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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억 달러 큰손 한국투자공사 세계 금융계에 명함 내밀다

美 거대 투자은행 메릴린치에 20억 달러 투자 “서브프라임 금융위기, 도약 기회” 야심만만

  • 고승철 동아일보 출판국 전문기자 cheer@donga.com

300억 달러 큰손 한국투자공사 세계 금융계에 명함 내밀다

300억 달러 큰손 한국투자공사 세계 금융계에 명함 내밀다

서울 중구 태평로 파이낸스센터 16층에 자리잡은 한국투자공사 입구.

‘한국투자공사(KIC)는 미국 거대 투자은행 메릴린치에 20억 달러의 전략적 투자를 결정했다. 메릴린치는 최근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로 자금난을 겪었다.’

1월15일 이 같은 내용의 기사가 국내외 언론에 긴급 뉴스로 실렸다. 메릴린치라면 골드만삭스와 쌍벽을 이루는 세계적인 투자은행 아닌가. ‘천하의 메릴린치’가 한국의 무명 금융회사에서 긴급자금을 공급받다니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외국의 국제금융 전문가들은 이 뉴스를 접하고 그렇게 여겼다.

우리나라에서의 반응을 보자. 전문가들이야 물론 2005년 7월 출범한 KIC의 존재를 안다. 그러나 일반인에겐 생소하다. 신문사에는 “어떤 기관인데 그런 거액을 투자했느냐”는 독자 문의가 잇따랐다. 그도 그럴 것이 KIC의 운용자금 규모, 투자 명세 등이 그동안 거의 베일에 가려 있었기 때문이다. KIC에 대한 국정감사도 큰 잡음 없이 넘어갔다. 국제 금융시장에서 돈을 굴리는 업무 특성상 국회도 KIC의 ‘속살’을 들춰보기 곤란했기 때문인 듯하다.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외환보유액 굴리려 2005년 설립

300억 달러 큰손 한국투자공사 세계 금융계에 명함 내밀다

한국투자공사 홍석주 사장(왼쪽)과 거대 투자은행 메릴린치 회장 겸 CEO인 존 테인.

외환위기 때 한국정부의 곳간엔 외화가 거의 바닥났다. 국가 부도가 걱정될 정도였다. 원유, 식량, 원자재 등을 제때 사오지 못하면 엄청난 혼란이 생길 터였다.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긴급 구제금융을 받아 부도 위기를 겨우 넘겼다.



외환위기에서 벗어나 수출이 호조를 보이면서 해마다 막대한 무역수지 흑자가 났으며, 이 흑자분은 외환보유액으로 차곡차곡 쌓였다. 한국의 외환보유액은 2000년 말 962억 달러에서 2004년 말 1991억 달러, 지난해 말 2662억 달러로 급증 추세를 보인다.

정부는 보유 외환과 공공기금을 효율적으로 굴리기 위해 2005년 3월 한국투자공사법을 공포하고 이를 근거로 해외 투자 전문기관 KIC를 설립했다. 초대 KIC 사장으로 이강원 전 외환은행장이 임명됐다. 그러나 이 사장이 외환은행 헐값 매각 의혹사건에 연루된 탓에 KIC는 출범 초기부터 난항을 겪었다.

도중하차한 이 사장의 뒤를 이어 홍석주 전 조흥은행장이 2대 사장으로 취임했다. 홍 사장은 서울대 경영학과, 미국 워튼스쿨 경영학 석사 등의 학력과 조흥은행 런던지점 근무, 기획재무본부장 등의 경력을 가진 국제금융 전문가다.

서울 중구 태평로 1가 파이낸스센터 빌딩 16층. KIC가 자리잡은 이곳은 절간처럼 조용하다. 외부 손님은 접견실로 안내되고 사무실 출입은 제한된다. KIC 임직원은 59명으로 소수정예의 단출한 조직이다.

납입자본금 1000억원 규모로 설립됐지만 초기엔 실전에 쓸 ‘실탄’이 없어 ‘훈련’만 거듭했다. 2006년 6월 마침내 한국은행에서 외환보유액 가운데 일부인 170억 달러를 받았다. “나랏돈을 안정적으로 굴려야 하니 주식보다 채권 쪽에 주로 투자하라”는 게 한국은행의 지침이었다. 곧이어 재정경제부(이하 재경부)에서도 30억달러를 받아 모두 200억 달러를 굴릴 수 있게 됐다. 재경부는 외국환평형기금에서 자금을 꺼냈다.

