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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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방서 소란 피우다 쫓겨날 판

영국 ‘신사의 나라’ 복원 ‘존경 행동 계획’ 추진 … 공권력 동원 개인 행동 규제 논란

  • 이진/ 동아일보 국제부 기자 leej@donga.com

    입력2006-01-18 16: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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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방서 소란 피우다 쫓겨날 판

    토니 블레어 총리는 ‘존경 행동 계획’을 발표한 직후 한 마을회관 벽에 새겨진 낙서를 직접 지우기도 했다.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가 ‘존경(respect)’의 가치를 복원하겠다며 칼을 빼들었다. ‘신사의 나라’에서 ‘훌리건의 나라’로 굴러떨어진 영국의 자존심을 되찾겠다는 의지다. 블레어 총리는 1월10일 총리관저에서 ‘존경 행동 계획(Respect Action Plan)’을 집권 3기의 과제로 제시했다. 40쪽 분량의 ‘존경 행동 계획’은 △경찰의 권한 강화 △비행 청소년, 문제 부모 재교육 △공동체 부담 확대 △청소년 건전 놀이문화 육성 등 크게 4개 분야로 구성돼 있다. 핵심은 영국 사회에 존경심을 되살리기 위해 ‘강제력’을 사용하겠다는 것이다.

    ‘존경 행동 계획’은 먼저 당국, 경찰의 개입 강도를 높였다. 이웃 주민들에게 방해가 될 정도로 소란을 피우는 주택이나 술집을 폐쇄하도록 했다. 난장판을 피우면 이젠 자기 집에서도 쫓겨날 판이다. ‘내 집에서 내 맘대로 행동하는데 무슨 상관이냐’는 항변은 더 이상 먹히지 않게 됐다. 퇴거 기간은 최장 3개월. 만취한 상태에서 고성방가 등 반(反)사회적 행동에 물리는 세금도 80파운드(약 14만원)에서 100파운드(약 18만원)로 올렸다.

    비행 청소년과 이를 방치한 문제 부모들은 강제로 재교육을 받아야 한다. 자녀의 잘못은 부모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결과이기 때문. 새로 세워질 ‘국립 훈육학교’는 비행 청소년과 문제 부모의 재교육을 맡는다. 또 2010년까지 전국에 청소년센터 3500곳을 설립, 가정문제 해결을 지원토록 했다. 그래도 부모들이 자녀의 비행을 방치하면 학교나 지역사회가 법원으로부터 ‘부모 역할 명령’을 발부받아 이행토록 했다. 그럼에도 부모가 ‘모르쇠’한다면? 벌금을 물리거나 제공되던 주거 관련 혜택이 중단된다.

    비행 청소년 부모도 재교육

    이밖에 ‘동네 경찰’의 수를 현재 6000명에서 2만4000명으로 크게 늘리고, 지역공동체가 비행 청소년 문제를 스스로 처리하기 위한 헌장이나 협약을 체결하도록 했다. 13~16세 청소년에게는 ‘활동 카드’를 발급해 건전한 야외활동에 재정지원 혜택을 준다.



    블레어 총리는 ‘존경 행동 계획’을 발표하면서 현재의 영국 사회와 자신의 부친과 조부 시절의 영국을 비교했다. 과거에는 지역사회 어른들이 청소년을 이끌고 타일렀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젠 국가라도 나서 ‘어른 역할’에 앞장서겠다는 취지다. 그는 발표 직후 영국 남중부 도시인 스위든의 마을회관에 가서 벽에 새겨진 낙서를 직접 지웠다.

    국가 공권력이 개개인의 행동까지 규율하겠다고 나서는 것에 반대가 없을 리 없다. 영국 일각에서 강제력을 동원한 공동체정신 회복 발상에 비판적인 의견이 나오고 있다. 야권도 블레어 총리의 조치를 ‘판에 박힌 단선적 대중주의’라고 평가절하했다.

    블레어 총리의 ‘존경 행동 계획’은 한국의 ‘학교폭력 추방 캠페인’을 비롯한 청소년 관련 정부 조치를 연상시킨다. 일제단속 식의 청소년 대책은 효과 역시 한시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동안의 경험이었다. 그렇다고 우리 정부가 영국처럼 시민생활의 광범위한 영역에 공권력 개입을 넓히는 계획을 내놓는다면 환영받을 수 있을까?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한국의 경우 정부가 앞장서 과거 국가권력의 남용을 바로잡겠다고 나서는 상황에 ‘바른 시민 육성하기’와 같은 식의 정책이 설 땅은 없을 것이다.

    영국은 유서 깊은 선진 민주주의국가인 반면, 한국은 민주주의 경험이 10년 안팎인 신생 민주국가라는 차이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수백 년간 민주주의를 운영해온 영국은 민주주의의 골간인 공동체적 가치의 훼손을 막기 위해 공권력이 나섰다. 반면 한국 사회는 국가인권위원회가 쏟아내는 인권개선안에서 볼 수 있듯, 갖가지 마찰음을 내면서도 민주주의의 원론적 가치 추구에 열심이다. 한국과 영국, 두 나라 민주주의의 성숙도는 아직 격차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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