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82

2005.04.26

헛다리 안보논리 국익 망칠라

전시 대비 비축물자 폐지 언론 호들갑 … 한-미 동맹 강화 속 계산은 철저해야

  • 이정훈 기자/ hoon@donga.com

    입력2005-04-19 17: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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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헛다리 안보논리 국익 망칠라

    4월1일 WRSA-K 폐지를 발표하는 캠벨 주한미군 참모장(위).한국 전개훈련을 하는 미 육군의 스트라이커 부대.

    4월1일 미8군 사령관이자 주한미군 참모장인 캠벨 중장이 주한미군 참모장 자격으로 연 기자회견에서 “사전배치 물자의 규모와 구성을 조정해야 한다”고 밝힌 뒤, 미 육군이 한국에 갖다놓은 전시 대비 비축물자(WRSA-K, ‘워사 케이’라 한다)에 많은 관심이 쏠렸다. 이에 대해 상당수 언론은 ‘노무현 정부가 한-미 관계를 제대로 이끌지 못해 미군 측이 WRSA-K의 종결을 고려하게 됐다’는 식으로 보도했다. 과연 이 보도는 옳은 것일까.

    답은 ‘전혀 아니다’이다. 미국은 한-미 관계가 나빠져서가 아니라 자체 필요에 따라 WRSA-K를 없애는 것이다. 세계적인 냉전이 종식된 뒤 미 육군은 두 가지 면에서 큰 변화를 보였다. 첫째가 부대의 축소와 경량화. 소련이 무너지던 1991년 18개이던 미 육군 사단은 현재 10개로 줄었는데, 미 육군은 이를 더 줄일 예정이다. 그리고 M-1 전차와 M-2 장갑차, M-109 자주포로 중(重)무장한 기계화부대를 스트라이커 장갑차 등으로 무장한 경(輕)기계화부대로 개편해오고 있다(스트라이커 여단이 대표적).

    두 번째는 WRSA의 폐지다. 7일치 탄약을 갖고 4일 만에 분쟁 지역에 투입할 수 있는 스트라이커 여단을 만들었으니 미국은 굳이 우방국에 WRSA를 둘 이유가 없어진 것. 때문에 2000년에 WRSA 폐지 법안을 만들어 2002년 태국과 필리핀, 대만에 있던 WRSA를 없앴다. 이때 유일한 예외가 한국이었다(국방부와 일부 언론은 이스라엘에도 WRSA가 남아 있다고 했으나, 이는 오보다).

    “없어질 운명” 한국 냉정하게 대처

    미 국방부가 한국에 있는 WRSA를 없앤다는 방침을 정한 것은 2003년. 미국은 그해 열린 한미연례국방장관 회담 때 이를 통보하고 올해 미 의회로 하여금 관련 법안을 만들게 할 예정에 있다. 한마디로 WRSA-K는 한-미 관계와 상관없이 미국의 정책 변화에 따라 없어질 운명이었던 것이고, 이에 대해 한국 측은 당황해하지 않고 냉정히 대처해왔다.



    WARA-K의 총량은 60만t이고, 최초 생산시 가격은 약 5조원이다. 그러나 오래된 물품이 많으므로 감가상각을 감안하면 WRSA-K의 현재 가치는 상당히 떨어져 있다. WRSA-K는 위험 물자인 탓에 미국으로 가져가려면 폭발을 막는 특수 장비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폐기하는 데에도 만만찮은 비용이 들어간다. 수송비와 폐기비용을 고려하면 차라리 우방국에 무상으로 주는 것이 더 경제적일 수도 있다.

    최근 한국 육군은 충북 영동군 주민들한테서 고(古)폭탄과 고포탄 폐기 시설을 지어도 좋다는 동의를 받아냈다. 따라서 한국 육군이 이 시설을 완공한다면, 미국으로서는 고폭탄과 고폭약을 한국에서 폐기하는 게 훨씬 경제적이 된다. 고포탄과 고폭탄을 재처리하면 고철과 화약이 나오는데, 고철과 화약의 소유권은 미군에 있다. 미군은 이 고철을 세계적인 고철 수입국가인 한국에 판매할 수가 있다.

    화약은 포탄을 날아가게 하는 데 쓰이는 ‘장약(裝藥·일명 추진제)’과 목표물에 도달한 포탄이나 폭탄을 터뜨리는 효과를 내는 ‘작약(炸藥·TNT 등)’으로 나뉜다. 장약과 작약을 재처리하면 비료 원료로 쓰이는 물질이 나온다. 미군은 이를 한국의 비료회사에 판매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은 매년 20만~30만t의 비료를 북한에 제공해주고 있다(올해 제공 규모는 미확정). 그런데 북핵 문제가 해결 된 후 한국이 미군의 고포탄과 고폭탄을 재처리해서 만든 비료를 북한에 제공한다면, 이는 남-북 관계를 획기적으로 변모시키는 신호탄이 될 수도 있다.

    한국의 WRSA-K 문제에 대해 잘만 하면 ‘꿩 먹고 알 먹고 털 뽑아 부채질’할 수 있으니 WRSA-K를 없애겠다는 미국 측 통고에 묵묵부답으로 일관해온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 다른 변수가 생겼다. 지난해 한-미 두 나라는 주한미군 1만2500여명을 줄인다는 데 합의했다. 주한미군을 감축하면 미군 부대에 고용돼 있던 한국인 근로자도 1000여명 줄어든다.

    주한미군 시설에 근무하는 한국인 노동조합은 강한 단결력을 보여왔다. ‘사(使) 측’인 미군으로서는 이것이 큰 부담일 수밖에 없다. 주한미군을 철수하겠다고 한 시한은 다가오는데, 한국인 근로자 축소 문제를 도와줘야 할 한국 정부는 오불관언(吾不關焉)으로 일관해왔다. 주한미군으로서는 “악” 소리가 나오는 상황이 닥쳐온 것.

    그런데 이 소리를 주한미군 사령관이나 주한 미대사가 지르면 국가 체면이 깎이므로, 주한미군 살림을 책임진 참모장으로 하여금 지르게 했다. 그리하여 기자회견은 미군 측 요청으로 갑자기 열렸고, 회견은 캠벨 사령관이 거의 일방적으로 발표하는 형태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것이 노무현 대통령이 말한 동북아 균형자론과 맞물리며 엉뚱한 방향으로 확대되었다. 노 대통령은 “중국과 일본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면 한국이 중재해야 한다”는 취지로 동북아 균형자론을 말했다. 그러나 비판적인 언론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면 균형자를 맡는다고 한 것으로 이해하고, 노 정부가 미국과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는 여론을 조성했다.

    그런 차에 캠벨 사령관이 기자회견을 열자, ‘한-미 관계가 나빠져서 미국이 WRSA-K 폐지를 통고하게 되었다’는 조로 비판했다. 한국은 안보문제에 관해서는 미국과 강한 동맹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그러나 돈 문제라면 주판을 두드려본 뒤 냉정히 대처해야 한다. 한 관계자는 “우리 언론은 잘못된 안보논리로 정부를 비판함으로써 돈 문제로 궁지에 몰린 미국을 도와주고 있다”며 “이것이 국익을 위한 행동이냐”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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