KIC는 지난해 말까지 148억 달러를 투자했다.채권 매입에 3분의 2가량을, 나머지는 주식 매입에 썼다. 올해 상반기까지 200억 달러 전액을 투자할 예정이다.

300억 달러 큰손 한국투자공사 세계 금융계에 명함 내밀다
권오규 경제부총리는 지난 연말 KIC에 대해 “2008년 중 100억 달러를 추가로 맡길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 돈을 받으면 KIC의 운용자금 규모는 300억 달러로 늘어난다. 이번에 메릴린치에 투자한 20억 달러는 정부가 추가로 낸 돈이다. 이런 거액을 한 회사에 투자하기까지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파문으로 심각한 자금난에 빠진 메릴린치는 한국의 몇몇 금융회사에 ‘SOS(긴급 조난신호)’를 쳤다. 메릴린치 쪽 협상 책임자는 한국계 미국인 넬슨 최. 뉴욕증권거래소(NYSE) 유로넥스트에서 최고재무책임자(CFO)를 지낸 그는 내로라하는 프로들이 군웅할거하는 월가에서도 알아주는 ‘타짜’급 전문가다. 넬슨 최는 NYSE 유로넥스트의 최고경영자(CEO), 골드만삭스 회장 등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는 존 테인의 오른팔 구실을 하는 인물. 지난해 12월 메릴린치가 위기에 빠지면서 존 테인은 회장 겸 CEO로 메릴린치에 영입됐는데, 이때 넬슨 최도 CFO로 합류했다.

넬슨 최에게서 제안을 받은 KIC의 운영위원회 위원 9명은 투자조건과 리스크 요인을 살피기 위해 난상토론을 벌였다. 당연직 위원 3명은 재경부 장관, 한국은행 총재, KIC 사장이다. 민간위원은 김인준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길재욱 한양대 디지털경영학부 교수, 신성환 홍익대 경영대 교수, 윤영원 삼성투신운용 고문, 송경순 한국전문가컨설팅그룹 대표, 김응조 법무법인 한결 대표변호사 등 6명이다. 이들은 1월14일 열린 회의에서 장고(長考)를 거듭한 끝에 날짜를 넘겨 새벽 2시쯤 “이번 투자제의를 잘 활용하면 국제 금융시장에서 도약할 수 있으므로 메릴린치에 투자하자”고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앞서 일부 경제전문가들은 미국 투자은행의 자금난 상황을 한국 금융계 발전의 발판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윤영각 삼정KPMG 대표는 한 조찬 세미나에서 “서브프라임 사태 때문에 자금난에 시달리는 메릴린치, 씨티그룹, 모건스탠리 등 유력 금융회사들에 투자할 때가 왔다”면서 “이는 100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기회”라고 말했다. 싱가포르 중국 중동의 국부펀드가 헐값에 이들 금융회사의 지분을 사들인다는 것이다. 김병주 서강대 명예교수도 ‘한국경제신문’ 칼럼(2007년 12월27일자)에서 “세계 각국이 국부펀드를 키우기 위해 경쟁하는데 한국투자공사는 왜 잠자고 있어야 하나”라고 질타했다.

KIC가 이번에 인수하는 의무전환 우선주(Mandatory Convertible Preferred Stock)는 연 9%의 배당을 받는 조건이며, 2년9개월 뒤 보통주로 전환된다. 보통주로 바뀌면 KIC는 메릴린치 지분 3%(현재 기준)를 보유하는 셈이어서 5대 주주로 부상한다. 현재 1대 주주는 싱가포르 국영기업들의 지주회사 테마섹 홀딩스로 9.6%의 지분을 가졌다. 테마섹은 지난해 말 44억 달러를 메릴린치에 쏟아부었다.

2010년 가을이면 메릴린치 지분 3% 보유해 5대 주주로 부상

테마섹과 싱가포르투자청(GIC)은 외국의 금융위기를 오히려 기회로 활용하는 기관으로 정평이 나 있다. 이들 양대 투자기관은 한국에서도 외환위기 직후에 파이낸스빌딩, 스타타워빌딩, 아시아나빌딩 등을 사들여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 테마섹은 지난 32년간 연평균 18%라는 놀라운 수익률을 올렸다.

