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75

2009.03.03

사랑 찾아 머나먼 이국서 꿈꾸는 삶

네팔 산골의 일본 여인

  • 박동식 트래블게릴라 멤버 www.parkspark.com

    입력2009-02-25 18: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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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 찾아 머나먼 이국서 꿈꾸는 삶

    일본을 떠나 네팔 산골에서 영원한 사랑을 꿈꿨던 여인. 사랑은 지나가고 코흘리개 아이만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가 ‘캐비’의 시골집에 도착한 것은 늦은 오후였다. 캐비의 어머니와 아내는 밭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우리를 반긴 것은 ‘언주’라는 딸과 힌두신의 이름을 딴 ‘시바’라는 아들이었다. 우리가 온 것을 알리기 위해 언주가 밭으로 달려갔고 한참 뒤 캐비의 어머니가 도착했다. 캐비의 홀어머니는 노모였으나 이곳 사람들이 나이에 비해 늙어 보인다는 점을 고려하면 외모에서 느껴지는 나이보다 젊을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캐비의 아내는 해가 지고 어둑어둑해서야 돌아왔다.

    캐비를 만난 곳은 네팔의 전원도시 포카라였다. 나는 2개의 면이 넓은 유리창으로 된 2층 숙소에서 머물고 있었고, 캐비는 가까운 이웃 호텔의 직원이었다. 2박3일 정도 트레킹할 계획이던 나는 장소를 두고 고민 중이었다. 설산을 밟아보려면 최소 열흘이 필요하나 그럴 여유가 없었고, 어차피 설산을 밟지 못할 바엔 여행자의 발길이 닿지 않은 네팔 산골의 순수한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 고민을 알고 있던 캐비가 어느 날 기막힌 제안을 했다. 바로 자신의 집으로 트레킹을 떠나자는 것이다.

    이른 아침 대절한 택시를 타고 어느 산 밑에 도착한 후, 하루 종일 산을 오른 뒤에야 캐비의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시에서 일하는 캐비도 집이 멀어서 1년에 한두 번만 방문한다고 했다. 흙벽으로 이루어진 집은 TV 다큐멘터리에서나 보았음직한 구조였다. 방과 부엌이 구분된 것이 아니라, 한쪽에 나무 침상이 있고 다른 한쪽 바닥에 30cm 높이의 화덕이 있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으니 당연히 가전제품도 없었다. 살림도구라고 해봐야 침상과 그릇 몇 개가 전부였다. 난방시설이 없어서인지 창문이라고는 벽에 뚫린 구멍 하나밖에 없어 한낮에도 실내는 매우 어두웠다. 실내외가 모두 흙을 개어서 만든 구조라 안으로 들어갈 때도 신발을 벗지 않았다.

    낯선 사랑에 대한 환상

    트레킹을 떠나기 전 나는 우연히 캐비의 아내가 일본인이란 것을 알게 됐다. 캐비는 일터인 호텔에서 숙식을 하지만 따로 방을 얻어서 짐을 보관했고, 가끔 그곳에서 잠을 자기도 하는 것 같았다. 하루는 캐비가 호텔의 다른 직원에게 자신의 방에서 어떤 물건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는데, 우연히 내가 그 직원과 동행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방에서 기모노를 입은 여인과 찍은 캐비의 사진을 보게 됐다. 캐비의 친구는 절대 비밀이라며 그 여인이 캐비의 아내라고 말해주었다.



    사랑 찾아 머나먼 이국서 꿈꾸는 삶
    들은 이야기로는 일본 여인이 네팔에 여행 왔다가 캐비와 사랑에 빠지게 됐고, 그녀의 다음 여행지인 인도에 캐비가 동행하면서 사랑이 깊어졌던 모양이다. 결국 여인은 여행을 마치고 일본으로 귀국했다가 다시 네팔로 돌아와 캐비와 결혼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캐비는 나에게 그 사실을 숨겼다.

    결혼 생활 8년. 캐비의 아내는 완벽한 네팔 산골여인이 돼 있었다. 그녀의 모습 어디에서도 일본이나 문명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사랑 때문에 고국을 떠나 네팔 오지에서 하루 종일 농사일에 시달리는 여인. 일본에서 그녀의 가정환경이야 알 수 없지만 나는 그녀가 분명 후회하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녀는 어쩌면 사랑이란 것이 영원한 게 아니라며 뒤늦은 후회를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남편은 겨우 1년에 한두 번 얼굴을 볼 뿐이며, 그나마도 그들의 상봉 모습을 보니 사랑은 진작 물 건너갔다. 그들은 대화는커녕 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않았고, 기껏 나눈 몇 마디의 대화도 마치 부부싸움이라도 한 사람들처럼 얼굴도 마주보지 않고 했다.

    그녀는 혹시 꿈을 꾼 것은 아닐까. 먼 이국이지만 고생스러워도 사랑하는 남편과 행복하게 살 것이란 꿈. 차라리 그 꿈이 이루어졌으면 좋으련만, 그녀의 주름진 얼굴과 흙때 가득한 손에서 이제는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살아가는 한숨 섞인 삶을 읽을 수 있었다.

    불쌍한 일본 여인. 그녀는 내가 머무는 2박3일 동안 한 번도 내 얼굴을 쳐다보지 않았다. 다음 날 새벽 그녀는 밭에 나갔고, 전날처럼 해가 져서야 돌아왔다. 그녀에게도 가족이 있을 텐데 이제는 돌아가고 싶어도 갈 수 없을 것이다. 분명 가족의 반대를 뿌리치고 네팔로 왔을 것이고, 돌아갈 용기가 생긴다 해도 엄청난 항공료가 그녀의 발목을 붙잡을 것이다.

    네팔의 많은 젊은이들이 외국 여인과의 결혼을 통해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어한다. 캐비의 아내가 그런 희생양이 아니길, 그리고 결혼 후 알고 보니 돈 없는 여인이라 천대받고 있는 것이 아니길 바랄 뿐이었다.

    이번 호를 끝으로 ‘여행자 편지’ 연재를 마칩니다.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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