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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루카市 ‘케밥 전쟁’

“외국 음식점 개업 금지” 황당 조례 제정 … 시민들 “같이 모여 케밥 먹자” 강력 반대

  • 로마=김경해 통신원 kyunghaekim@tiscali.it

이탈리아 루카市 ‘케밥 전쟁’

이탈리아 루카市 ‘케밥 전쟁’

중세 도시국가의 모습을 오롯이 간직한 루카시 중심부의 광장 카페에서 시민들이 점심을 먹고 있다.

이탈리아 루카시(市)는 요즘 ‘케밥(kebab) 전쟁’을 치르고 있다. 토스카나주(州) 루카시 당국이 시내 중심에 외국 음식점 개업을 금지하는 조례를 제정하면서 케밥 전쟁에 불씨를 당겼다. 케밥은 양고기나 쇠고기를 수직으로 돌아가는 꼬치에 끼워 즉석에서 구워가며 얇게 잘라 아랍 빵 안에 샐러드, 요구르트 소스 등과 넣어 먹는 아랍식 음식.

이탈리아 최초로 이런 황당한 조례를 제정한 루카시 당국이 내세운 이유는 중세도시 루카의 건축, 역사, 문화와 케밥 전문점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 루카시 당국자는 이 조례에 대해 “루카시의 문화 정체성을 보존하는 정책”이라며 “잘라 파는 조각 피자, 패스트푸드, 맥도날드도 금지 대상에 포함된다”고 밝혔다.

음식을 통한 인종차별주의

루카시는 르네상스 시대 도시국가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11세기 두오모 성당을 중심으로 르네상스 광장, 뾰족이 솟은 중세 건물과 탑이 어우러져 역사의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특히 성벽 안 중심부는 가장 보존이 잘된 중세도시의 사례로 손꼽힌다. 문제의 조례는 바로 이 성벽 안에서 앞으로 외국 음식점이 개업을 할 수 없도록 금지한 것이다. 금지 대상에는 케밥 전문점뿐만 아니라 중국 인도 등 모든 외국 음식점이 포함된다. 조례 제정 이전부터 영업을 해온 5개 케밥집만이 다행히 계속 영업을 할 수 있다.

이 소식은 현지 언론에 대서특필됐고, 미식가임을 자부하는 이탈리아인들에게서 큰 반감을 사고 있다. 무엇보다 음식을 통한 인종차별주의란 비난이 거세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유명한 요리사인 풀비오 피에르안젤리니는 일간지 ‘코리에레 델라 세라’와의 인터뷰에서 “외국 음식을 금지한다고 이탈리아 전통 음식을 보호하는 게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루카시 야당 정치인들은 음식차별주의는 다민족 사회에서 용납할 수 없는 결정이라고 반박한다. 토스카나 주정부 역시 케밥 금지령은 식문화의 극단주의이자 인종차별주의의 하나라고 비난했다.

실제 문제의 시 조례는 유럽 국가들이 중요시하는 다문화 정책에 역행하는 것이다. 로마, 파르마, 파도바 등 이탈리아 주요 도시 초등학교 급식에도 이미 한 달에 한 번 외국 음식 메뉴가 들어 있다. 다른 나라 학생들과 뒤섞여 수업을 받는 초등학교 학생들이 다른 국가의 문화에 자연스럽게 적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방안인 것. 학교에 들어가기 전 단계인 여섯 살짜리 아이들도 모로코의 쿠스쿠스(cous cous)와 중국식 볶음밥을 스파게티처럼 가리지 않고 잘 먹는다.

이탈리아 루카市 ‘케밥 전쟁’

루카시 당국이 조례를 제정, 시내 중심에서 판매를 금지한 아랍식 음식 ‘케밥’용 고기를 요리사가 자르고 있다.

루카시의 정책은 이런 아이들의 정서와도 동떨어진 것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시가 왜 이처럼 무리한 정책을 펴는 것일까?

역사적으로 루카시는 늘 독립된 도시국가였다. 1800년대 중반이 돼서야 토스카나 공국에 합병됐다. 이런 배경 때문인지 루카 시민들은 주체성이 강하고 전통에 대한 자부심이 높다. 또 이탈리아 공화국 출범 이후에도 같은 토스카나주의 시에나와 피렌체에 비해 정치적 보수 성향이 강하다.

가격 경쟁에서 유리한 외국 음식점이 들어서지 않는다고 루카 시내의 이탈리아 음식점들이 잘되는 것도 아니다. 조례는 이탈리아 음식점들에 대해서도 규제를 강화했다. 메뉴 중에 루카 지방 전통 메뉴가 적어도 하나는 포함돼야 하고, 그 메뉴는 루카에서 생산된 재료를 사용해야 한다는 까다로운 조건이 만들어졌다. 이 때문에 이탈리아 음식점 주방장들도 메뉴 선정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루카시의 이런 정책과 달리 케밥 전문점은 이탈리아 전국으로 확산되는 추세다. 맛도 있고, 3~4유로의 싼 가격이라 젊은이들 사이에 큰 인기를 얻고 있다. 피자와 케밥을 같이 파는, 현지화한 케밥집도 성업 중인데 학생, 직장인, 주머니 가벼운 관광객들에게 특히 인기다.

자이아 농림부 장관은 케밥 금지령에 대해 루카시 시장을 두둔하는 입장이다. 자이아 장관은 음식점들이 민족 고유의 음식에 이탈리아산 재료를 사용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불만을 갖고 있다. 풍부한 이탈리아 농산물 대신 굳이 중국산 재료를 수입해 쓰는 전국 1600여 개 중국 음식점도 그에게는 눈엣가시다.

케밥 전문점은 전국으로 확산

불법 이민자에 대해 강경한 대책을 주문하고, 특히 이슬람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북부연맹당은 한술 더 떠 “루카시의 조례를 다른 도시들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탈리아 도시 내에 이슬람 사원 건립을 적극 반대하는 북부연맹당이 이제 케밥까지 정치 도구로 악용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은 이유다.

최근 발표된 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해외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이탈리아어 1위가 ‘피자’, 공동 2위가 ‘스파게티’와 ‘카푸치노’다. 모두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음식 메뉴다. 피자는 독일부터 중국까지, 뉴질랜드부터 스웨덴까지 통역이 필요 없는 공통어다. 물론 이에 따른 자부심도 강하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세계 어디에도 이탈리아만큼 먹을거리가 좋은 나라는 없다”고 말한다.

루카의 젊은이들은 시 당국의 결정에 반대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일부 누리꾼 사이에서는 루카시 중심에 자리한 중세 광장인 성 미카엘레 광장에 모여 케밥을 먹자는 움직임도 일고 있다. 한 누리꾼은 ‘I LOVE KEBAB’이라고 쓴 티셔츠를 다 같이 입고 항의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한국의 쇠고기 촛불시위를 떠올리게 하는 케밥 집회가 열릴 분위기다.

내가 사는 도시에서 움직이지 않고 가장 빠르게 세계 일주를 하는 방법은 외국 음식 맛보기라는 이야기가 있다. 이 작은 재미마저 빼앗긴다면 너무 각박하지 않을까. 루카 시민들은 막무가내식 행정 때문에 다시 중세 도시국가의 성벽 안에 갇힐지도 모르겠다.



주간동아 2009.02.24 674호 (p64~65)

로마=김경해 통신원 kyunghaekim@tiscali.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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