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19

2006.01.17

영국 국왕 찰스일까 조지일까

‘찰스 왕세자 즉위 시 개명’ 언론 보도 … 카밀라와 재혼, 왕위 계승 여부 불투명

  • 코벤트리=성기영/ 전 동아일보 기자 sung.kiyoung@gmail.com

    입력2006-01-11 15: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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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 국왕 찰스일까 조지일까

    찰스 왕세자가 자신의 이름에 불만을 가진 이유는 ‘찰스’라는 이름을 가진 역대 국왕들이 불행한 종말을 맞았기 때문이다.

    차기 영국 국왕은 ‘찰스’가 될 것인가, ‘조지’가 될 것인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건재한 상황에서 무슨 소리냐 할지 모르겠지만, 최근 찰스 왕세자의 개명(改名)을 둘러싼 논란이 영국 언론에 등장하면서 ‘엘리자베스 이후’에 대한 관심사가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문제의 발단은 영국의 유력 일간지 ‘타임스’가 찰스 왕세자가 영국 왕위를 계승할 경우 즉위명을 ‘찰스’가 아닌 ‘조지 7세’로 바꾸는 방안을 심각하게 검토하고 있다고 보도하면서부터다.

    ‘타임스’는 왕세자의 몇몇 측근들의 말을 인용해 이 같은 사실을 보도하면서 “왕세자가 자신의 이름에 불만을 갖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찰스’라는 이름을 가졌던 역대 국왕들이 하나같이 불행한 종말을 맞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현재 찰스 왕세자의 이름은 찰스 필립 아서 조지(Charles Phillip Arthur George)다.

    ‘찰스’와 악연 많은 영국 왕실

    실제로 영국 왕실 역사를 돌이켜보면 공교롭다고 할 만큼 ‘찰스’라는 이름과 악연이 많다. 우선 청교도혁명 세력에 의해 희생당한 찰스 1세는 어려서부터 수줍음을 잘 타는 내성적 성격에다 병약했던 것으로 유명했다. 심지어 그는 스코틀랜드 왕이었던 아버지 제임스 6세가 영국 왕에 즉위했는데도 장거리 여행을 하지 못해 잉글랜드행을 포기할 정도로 유년기 건강이 좋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재임 기간에는 의회와 끊임없이 대립하다가 결국 17세기 들어 올리버 크롬웰이 주도한 청교도혁명의 결과로 교수형에 처해지는 운명을 맞았다. 찰스 1세는 영국 왕실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국왕이었다.

    짧은 공화정이 끝나고 왕정복고에 성공한 찰스 2세는 18년간의 해외 유배 생활 끝에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그의 재임 기간도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젊은 시절 청교도혁명과 부왕의 처형을 지켜보면서 자란 찰스 2세 역시 가톨릭 전제정치를 통해 의회를 장악하고자 했으나 의회가 심사율과 인신보호법 제정 등으로 맞서면서 갈등은 점점 심화됐고, 이런 갈등은 훗날 명예혁명의 원인이 되었다.



    게다가 그의 여성 스캔들도 발목을 잡은 요인이었다. 혁명기 청교도 문화에 대한 반발로 그의 재임 기간 중에는 프랑스풍의 최고급 귀족 문화가 상류사회에 풍미했고, 찰스 2세 역시 세계적 여배우였던 넬 그윈과의 염문으로 국왕의 권위에 상처를 입기도 했다.

    이쯤 되면 다이애나비의 사고와 카밀라와의 재혼으로 영국인들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아온 찰스 왕세자가 왕위 계승 이후 이미지 변신을 위해 개명을 검토하는 것이 무리는 아니라는 동정론이 나올 법하다.

