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67

2005.01.04

15년 만에 메가 폰 … 제2 영화 인생 “큐”!

  • 입력2004-12-30 14: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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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년 만에 메가 폰  … 제2 영화 인생 “큐”!
    황규덕 감독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그가 1989년 만든 데뷔작의 제목을 들으면 고개를 끄덕인다. ‘꼴찌부터 일등까지 우리 반을 찾습니다’(이하 꼴찌…). 춘사영화상 신인감독상과 영평상 신인감독상을 받은 이 영화는 사실 서울 관객 동원 3만명 정도에 그쳤다. 그럼에도 내 머릿속에는 대단한 흥행작으로 기억되어 있다. 왜 그럴까? 같은 이름의 소설이 26만부 넘게 팔리면서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랫동안 올라 있었기 때문이다.

    황규덕이 저자로 된 그 소설은 다른 사람이 쓴 것이라고 그는 솔직하게 말했다. 시나리오는 자신이 썼지만 출판사에 판권을 팔았다는 것이다. 물론 베스트셀러가 되어도 수익금은 전혀 받지 못했다. 하와이영화제 출품을 위해 프린트 만들 돈이 필요했고, 판권 팔아 받은 돈 300만원으로 그 준비를 했다는 것이다. ‘꼴찌…’는 그외에도 밴쿠버, 홍콩, 환태평양 영화제 등에 출품되었다.

    황규덕이 영화판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그에게 연락을 했다. 15년 동안 그는 무엇을 했을까. 프랑스에 이민 가려고 했다는 그의 대답을 듣고 나는 마음이 아팠다. 서울대 사범대 독어교육과를 졸업한 그는, 대학 4학년 12월에 처음으로 영화 동아리에 가입했고, 방위 제대를 한 뒤 영화아카데미 1기로 영화공부를 시작했다. 지금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는 유지나 김소영, 그리고 김의석 장형수 오병철 임종재 박종원 감독이 동기다.

    “대학 1학년 때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그룹사운드였다. 앨리스 쿠퍼에서 레드 제플린까지. 명동에 고고장이 있었다. ‘에버그린’이라고. 매일 30분씩 ‘솔저 오브 포춘(Soldier of fortune)’ 같은 음악을 연주했다. 여기저기서 끌어모은 외인 부대들이었지만, 우리는 스스로 프로라고 생각했다.”

    대학 4학년 때 동아리 활동 통해 영화와 인연



    처음에는 음악이 좋아서 멋모르고 시작했지만 학교 다니다 보니까 그런 세상이 아니었다. 그는 70년대 말 유신시절, 데모하는 모습을 보면서 행정고시를 준비하다가 서울대 학보사에 들어간다. 그런데 거기가 운동권 소굴이었다. 지금은 정치인이 된 심재철, 유시민이 들락거리던 방이었다.

    80년 5월에는 도망을 다녔다. 5·18민주화운동(1980)이 일어나자 마르쿠제 같은 학자가 쓴 사회과학 서적들을 모두 쓰레기통에 버리고 예비 줄행랑을 놓았다. 그해 10월 다시 학교가 문을 열었지만 음악도 하기 싫고 그렇다고 학생운동을 계속할 수도 없었다. 5월의 충격 이후 학생운동은 현실과 거리를 두면 안 된다는 ‘존재의 사유 속성’에 의해 노동현장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15년 만에 메가 폰  … 제2 영화 인생 “큐”!

    황규덕 감독이 15년 만에 영화계로 돌아와 만든‘철수, 영희’는 블록버스터보다 훨씬 의미 있고 뛰어난 영화다.

    그는 대중문화라는 것을 바꿔보겠다고 생각했다. 학생운동이 대중에게서 많이 겉돌던 시절이라 대중문화를 통해 대중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뒷골목의 사생아처럼 버려져 있는 대중문화가 무엇일까 살펴보았더니, 그 속에 영화가 있었다. 그에게 영향을 준 영화는 임권택 감독의 ‘만다라’와 이장호 감독의 ‘바람불어 좋은 날’이었다. 그는 대학 4학년 12월, 학교에 있는 영화 동아리 ‘얄라성’의 문을 두드린다.

    당시 2학년이었던, 지금은 시네마서비스 전무로 있는 김인수가 신입부원이 되겠다는 황규덕을 보고 황당해했다. 그때 선배인 박광수 감독이 없었으면 황규덕은 영화 동아리에 가입하지 못했을지 모른다.

    그해 겨울 그는 제작 워크숍에서 첫 단편영화 연출을 맡았다. 8mm 필름으로 찍은 40분짜리 ‘전야제’가 그것이다. 그리고 대학 졸업하고 ‘ 새로운 영화운동을 하자’며 서울영화집단을 만들었다. 박광수, 김홍준, 송능한, 홍기선, 김의석, 전양준 등이 구성원이었다.

    그의 데뷔작 ‘꼴찌…’는 스스로 설립한 ‘물결’이란 영화사에서 만들었다. 그러니까 독립영화다. 충무로 토착자본의 도움 없이, 요즘처럼 투자사의 펀딩 없이 직접 기획하고 각본 쓰고 감독했다. 학생들 이야기여서 여름방학에 개봉하려던 이 영화는 시기를 놓쳐 89년 추석 때에야 개봉했다.

