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53

2004.09.23

“간음해도 용서” 죄의식 없다?

기독교 국가 간음 횡행 이혼율 증가 … 인간의 욕망으로 변명, 간음죄 처벌 조항 폐지 앞장

  • 조성기/ 소설가

    입력2004-09-15 19: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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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음해도 용서” 죄의식 없다?

    렘브란트가 그린 ‘간음한 여인과 예수’.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의 이야기에 관해 보충하는 글이 필요한 것 같다. 성경에서 가장 유명한 이야기 중 하나인 이 기록은 사람들의 상식과 달리 원래는 요한복음에 없었다. 이 독립된 이야기는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전승 과정을 거쳐 약간씩 변형되기도 하였다. 말하자면 이 이야기 자체도 여러 가지 사본들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개역 성경에 실려 있는 ‘양심의 가책을 받아’ ‘젊은이까지’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너를 고소하던 그들’ 같은 구절은 옛 사본에는 없는 문장들이다. 훨씬 후대의 사본에는 8절 끝에 ‘그들 하나하나의 죄를’이라는 구절이 삽입되기도 하였다.

    개역 성경으로만 보면 예수가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쓴 내용이 무엇인지 잘 알 수 없다. 시간을 벌기 위해, 혹은 상대방이 스스로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글을 쓰는 시늉만 내었을 수도 있다.

    독립된 이야기로 떠돌다 나중 복음서에 삽입

    하지만 후대의 사본을 참조하면 예수가 땅에 쓴 내용이 분명해진다. 예수는 간음한 여자를 끌고 온 사람들의 죄를 하나하나 땅에 쓰고 있었던 것이다. 간음죄를 지은 여자를 판단하고 질책하며 멸시하기에 여념이 없는 그들이 예수가 땅에 쓰고 있는 죄의 목록을 보고 자신들의 모습이 하나님의 빛 가운데 벌거벗은 듯이 드러나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에베소서 5:11-13에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저희의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움이라.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

    말하기도 부끄러운 그들의 은밀한 죄가 예수의 손끝에서 훤한 빛처럼 드러나게 되자 그들은 벌써부터 위축되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때 예수가 일어나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예수는 그들의 죄를 다 알고 있었고, 자신들의 죄를 다 알고 있는 분 앞에서 그들은 함부로 돌을 들 수가 없었다. 그들의 은밀한 죄를 알지 못한다고 여겨지는 사람이 만약 예수와 같은 말을 했다면 그들은 죄 없는 자처럼 행세하며 돌을 들어 여자를 쳤을지도 모른다.

    후대의 사본은 이와 같이 사건의 진행을 좀더 선명하게 설명해주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과연 예수가 그들의 죄를 하나하나 땅에 썼을까 하는 점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뭔가 자꾸 설명을 위해 구절들이 보태지는 사본은 그만큼 원본에서 멀어지고 있다고 보는 편이 나을 것이다.

    왜 신약, 특히 복음서들에 이런 현상이 많을까. 지금 신자의 사고방식으로는 거룩한 성경에 뭔가를 보탠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일점 일획이라도 변경되어서는 안 되는 성경인데 말이다. 그러나 복음서 원본과 사본들이 떠돌아다닐 때만 해도 그것이 성경이라는 이름으로 편집되어 이런 식으로 엄청난 권위를 얻게 될 줄은 아무도 알지 못하였다. 다만 소문으로만 떠돌고 있는 예수에 관한 이야기들을 정확한 순서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이것저것 모아서 검증해보고 여러 사람들이 돌려보기 쉽게 편집한 것이다. 그 편집자들은 예수의 정신과 메시지에 주로 관심을 기울였다. 축자 영감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듯 성령이 불러주는 대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다 보니 그 문서는 필요한 경우 보충할 수 있는 글로 여겨졌고 사람들이 알아듣기 쉽게 난외주 같은 것을 사본 두루마리 가장자리에 기록해놓기도 하였다. 그런데 다른 필사자가 그 난외주를 본문에 넣어 필사해버리면 또 하나의 이본(異本)이 남게 되는 셈이다.

    간음한 여인의 이야기는 복음서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독립된 이야기로 떠돌아다니다가 나중에 복음서에 삽입되었는데 그 위치도 왔다갔다하였다. 어떤 사본에는 그 이야기가 요한복음 21:24, 즉 요한복음 맨 끝에 부록으로 삽입되기도 하고 누가복음 21:38 뒤에 삽입되기도 하였다.

