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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杜門不出’두문동 72賢을 찾아서⑭|안동 권씨와 권정

600년 한결같은 후대의 칭송

벼슬 버리고 낙향해 자나 깨나 ‘고려 회복’ 생각 … 후손들 ‘대’와 ‘정자’ 세우고 뜻 기려

  • 허시명/ 여행작가 www.travelwriters.co.kr

600년 한결같은 후대의 칭송

600년 한결같은 후대의 칭송

영주시 구성산 암벽에 새겨진 권정을 기리는 각자(刻字)들.

“조상은 후손을 낳고, 후손은 조상을 만든다.”

고려 말 불사이군 충신들의 발자취를 찾아다니면서 실감하는 말이다.

경북 영주시에 갔을 때다. 영주시 한복판 구성공원이 된 구성산 자락에, 조선 제일의 개국공신 정도전의 집터가 있다. 판서(判書)가 3명이나 났다 하여 삼판서 구택터로 알려진 영주2동 431번지다. 예전에 늘씬한 한옥이 자리했다는데 지금은 양옥이 들어서 옛 자취를 찾을 길이 없다. 이성계와 조선의 지분을 반분해도 좋을 혁명가지만, 그가 살았던 옛터에 팻말 하나 없으니 쓸쓸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지금에 이르러 보자면, 구성산의 주인은 정도전이 아니라 그와 동시대에 살면서 정반대의 길을 걸었던 권정(權定, 1353~1411)이다. 삼판서 구택터에서 구성산 굽이를 돌아들면 권정을 기리는 봉송대(奉松臺)가 있다. 그 벼랑 밑에 권정의 신도비가 있는데, 신도비 안쪽에 권정의 정신을 기린 ‘不事二君(불사이군)’의 각자(刻字)가 있다. 그곳에서 구성산을 오르면 권정을 배향했던 구호서원(鷗湖書院) 터와, 역시 그를 기리는 반구정(伴鷗亭)이 나온다. 삼판서 구택터에서 반구정까지 400m도 안 되니 아주 가까운 거리다.

이쯤 되면 정도전을 압도하는 권정이 누굴까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권정은 안동 사람이다. 그가 살던 동네가 안동시 예안면 기사리(棄仕里)다. 버릴 기(棄)에 벼슬 사(仕)자를 써서 ‘벼슬을 버린 동네’인데, 권정이 벼슬을 버리고 살았대서 붙여진 600년 된 이름이다.



호 ‘사복재’는 고려를 돌이켜 생각한다는 뜻

권정은 고려 개국공신으로 안동의 태사묘에 배향된 안동 권씨 시조 권행(權幸)의 14세손이다. 그는 지금은 안동댐에 잠긴 안동시 예안면 북계촌에서 태어났다. 야은 길재(吉再)와 동갑인데, 문과 급제도 우왕 12년(1386)에 길재와 함께 했다. 충청도 괴산의 지군사(知郡事)를 역임하고, 내직에 들어 좌사간(左司諫, 중서문하성의 정육품직)을 지냈다. 임금께 올린 보고가 임금의 뜻을 거슬러 외직인 김해부사로 옮겨 앉게 됐다. 김해부사로 있을 때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 땅인 안동부 임하현 옥산동 도목촌 북쪽의 지실어촌(只失於村)에 은거했다. 태조 이성계가 승지 벼슬을 내려 그를 불렀고, 태종 이방원이 대사간과 대사헌을 내려 그를 불렀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호를 사복재(思復齋)라 했는데 이는 고려를 돌이켜 생각한다는 뜻이고, 집 앞에 정자를 지어 반구정이라 했는데 이는 옛날로 돌아간다는 반구(返舊)를 차음한 것이다. 또한 대를 지어 봉송대라 했는데 이는 송도(개성)를 받든다는 봉송(奉松)을 차음한 것이다. 자신의 호부터 머문 공간까지 죄다 고려 왕조를 받들고 회복하려는 의지로 가득 채운 것이다. 그가 죽은 뒤 촌로들이 마을 이름을 ‘지실어촌’에서 ‘기사리’로 바꾼 것도 자연스런 호응으로 여겨진다.

그의 묘는 기사리에서 멀지 않은 도목촌 옥산 자락에 있다. 그는 아들 넷과 딸 둘을 두었는데, 아들들이 뿔뿔이 흩어져 살면서 오래도록 그의 행적은 물론이고 묘조차 잊혀졌다. 후손들은 그가 죽은 지 194년이 지난 뒤인 1605년에야 비문(碑文)을 찾고, 1785년에 깨진 비석을 찾아 비로소 그의 묘와 행적을 회복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권정의 사위인 우홍균(禹洪鈞)의 ‘유사(遺事)’라는 글도 발견됐다. 우씨 집안에 보관되어온 글인데, 우홍균은 장인 권정에 대해 “고려조에서 직간(直諫)하던 고결한 절의의 선비였으며, 명리(明理)의 학문에 뛰어났다”고 기록했다.

