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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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마피아 “부산의 밤은 내 손안에”

총기·마약 등 각종 밀수품 시장에 풀어 … 수산업·무용수 공급 등 각종 이권에도 개입

  • 부산=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입력2006-05-17 17: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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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 마피아 “부산의 밤은 내 손안에”
    영화 ‘사생결단’의 ‘또 다른 주인공’은 부산이다. ‘물(마약)’을 관리하는 이상도(류승범 분)와 도경장(황정민 분)은 부산의 뒷골목에서 추악한 욕망을 거래한다. 영화를 관통하는 부산의 야경은 이들의 욕망만큼이나 휘청거린다.

    이 영화를 연출한 최호 감독은 치밀한 사전 취재로 스크린에 느와르와 르포를 엮어 풀어냈다. 연산동, 초량텍사스, 온천장…. 다큐멘터리가 오히려 어울릴 법한 영화 속 거리는 히로뽕이 부산을 강타한 1998년을 묘사한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난 2006년, 부산 중구 초량동(초량텍사스)은 밀수, 마약, 총기 매매 등을 일삼는 러시아 마피아의 안마당이 됐다. 이들에 의한 국제범죄가 늘면서 수사당국도 골머리를 앓고 있다.

    마피아 조직 간 암투 치열

    해양경찰청은 부산에서 테마기획 수사를 벌이고 있다. 부산해양경찰서는 6월30일까지 국제 성(性) 범죄를 비롯해 총기류 밀반입 및 여권 위·변조, 수입수산물 원산지 허위표시, 가짜담배와 면세담배 불법유통, 밀입국, 밀수, 마약을 집중 단속한다.



    5월5일 오후 4시 초량텍사스. 험악한 인상의 러시아인들이 삼삼오오 오간다. 러시아제 총기가 200~600달러에 거래되는 것으로 알려진 곳이다. 상인들은 “권총은 물론 마약도 손쉽게 구할 수 있다”고 귀띔했다.

    유흥업소 종업원들이 러시아 선원이나 마피아로부터 대마초를 얻어 피운다는 사실도 공공연한 비밀이다. 초량텍사스와 국제시장(중구 광복동) 주변에선 건초 형태의 대마초도 구할 수 있다고 한다.

    초량텍사스에서 활동하는 러시아 무용수는 500여 명. 텍사스촌 유흥업소의 일부는 마피아가 직접 경영하고 있다고 한다. 이곳을 비롯해 전국 나이트클럽 무용수들을 마피아가 국내 폭력조직을 통해 공급한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극동지역 마피아들의 주업은 ‘생선 장사’와 ‘여자 장사’다.

    국가정보원에 따르면 극동지역 수산물 시장을 장악한 이들은 부산, 동해 등 국내 항구 도시를 중심으로 거점 확보에 나서고 있다. 220개 극동지역 마피아 중 20개 조직이 국내에 수산 관련 업체를 세웠으며, 부산에서만 20여 개의 러시아 조직이 1000억원이 넘는 이권을 놓고 암투를 벌이고 있다는 것.

    야쿠트파가 내국인과 합작으로 세운 수산업체의 사장은 부산의 폭력조직인 칠성파 핵심 조직원의 친형인 것으로 국정원은 파악하고 있다. 냉동창고 운영, 수산물 수입업은 부산에 터를 잡은 국내 폭력조직들의 주요 자금줄이었다. 따라서 ‘수산물 이권’을 매개로 국내 주먹들이 러시아 마피아와 자연스럽게 연결될 만한 조건이 갖춰진 셈이다.

    총기 밀매는 야쿠트파 같은 큰 조직이 아니라 수산업 이권에서 밀려난 소규모 마피아 조직의 몫이라고 한다. 극동 마피아의 대표선수 격인 ‘목재 마피아’와 ‘수산 마피아’는 푼돈 장사를 할 만큼 한가하지 않다는 것.

    부산의 정보원에게서 권총을 살 수 있는 것으로 알려진 오퍼상 두 곳을 소개받았다. 러시아산 권총뿐 아니라 불가리아산 나무총과 플라스틱총도 유통되고 있다는 게 이 정보원의 주장이다.