    SBS 개국 당시 그는 외주 제작으로 ‘제3극장’을 연출했다. 그러면서 한국이라는 나라가 정말 문화적으로 조악하다는 것을 느꼈다. 문화적으로 풍족한 데서 살고 싶었다. 그래서 90년대 초 프랑스로 갔다. 거기서 4년간 살았다.

    “그냥 사는 게 아니라 이민을 가려고 했다. 경제적으로 힘들었지만 문화적으로는 행복했다. 그런데 결국, 이곳은 내 땅이 아니다, 내가 남의 땅을 구경하는 것뿐이지, 내가 참여할 게 없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파리에 있는 동안 홍세화씨의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를 영화화하려 했지만 펀딩을 받지 못했다. ‘닥터봉’처럼 웃기는 자장면 같은 영화들이 날개 치던 시절이어서 심각한 영화는 발 디딜 곳이 없었다.”

    귀국한 그는 98년부터 2001년까지 영화아카데미 주임교수로 일했다. 그리고 싸이더스에서 차승재 대표와 동양과 서양의 신화가 부딪치는 ‘N으로부터’라는 영화를 은밀히 기획했다. 외국 배우를 써서 외국에서 올 로케이션(현지 촬영)으로 찍는 기획이었다. 그러나 ‘화산고’ ‘무사’ 등 모험적인 싸이더스 영화들이 성공하지 못하자 프로젝트는 무산되었다. 그리고 ‘철수, 영희’를 기획했다.

    ‘철수, 영희’ 1월7일 개봉 … 웃음·눈물 버무린 가족영화

    “유럽 영화가 부럽다. 자기들이 살아가는 소소한 이야기를 가지고 영화를 만든다. ‘철수, 영희’ 만들면서 투자사들로부터 펀딩을 받으려고 노력했지만 거절당했다. 지금 큰 노름판이 벌어졌는데 너 같은 송사리는 빠져라, 이거였다.”

    순제작비 2억원, 촬영횟수 23번으로 완성시킨 ‘철수, 영희’는 2005년 1월7일 전국 10개관에서 개봉한다. 200억원의 제작비가 들어간 ‘태극기 휘날리며’는 전국 530개관에서 상영되었다. 그러나 황규덕 감독과 인터뷰를 한 다음날인 12월22일 첫 기자시사회에서 나는 영화를 보면서 계속 소리 내어 웃다가 마지막에는 눈물을 훔쳤다. 블록버스터보다 ‘철수, 영희’가 훨씬 의미 있고 뛰어난 영화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영화를 준비해서 찍는 데까지는 자신이 있다. 자신이 없는 부분은 포장을 해서 팔아먹는 것이다. 요즘 한국 영화 평균 제작비가 24억원, 포장비가 12억원, 평균 36억원 정도 되어야 영화를 찍는데, 투자자들의 입김이 세지면서 영화가 하향평준화돼가고 있다. 영화 창조자로서의 감독이라는 존재가 배우에게, 기획자에게, 펀딩하는 사람에게 밀리는 현상이 안타깝다. 그럴 바에는 적은 예산으로 정확하게 집행하는 것이 좋다. ‘철수, 영희’도 자가용을 팔고 여기저기에서 돈을 빌려 만들었다. 배수진을 치고 싸움하는 것이 좋다.”

    ‘철수, 영희’는 초등학교 4학년에 다니고 있는 한국 어린이의 대표 이름 철수와 영희를 중심으로 한 성장영화, 가족영화다. 대전 대덕초등학교 전교생을 대상으로 오디션을 해서 철수 역의 박태영과 한 학급 30명을 뽑았고 그 학교에서 영화를 촬영했다. 여주인공 영희 역의 전하은과 조연급인 유리 역의 박송이를 제외하고 아마추어 연기자들로 학급이 구성되었다. 특히 박태영은 스태프들 사이에서 ‘리틀 송강호’로 불렸다. 영화를 본 사람들은 그 이유를 안다.

    “앞으로도 저예산 디지털 작업을 계속하고 싶다. 후배들도 디지털 시스템에서 영화 만들 수 있는 토양을 구축하고 싶다. 갈수록 필름은 사라지고 디지털 작업이 일반화될 것이다.”

    15년 만에 메가 폰  … 제2 영화 인생 “큐”!
    황규덕 감독의 다음 작품은 6·25전쟁(1950)에서 가장 비극적 사건으로 기억되는 ‘노근리 사건’이다. 연극 ‘칠수와 만수’의 연출자인 이상우씨가 시나리오를 거의 끝냈으며, 2005년 여름 촬영에 들어가는 것으로 일정이 잡혔다.

    황감독은 “가공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역사, 우리 민족의 아픔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대충 만들어서는 개박살 난다. 사람들이 엄청 많이 죽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슬픈 죽음을 얼마만큼 치열하게 담을 수 있을지가 걱정”이라고 말했지만, 나는 한국 영화사가 기억하는 걸작을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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