600년 한결같은 후대의 칭송

구성산 거북머리 위에 세워진 봉송대. 봉송대 뒤편으로 구성산과 기와 건물 반구정이 보인다. 안동시 예안면 기사리에 있는 권정의 유허비.(왼쪽부터)

현재 기사리에는 권정의 유허비가 있다. 안동댐이 들어서면서 500m가량 마을 위쪽으로 옮겨진 상태다. 유허비 뒤쪽의 바위에는 ‘忠節(충절)’ ‘奉松(봉송)’ ‘返舊(반구)’ ‘淸風高節(청풍고절)’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제 더는 조상의 유적을 잃어버리지 않고, 조상의 정신을 잊지 않겠다는 후손의 다짐처럼 보인다.

기사리는 예안면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5리쯤 떨어져 있는데, 예안면 소재지가 내려다보이는 서쪽 산자락에는 역동(易東) 우탁(禹卓)의 묘소가 있다. 고려 충선왕 때 왕이 옳지 않은 행동을 하자 도끼를 들고 대궐로 들어가 상소했던 인물이다. 상소를 들어주든지, 들어줄 수 없다면 도끼로 자신의 목을 치라는 뜻이었다. 우탁이 벼슬을 버리고 은거했던 곳이 바로 안동 예안현(지금은 수몰된 안동시 와룡면 선양동)이다. 권정이 태어난 북계촌의 다른 이름이 역동 선생의 호를 빌려 쓴 ‘역동(易洞)’이었고, 권정의 사위인 우홍균이 우탁의 고손자였던 점으로 보아, 권정이 우탁의 지조와 결기를 염두에 두고 살았으리라 추정해볼 수 있다.

권정 살던 기사리에 ‘유허비’ 남아

그런데 권정이 세웠다는 반구정과 봉송대가 안동 예안면에서 자취를 감추고 영주 시내 한복판에 자리 잡게 된 것은 어떤 경위일까? 권정의 네 아들은 출사(出仕)는 했지만, 순탄하게 살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큰아들 조(照)는 문과에 급제해 사재감정(司宰監正)을 지냈지만 말년의 행적을 알 수 없고, 후손조차 끊어졌다. 넷째 아들 시(時)도 후손이 끊겨 자세한 행적을 알 수 없다. 셋째 아들 서(曙)는 울산부사를 지냈고 그 후손들이 성주에 많이 모여 산다. 둘째 아들 요(曜)는 보령현감을 지냈는데 어떤 연유인지 관직을 버리고 처가 동네인 영주에 들어가 살았다. 영주 구성산 주변에 모여 살며 권정의 공간을 마련한 이들이 바로 권요(權曜)의 후손들이다.

구성산의 반구정은 영주에 들어간 권정의 후손들이 번창해 ‘이 땅은 선생이 사시던 곳은 아니지만 기맥(氣)이 모인 곳이니 혼령이 오르내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여기면서 1780년에 마련한 것이다. 거북처럼 생긴 구성산의 거북머리 위에 봉송대가 세워진 것은 훨씬 뒤인 1948년의 일이다.

1958년 영주에 큰 홍수가 나기 전까지 봉송대와 반구정 밑은 죽계천이 휘감아돌아 호수를 이루고, 물새들이 날아다니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영주의 옛 사진을 보니 강가에 우뚝 선 봉송대의 자태가 자못 멋들어졌다. 하지만 홍수가 난 뒤로 물길을 직선으로 뽑아낸 통에 호수 자리에 철길이 놓이고 민가가 들어서 옛 정취는 찾을 길이 없게 됐다.

풍광은 달라졌지만 권정을 사모하고 기리는 후손들의 정신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 두터워지는 것 같다. 구성산 바위에 새겨진 ‘不事二君’의 각자가 어제 새긴 듯 선명하다. 권정은 한때 후손들조차 그 행적을 잊을 정도였으니 두문동 72현을 헤아릴 때에 거론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다시 두문동 72현을 꼽는다면 기사리로 명명된 마을에서 사복재로 호를 짓고, 반구정과 봉송대를 세워 고려를 회복하려 했던 권정의 이름을 뺄 수는 없을 것이다.

알 림

*다음 호에는 ‘경주 김씨와 김자수’에 관한 글이 실립니다.
*두문동 72현에 얽힌 얘기를 간직하고 있는 문중과 후손들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휴대전화 016-341-5045, e메일 twojobs@empal. com




주간동아 2006.01.24 520호 (p90~91)

허시명/ 여행작가 www.travelwriter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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