    러시아 마피아 “부산의 밤은 내 손안에”

    마약밀매 혐의로 수사당국에 적발된 러시아인 B 씨.

    “권총을 사고 싶은데요.”

    단속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어수룩하게 보인 탓일까? 국제시장 인근의 K상사에서 총을 사고 싶다고 하자 ‘애들은 가라’는 표정의 웃음이 돌아왔다. 다른 곳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공기총을 거간한다는 심부름센터는 문을 닫아놓고 있었다.

    불법 총기는 마약과 비슷한 방법으로 유입된다고 한다. 공해상에서 한국 어선에 옮겨 실은 뒤 들여오거나 외국 어선의 대형 컨테이너에 숨겨 반입하는 형태다. 밀수품도 마찬가지다.

    러시아 마피아가 주도한 마약 밀매는 그동안 심심찮게 적발돼왔다. 마피아들이 국내 폭력조직과 연계, 한국을 마약 판매처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부산 시내에서 공공연히 대마초를 피우거나 팔기도 한다.

    5월6일 오후 부산 국제시장은 북새통을 이뤘다. 황금연휴를 맞아 부산을 찾은 일본인도 많았다. 수사당국의 집중단속 기간임에도 국제시장은 밀수품의 천국이었다. 시중보다 저렴한 가격에 고급 양주를 판매하는 상점이 성업 중이었고, 유명 브랜드의 모조품도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가짜 혹은 면세담배도 시장 곳곳에서 유통됐다. 마일드세븐 등 외국 브랜드 담배는 2만원(1보루), 국산 담배 심플은 1만8000원(1보루)이면 살 수 있으니 잘 팔리는 것은 당연하다.

    “면세담배는 대부분 러시아에서 들어온 것이다. 러시아 건달이나 선원들이 담배로 돈을 번다. 가짜담배는 없다.”(국제시장의 한 상인)

    부산항을 통해 들어온 이들 불법담배도 러시아 마피아와 관련돼 있다. 부산 지역 항만과 수리조선소 등에는 하루 평균 70∼80척의 러시아 선박이 정박하고 있는데, 수산물을 싣고 러시아를 오가는 화물선 지분의 20~30%는 이들 마피아가 쥐고 있다. 러시아 극동지역의 수산물 유통 회사의 상당수도 마피아 소유다. 블라디보스토크 항은 위조담배의 전 세계적 핵심 유통 경로인데, 이들 항구를 장악하고 있는 것도 마피아다.

    2003년엔 마피아 보스 저격당하기도

    러시아 마피아의 존재가 일반에게 알려진 것은 2003년 4월 마피아 보스 나우모프가 부산에서 권총에 저격당해 사망하면서다. 나우모프는 칠성파 조직원의 친형과 회사를 세운 야쿠트파의 두목이었다. 국정원에 따르면 야쿠트파는 나우모프 사망 후 러시아인 C 씨가 부산의 보스 자리를 차지해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현재 부산에서 가장 파워 있는 마피아 조직은 마가파라고 한다. 마가파는 야쿠트파를 배신하고 떨어져나온 키티노프가 세운 조직으로, 현재 야쿠트파와 세력 다툼을 벌이고 있다. 국정원이 지난해 마가파 두목인 키티노프의 입국을 불허하는 조처를 해 키티노프는 부산에 들어오지 못하고 있다.

    어선과 무역선을 수십 척씩 보유하고 있는 이들은 어선이 잡은 수산물을 러시아에서의 통관 절차 없이(통관증을 위조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해상에서 무역선에 실은 뒤 곧바로 부산항으로 들여오고 있다고 한다. 자갈치시장(중구 남포동, 서구 충무동)에서 팔리는 러시아산 수산물도 이렇게 유통돼 식탁에 오르는 것이다.

    ‘사생결단’의 묘사만큼이나 불법이 판치는 부산의 중심엔 이렇듯 러시아 마피아가 있다. 마피아가 부산의 밤을 조금씩 점령해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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