연 9% 배당에 대해 박제용 KIC 상무는 “매우 좋은 조건이며 이번 투자 참여는 메릴린치의 풍부한 투자금융 노하우를 배우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금융계에서는 KIC의 메릴린치 지분 참여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분위기다. 투자은행(IB) 업무에서 30년간 경험을 쌓은 윤만호 산업은행 경영전략부장은 “한국 금융산업은 제조업에 비해 상당히 낙후됐는데 IB 업무를 앞장세워 해외시장에 진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남우 메릴린치증권 서울지점 리서치부문 대표는 ‘매경이코노미’ 칼럼(2008년 1월 9일자)에서 “세계 유수 투자은행들이 향후 수년간 핵심사업으로 꼽는 분야가 글로벌 인수합병(M·A)”이라고 전제하면서 “글로벌 M·A 게임에서 탈락 위기에 놓인 한국도 새 정권 출범을 계기로 국가 위상도 높이고 국내 기업들이 한 차례 다시 도약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번 투자가 성공을 거둘지는 미지수다. 2년9개월 뒤 메릴린치 주가가 61달러 이상이면 KIC에 유리, 52달러 미만이면 불리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 중간이면 양쪽 손익이 엇비슷하다.

현행 연봉 수준으로 국제적 고급 인력 초빙 어려워

현재로서는 이번 투자에 대한 호평으로 KIC 내부는 고무된 분위기다. 홍 사장은 스위스에서 열린 다보스 포럼에 참석해 국제 금융계 거물들과 만나 KIC의 역할에 대해 논의했다. KIC는 현행 연봉 수준으로는 국제적인 고급 인력을 끌어들이기 어려워 고심하고 있다. 현재 외국인 핵심 전문가로는 말레이시아계 구안 옹 부사장이 있다. KIC는 직원들의 자질 향상을 위해 해외 투자전문가들을 초청해 매월 세미나를 연다. 최근 열린 세미나를 주재하기 위해 조셉 배라는 30대 한국계 금융인이 전용기를 타고 와 부러움의 대상이 된 바 있다.

KIC는 “안정적인 운용을 강조하는 투자 지침을 완화해달라”고 정부에 요구하고 있다. 선진국 국부펀드보다 수익률이 낮은 게 바로 이런 족쇄 때문이라는 것.

그러나 KIC 일각에선 “아직 우리 목소리를 높일 때가 아니다”라는 자제론도 나온다. 노무현 정부가 2003년 12월 동북아시아 금융 허브 구축을 위한 7대 과제를 제시하면서 그 핵심 수단의 하나로 KIC를 설립한 만큼 다소 정치적 성격을 띠고 있으므로 정권 교체기엔 몸을 낮춰야 한다는 논리에서다.

300억 달러 큰손 한국투자공사 세계 금융계에 명함 내밀다
메릴린치는 어떤 회사?

1914년 증권회사로 출발 2000년대 초까지 승승장구


300억 달러 큰손 한국투자공사 세계 금융계에 명함 내밀다

미국 투자은행 메릴린치.

1914년 주식 투자자 찰스 메릴과 당대 최고 채권 투자자 에드먼드 린치가 함께 세운 증권회사다. 1928년 대공황을 예언하면서 주식 매도를 촉구해 신뢰를 얻었다. 1930년 투자은행으로 전문화를 꾀했고, 최초로 리서치 부문을 창설해 과학적 기법으로 매수 종목을 분석했다. 미국 증권회사로는 처음으로 재무제표를 공개해 투명 경영에 앞장서기도 했다. 1950~60년대 미국에서 가장 신뢰받는 증권사로 꼽혔다.

그 후 런던 도쿄에 지점을 설립하는 등 글로벌화에 앞장섰고, 2000년대 초까지 승승장구했다. 2002년엔 투자한 종목을 띄운 행위가 드러나 벌금 1억 달러를 물었으며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직격탄을 맞았다. 2007년 4분기 순손실은 98억 달러. 전문가 예상치보다 2.4배나 되는 규모였다. 모기지 채권을 가장 많이 사들인 결과다.


▼ 메릴린치 대주주 (2007년 12월 말 기준)
순위 주주 이름 주식 수(백만) 지분율(%)
1 테마섹 홀딩스 91.7 9.6
2 스테이트 스트리트 글로벌 어드바이저스 77.6 9.1
3 알리안스번스타인 62.1 7.2
4 바클레이즈 글로벌 인베스터스 32.9 4.5
5 데이비스 실렉티드 어드바이저스 25.0 2.9
6 뱅가드 그룹 24.5 2.8
7 클리어브리지 어드바이저스 23.9 2.8
※자료 : 메릴린치 홈페이지 www.ml.com




주간동아 2008.02.05 622호 (p22~25)

고승철 동아일보 출판국 전문기자 che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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