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59

2008.11.04

달달한 인생

  • jockey@donga.com

    입력2008-10-27 09: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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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콤한 인생’이라는 한국 영화를 보고 주인공이 멋있다고 생각해 범행도구를 준비했다.”

    일명 ‘강남 논현동 고시원 흉기난동·방화사건’의 피의자 정모 씨가 경찰 조사에서 털어놨다는 진술의 일부입니다.

    회칼, 과도, 가스총, 권총 모양 라이터, 고글, 머리에 부착하는 소형 플래시, ‘킬러’를 연상케 하는 아래위 검은색 복장. 정씨가 자신을 살인극의 주역으로 ‘치장’하기 위해 마련한 물품 명세를 보노라면 그가 과연 서른 넘은 성인이 맞나 싶을 만큼 퇴행적이기까지 합니다.

    ‘달콤한 인생.’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으로 얼마 전 시체스 국제영화제 감독상과 하와이 국제영화제 매버릭상을 수상한 김지운 감독의 2005년도 개봉작이죠. 영화를 보신 분이라면 알겠지만, 특급호텔을 경영하는 조폭 보스와 그의 오른팔인 심복, 이 두 남성의 사랑을 동시에 받는 여성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하지만 스토리는 별반 기억에 남지 않습니다. 단지 주연배우 이병헌의 하드보일드한 액션 연기가 돋보였다는 기억만 흐릿하게 남아 있을 뿐입니다.

    인생이 달콤하기를 꿈꾸지 않는 사람도 있을까요? 그러나 현실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양자의 간극 속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수긍 혹은 체념하지만, 또 다른 이는 정씨처럼 사회에 대한 누적된 불만을 해소하고자 자신과 하등 상관없는 무고한 사람들을 제물로 삼기도 합니다.



    작금의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노라면 제2, 제3의 정씨가 언제 어디서 불쑥 튀어나올까봐 두렵습니다. 장기화되고 있는 경제위기, 줄어들 줄 모르는 실업자들, 끝 간 데 없는 사회 양극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불특정 다수를 겨냥한 우발적인 ‘묻지마 범죄’를 사전 차단할 대안 하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달콤한 인생은 차치하더라도 ‘묻지마 범죄’ 따위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달달한 인생 정도는 즐길 수 있는 사회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감옥에서 10년을 살아도 10억원을 벌 수 있다면 부패를 저지를 수 있다’는 청소년이 전체의 17%에 달한다니 현실은 여전히 암울합니다.

    어느 깊은 가을 밤, 잠에서 깨어난 제자가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스승이 기이하게 여겨 제자에게 물었다. “무서운 꿈을 꾸었느냐?” “아닙니다.” “슬픈 꿈을 꾸었느냐?” “아닙니다. 달콤한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리 슬피 우느냐?” 제자는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 꿈은 이뤄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달콤한 인생’의 엔딩 장면에 나오는 선문답입니다. 아무래도 정씨는 영화를 끝까지 보지 않았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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