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다빈치 코드`’로 인해 논쟁이 되고 있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그림 ‘최후의 만찬’.
누가복음 8장 1-3절을 보면 예수와 제자들의 공동체에 여러 여자들이 함께 했음을 알 수 있다.
‘이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촌을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반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 때 열두 제자가 함께하였고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또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
호기심 강한 인간들 끊임없는 상상력 발휘
일곱 귀신이 들렀다는 것은 정신 이상으로 큰 고통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고통을 예수가 치유해주었으니 은혜는 이루 말할 수 없다. 막달라 마리아는 자신의 일생을 예수와 그 사역을 섬기는 데 헌신할 만하다.
그런데 호기심이 강한 인간들은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가 과연 어느 정도까지 친밀했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상상력을 발휘해왔다.
1998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주제 사라마구의 ‘예수의 제2복음’이라는 소설을 보면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정식 아내도 아닌 정부(情婦)로 나온다. 그 부분을 잠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마리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숨을 쉬며 그대로 자리에 누워 그를 두 팔로 안아 이마와 눈에 입을 맞추었다. 그럴 때면 예수는 그녀의 가슴에서 풍기는 달콤하고 따스한 체취를 맡을 수 있었다. 때로는 예수가 다시 잠자리에 드는 날도 있었고 또 어떤 날은 그렇게 질문하는 것을 잊고 마치 무언가 다른 형태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 것만 같은 고치 안에 들어가듯이 막달라 마리아의 육체 안에서 안식처를 찾기도 했다.’
니코스 카잔자키스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이라는 작품에서는 예수가 십자가상에서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해 자식을 낳고 살아가는 삶을 환상 중에 꿈꾸듯이 그려본다. 마틴 스코시즈 감독이 그 작품을 토대로 충격적인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예수를 다룬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내가 쾌히 장가를 가겠다고 말씀드리자 어머니는 내가 메시아의 신발을 신게 된다는 언약과 희망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계시면서도 막상 그날이 올까봐 두려워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래서 내가 정상적인 생활을 받아들이는 것이 그녀의 마음을 안심시켜주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예수가 어머니의 뜻을 받들어 일찍부터 혼인 약속이 되어 있는 집안의 여인과 결혼을 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예수의 아내 사라는 때마침 유행한 페스트에 감염돼 얼마 후 죽고 만다.
우리나라에서는 1958년 5월 ‘현대문학’에 실린 송기동의 단편소설 ‘회귀선’(추천작품)이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의 성적 접촉을 다루었다 하여 당시 한국 교회로부터 거센 항의와 비난을 받았다. 결국 조연현 주간과 추천자인 계용묵씨는 해명서를 게재할 수밖에 없었다.
조연현 주간은 해명서를 통해 ‘총체적으로 말해서 이 작품은 기독을 모독하기 위하여 조작된 비루한 탈선적 작품으로서 이러한 작가적 탈선은 용서되어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계용묵씨도 ‘기독에게 욕을 돌린다는 것은 본의도 아니었거니와 있을 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라고 해명했다.
‘회귀선’의 주요 줄거리는 예수의 부활이 사기극이라는 내용이다. 십자가에 매달린 사람은 예수가 아니라 예수를 닮은 자였고 진짜 예수는 제자들의 도움으로 산속 동굴 속으로 숨어 들어갔다는 것이었다. 그 동굴 속으로 막달라 마리아가 찾아가 잠들어 있는 예수의 몸을 애무하면서 예수의 은밀한 부분을 만지는데, 그 부분은 영 살아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소설에서는 예수가 남자이면서도 남자 구실을 못하는 자인 것처럼 암시하고 있다.
인간의 육신 입고 신성 유지 … 폄하될 이유 없어
니코스 카잔자키스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이 51년에 나온 소설이긴 하지만 아직 한국에 번역되지 않았을 때인데도 신진 작가인 송기동은 카잔자키스보다 한 단계 나아간 파격적인 예수 소설을 쓴 셈이다.
성경 어디를 봐도 예수가 결혼하지 않은 독신자라는 기록은 없다. 또한 예수가 성적인 경험이 없다고 언급돼 있는 대목도 없다. 다만 예수가 결혼했다는 기록이 없으므로 독신자였을 것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그리고 예수는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여성과 성적인 경험을 가졌을 리가 만무하다고 여길 뿐이다.
성베드로 대성당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작품 ‘피에타’.
세례 요한이나 바울 같은 인물 역시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였다. 지금 가톨릭의 신부들도 바로 그러한 고자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의 많은 제자들이 고자로 살지 않고 아내를 맞아 가정을 꾸리고 살았으면서도 거룩한 하나님의 사역을 잘 감당해냈다.
문제는 남녀의 성적 결합을 신성을 훼손하는 일로 여기는 고정관념에 있다. 마리아의 처녀성이 마리아의 신성을 보장하는 것처럼 마리아의 처녀성을 논증하기 위해 억지 이론을 펼치는 것도 이런 고정관념에서 연유한 도로(徒勞)일 뿐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예수가 결혼하였든 하지 않았든 예수의 신성에는 아무 영향이 없는데도 사람들은 예수가 결혼하여 성적 경험을 가졌다고 하면 예수의 신성이 훼손되고 파괴되는 것으로 단정하게 마련이다.
물론 예수가 결혼하지 않았을 것임이 틀림없지만, 백 보 양보하여 결혼하였다고 하더라도 예수의 인격과 신성이 일반 교인들이 생각하듯이 그렇게 훼손되지는 않을 것이다. 인간의 육신을 입고도 신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예수라면 다른 인간들과 똑같이 결혼하고 성적인 경험을 가지고도 능히 신성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예수는 다른 인간들과 똑같이 포도주를 마시고 빵을 먹고 대변과 소변을 배설하였지만, 그 배설행위가 그의 신성을 조금도 다치게 하지는 않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다빈치 코드’라는 소설도 별 문제도 되지 않을 사안을 가지고 호들갑 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비밀스러운 문서들을 통하여 예수가 정말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하였다는 사실이 명명백백한 역사적 사실로 밝혀진다고 하더라도 예수의 인격과 신성에는 아무 지장이 없다는 말이다. 어느 남자도 감당하기를 꺼려하는 창녀였던 한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예수의 사랑이 더욱 빛났으면 빛났지 예수가 폄하될 이유는 하등 없는 것이다.
예수를 믿어보려고 했다가 ‘다빈치 코드’를 읽고 예수에 대한 환상이 깨져 신앙을 잃게 된 사람들도 생기고 있다고 하는데, 그런 사람들도 성적인 결합을 신성을 훼손하는 것으로 여기는 고정관념에 걸려 넘어지고 있는 셈이다.
성(性)과 성적인 결합은 원래 하나님이 인간을 비롯한 생물에게 내려준 축복으로 신성한 것이다. 너무도 신성하기에 더럽혀서는 안 되는 것이지, 그 자체를 더러운 것으로 여겨 꺼려할 필요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