    누가복음에 삽입될 때는 ‘감람산’이라는 단어가 큰 구실을 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그 이야기에 나오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라는 구절은 요한복음 용어로는 적당하지 않고 누가복음에 자주 나오는 용어이다.

    이와 같이 복음서 편집자들은 간음한 여인 이야기를 복음서 어디에 끼어넣을 것인가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였다. 그러다가 결국 요한복음 8:12 앞부분에 삽입하기로 하였다. 그것은 뒤에 이어지는 예수의 메시지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는 이유에서이다. 요한복음 8:12은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인데, 간음한 여인의 이야기 다음에 이 구절이 연결되는 것이 그럴듯해 보인다. 또 8:15에는 ‘나는 아무도 판단치 아니하노라’는 구절도 있다.

    가장 큰 형벌은 하나님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

    하지만 이 이야기가 삽입됨으로써 예수의 초막절 예루살렘 방문 기사의 흐름이 중단되는 느낌을 받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초대교회 사람들이 간음한 여인의 이야기를 이토록 소중하게 다룬 이유다. 지금도 아랍 세계에서는 간음죄를 지은 남녀는 신명기(22:23) 율법이나 코란 율법에 따라 사형을 당한다. 아랍 세계처럼 간음자들을 다룬다면 한국에 살아남을 성인 남녀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사람들을 신명기 간음자 사형 율법에서 해방시켜 주셨다. 예수가 간음자를 대신하여 사형을 당하시고 간음자는 용서해주신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복음, 즉 좋은 소식이다. 그렇다고 간음을 마음대로 행해도 좋다는 말은 물론 아니다. 예수의 용서를 받기까지에는 뼈아픈 회개의 과정이 있게 마련인데 간음으로 인한 정신적 육체적 폐해는 자못 심각하다.

    간음은 단란했던 한 가정을 파괴하고, 가정파괴는 가족 구성원들의 생명을 위협하기까지 한다. 간음의 달콤함은 잠깐이요, 그 쓰라린 열매는 오랫동안 정신적인 그늘과 억압이 된다.

    그런데도 예수의 용서의 은혜를 값싸게 여겨 기독교 국가에서 더욱 간음이 횡행하고 있고 이혼율이 급증하고 있다. 우리나라를 보더라도 기독교 인구가 늘어날수록 간음행위는 더욱 증가하고 이혼율도 높아지고 있는 셈이다. 간음해도 용서를 받는다는 인식이 무의식중에 깔려 있어 목사를 포함한 기독교인들도 간음하는 것에 대해 깊은 죄의식이 없다. 인간의 자연스런 감정이고 자연스런 욕망이라고 변명하려 든다.

    그래서 그런지 오히려 기독교 국가에서 앞장서서 간음죄 처벌 조항을 폐지해왔다. 우리나라도 불원간 그 조항이 폐지될 전망이다. 그러나 상징적으로나마 간음자 처벌 조항이 우리 형법에 남아 있어야 부부유별의 아름다운 전통을 법적으로 지켜낼 수 있지 않을까. 신명기 율법에 비해 우리 형법은 얼마나 은혜로운가. 그야말로 우리 형법은 간음자들에게 복음이다. 이 복음의 은혜마저 저버린다면 개나 돼지가 사는 세상과 별로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율법과 복음이 기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간음한 여자의 이야기’가 그래서 초대교회 사람들에게는 소중했던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여인도 예수의 용서를 받는 과정을 살펴보면 아침부터 사람들에게 붙잡혀 벌거벗은 것같이 자신의 추한 모습이 세상에 다 드러났다. 어떻게 보면 이보다 더 큰 형벌은 없을 것이다. 율법 앞에서 이와 같이 자신의 추한 모습이 다 드러난 이후에 예수의 복음으로 용서를 받았다.

    용서를 받되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는 또 다른 의미의 율법이 주어졌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여 진리, 혹은 그리스도의 법, 사랑의 법이라고도 하지만 그 무게는 사실 이전 율법의 그것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한 편이 아니다. 용서를 받고 다시 죄를 지으면 또 용서받을 수 있는가. 물론 또 용서받을 수 있다. 그러나 용서의 과정은 이전보다 더욱 혹독할 것임이 분명하다. 어쩌면 하나님은 용서하시는데 간음자 자신이 이제는 그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가장 큰 형벌은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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