    그러나 영국 왕실 측은 찰스 왕세자의 왕위 계승 문제는 장기적 검토사항일 뿐 즉위명 변경을 공식적으로 논의한 적은 전혀 없다며 ‘개명설’을 즉각 부인했다. ‘타임스’의 보도에 대해서도 ‘추측에 불과하다’고 일축하면서 더 이상의 논란 확산을 원치 않는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물론 찰스 왕세자가 즉위명을 변경하기 위해 의회나 총리의 동의를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찌 보면 즉위명 변경은 이보다 더 엄격한 통과의례를 거쳐야 한다. 새로 왕위에 오르는 국왕의 즉위명은 추밀원 전체회의에서 결정되기 때문. 추밀원은 18세기까지만 해도 영국 행정의 최고 권력기관 구실을 해오던 최고 의사결정 기구다. 지금은 상징적 기능만을 갖고 있지만 국왕 교체와 즉위 등 왕실의 중요 현안이 있을 때만큼은 아직도 전체회의를 열어 공식 결정을 내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왕실 계보를 연구해온 학자들은 과거에도 평소 사용해오던 세례명과 즉위명이 서로 달랐던 경우가 있었다는 점을 들어 찰스 왕세자의 개명 역시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지적했다.

    찰스 왕세자 역시 조지라는 이름에 상당한 애정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 그의 외할아버지였던 조지 6세는 영국 국민들과 함께 제2차 세계대전을 치러낸 왕으로 아직도 국민들 사이에 신망을 얻고 있으며, 그의 부인인 여왕 모후(현 엘리자베스 2세의 어머니) 역시 전쟁 중 ‘공주들만이라도 피신을 시키라’는 주변의 권유를 단호히 물리치고 런던을 지키며 전쟁을 독려해 국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선대 조지 국왕들에 대해 공개적 호감 표시

    또 찰스 왕세자는 ‘조지’라는 이름을 가진 선대 국왕들에 대해 공개적으로 호감을 표시한 적도 있다. 그는 1994년 BBC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 출연해 미국의 독립혁명 당시 영국 국왕이었던 조지 3세를 적극 변호하고 나서 눈길을 끌었다. 조지 3세는 그동안 영국을 해양대국으로 발전시킨 공로에도 ‘북아메리카를 잃어버린 왕’이라는 평가와 함께 이따금 나타났던 정신착란 증세 때문에 영국인들에게는 그다지 좋지 않은 평가를 받아왔다. 그의 정신착란 증세를 둘러싸고는 ‘조지왕의 광기(The Madness of King George)’라는 영화가 만들어졌을 정도. 독성학자들은 그의 증세가 비소 중독 때문이라는 연구 결과를 내놓기까지 했다.

    그러나 찰스 왕세자는 조지 3세가 예술과 과학에 일가견이 있었고 농업과 점성술에도 능했다는 점을 강조하며 역사가들의 일방적 평가에 섭섭함을 드러냈다. 그는 “만약 조지 3세가 대서양을 건너 북아메리카를 방문할 수 있었다면 식민지의 북아메리카 독립혁명 세력을 설득할 수 있었을 것”이라며 북아메리카 독립에 대한 ‘조지 3세 책임론’에 불만을 드러냈다.

    사실 영국에서 왕실 내 호칭을 둘러싼 왕실의 자존심 세우기는 이번뿐이 아니다. 세계적 관심을 모은 찰스 왕세자와 그의 35년 연인 카밀라와의 결혼이 발표됐을 때도 왕실 측은 카밀라에게 왕세자비(The Princess of Wales)라는 공식 직함을 제쳐두고 ‘콘월 공작부인’이라는 이름을 부여한 바 있다. 또 왕실은 찰스가 왕위에 오른 이후에도 왕비(queen)라는 호칭 대신 ‘왕의 배우자(princess consort)’로 불릴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아직도 영국 국민들 중 상당수가 찰스의 바람기로 속을 끓이던 다이애나비가 교통사고로 운명을 달리한 데는 카밀라의 책임도 적지 않다고 생각하는 상황에서 여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조치였다. 물론 찰스 왕세자가 즉위할 경우 카밀라의 호칭이 바뀔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또한 여론의 영향을 받게 될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문제는 이혼 경력이 있는 카밀라와의 결혼이 영국 왕위 계승자로서의 결격사유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냐는 시각이 엄연히 존재하는 한 찰스 왕세자의 왕위 계승 자체가 불투명한 상황이라는 데에 있다. 카밀라를 옹호하는 측이든 탐탁지 않게 보는 측이든 중요한 것은 찰스의 개명 논란이 아니라 ‘카밀라 왕비’의 출현 여부일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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