰다. 아시아 최강이라고 자부하던 일본야구도 이루지 못한 올림픽 우승을 그 역시 자랑스럽게 여겼다.

    ‘베이징올림픽 금메달 감독’이라고 자부심을 느끼던 김 전 감독에게도 단 한 가지, 마음속 깊은 한이 있었다. 바로 한국시리즈 우승이라는 간절한 숙원이었다. 올해 두산 감독으로만 8년째를 앞둔 그는 지난겨울 “8년이라는 기회 동안 팀을 우승시키지 못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내 잘못”이라며 칼을 갈았다.

    달의 몰락? 엔씨소프트행 거론

    뚝심 김경문의 ‘野人시대’

    김경문 감독이 사퇴한 다음 날 한 남성 팬이 김 감독을 응원하는 피켓을 들고 있다.

    자신감도 남달랐다. 두산은 개막 전 전문가들이 뽑은 우승후보 1순위였다. 더스틴 니퍼트라는 걸출한 용병을 영입해 객관적인 전력이 다른 7개 구단보다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김 전 감독은 다시 한 번 대권에 도전하기 위해 야심차게 시즌을 시작했지만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주전 선수들의 잇단 부상과 임태훈의 예기치 못한 이탈 등 숱한 악재가 겹치면서 한국시리즈 우승에서 멀어지자, 과감히 야인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구차하게(?) 서너 달 월급을 더 받기 위해 자기 자리에 연연하던 과거 지도자들과는 확실히 다른 선택이었다. ‘김경문 아니면 하기 힘든 결단’이라는 말이 나온 것도 그래서다. 김 전 감독은 사퇴서를 통해 “올 시즌 어느 때보다 구단의 지원이 좋았고 나름대로 준비도 많이 했지만 구상대로 풀리지 않아 힘들었다”며 “지금 이 시점에서 사퇴하는 것이 선수들이 서로 뭉치는 계기가 되고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는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한다”며 ‘쿨하게’ 사퇴 이유를 설명했다.

    평소 대쪽 같은 성격답게 팀 성적에 모든 책임을 지고 지휘봉을 내려놓자 이는 오히려 김 전 감독에 대한 주변 평가가 한 단계 올라가는 계기가 됐다. 김경문이라는 이름 때문에 ‘달’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그의 중도 자진사퇴는 짧게 보면 ‘달의 몰락’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가 그동안 쌓아온 업적과 야구판을 휘어잡은 매력 덕에 ‘달의 몰락’은 올해 말 프로야구 감독 판도를 뒤흔드는 ‘태풍의 눈’으로 이어질 전망이다.

    먼저 그는 신생구단인 엔씨소프트의 유력한 차기 감독으로 떠올랐다. 그와 함께 ‘젊은 감독’의 쌍두마차로 불리는 선동열 전 삼성 감독의 두산 사령탑 데뷔 가능성도 점쳐진다. 더구나 올 시즌 말 계약이 만료되는 SK 김 감독의 거취 또한 아직 정해진 게 없어 올 시즌이 끝나면 한국프로야구는 연쇄 사령탑 이동이라는 후폭풍이 몰아칠지 모른다.

    김 전 감독은 6월 20일 휴식과 공부를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이번 결정이 야구인생의 전환점이 되리라 예상했다. 미국행을 선택한 그는 적잖은 재충전을 염두에 두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한국프로야구가 여전히 그를 필요로 하는 이상, 그의 야인 생활은 그다지 오래가지 않을 것이란 시각이 공통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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