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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삶

고아 7000여명 내 자식처럼

전쟁고아의 어머니 - 황온순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고아 7000여명 내 자식처럼

고아 7000여명 내 자식처럼
황온순씨(105)에게는 언제나 ‘전쟁고아의 어머니’ ‘한국의 마더 테레사’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폭격과 굶주림에 죽어가던 고아 1000여명을 거두어 새 삶을 찾게 해준 데 대한 찬사다. 황씨는 전쟁이 끝난 뒤에도 직접 세운 ‘한국보육원’에서 50여년간 일하며 7000여명의 고아들을 더 돌보다 3년 전 은퇴해 지금은 작은딸 강혜경씨(72)와 함께 살고 있다. 스승의 날을 하루 앞둔 5월14일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 자택에서 그를 만났다.

분홍 저고리에 남색 치마를 입고 막 아침 산책을 다녀온 황씨는 휠체어를 타기는 했지만 고령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건강한 모습이었다. 평생 고된 일에 시달린 탓에 거칠어진 손에 흰 장갑을 낀 채 황씨는 자신의 삶을 담담히 들려주었다.

전쟁으로 자신의 아들 잃고 제주도서 보육사업 첫발

1900년 황해도 연안에서 태어난 황씨는 당시로는 드물게 신교육을 받은 엘리트 여성이다. ‘여자라도 큰 도시에 가서 배워야 한다’고 믿은 아버지는 큰딸 황씨를 직접 조랑말에 태워 이화학당에 유학시켰다고 한다. 연안 전체에 서울 유학생은 단 3명뿐이던 시절이었다.

연안의 손꼽히는 자선가이기도 했던 부친은 황씨를 학교에 보냈을 뿐 아니라, 평생 그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가르침도 주었다.



“아버지는 해마다 거지들을 위해 새해잔치를 열었어요. 평소에도 수시로 집으로 불러 밥을 먹였죠. 어린 시절 거지들이 먹던 숟가락을 따로 챙겨두었다가 아버지께 크게 꾸지람을 들은 일이 있었습니다. ‘사람은 모두 똑같다. 부모가 없어서 거지가 됐을 뿐인데 차별하면 되느냐. 남을 도와주는 일이 인생의 도리라는 걸 명심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가르침은 부모 없는 아이들을 돌보는 데 평생을 바치게 된 밑바탕이 됐다. 황씨는 1927년 이화여전 보육과를 졸업한 후 유치원 교사로 일했고 38년 전북 익산에 탁아소를 열면서 본격적인 사회사업을 시작했다. 일제 치하에서 노력동원 등으로 끌려간 여성들의 아이를 돌보는 일이었다. 해방 직후에는 서울역 앞에 구호소를 열고 강제징용에서 돌아온 젊은이들을 돌봤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보람되고 행복한 시절이었다.

하지만 50년 유엔 장학생에 선발돼 런던에서 사회사업 연수를 받는 동안 그의 인생은 전기를 맞는다. 6ㆍ25전쟁이 터지고, 한국에 남아 있던 장남 강필국씨(당시 19살)가 실종된 것이다. 황씨는 급히 귀국했지만 아들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누구는 인민군에 의해 납북당하는 것을 보았다고 하고, 누구는 총살당하는 것을 목격했다고도 했다. 외아들을 갑자기 잃은 황씨는 오열과 실신을 거듭했다. 그때 황씨를 다시 일으킨 것이 이승만 대통령이다.

“‘한 아들을 잃은 대신 1000명의 아들을 키워보면 어떻겠느냐’고 하셨어요. ‘전쟁고아들이 지금 추위와 굶주림에 떨고 있는데 황여사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셨죠.”

당시 미군은 서울 전황이 악화되자 시립보육원에 있던 고아 1000여명을 제주도로 긴급 대피시켜놓은 상태였다. 이대통령은 황씨에게 이들을 돌봐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황씨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부산으로 피난을 떠나는 다른 가족들을 뒤로 한 채 홀로 제주도로 향했다.

당시 황씨가 제주도에 세운 ‘한국보육원’은 제주도 최초의 사회복지시설. 전쟁 도중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피난민 탓에 식량이 크게 부족했던 그곳에서 황씨가 그 많은 어린이들을 키우며 겪었을 어려움이 어떠했을지는 쉽게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황씨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큰 어려움 없이 삶을 살던 제가 완전히 새롭게 태어나는 계기였다’고 말할 뿐, 이야기를 아꼈다. 황씨가 이 공로를 인정받아 ‘용신봉사상’을 수상했을 때 한 언론과 한 인터뷰에는 “제주도 도착 후 반년 넘게 비가 새는 식당에서 아이들과 쌀 한 톨 안 섞여 있는 밀밥과 소금에 절인 미역국만으로 지냈더랬습니다”라는 회고담이 실려 있다.

고아 7000여명 내 자식처럼

‘한국의 마더 테레사’ 황온순씨와 손자 허엽씨, 둘째 딸 강혜경씨(왼쪽부터).

제주도에서 전쟁을 이겨낸 황씨는 55년 아이들과 함께 서울로 돌아왔고, 70년 경기 양주군에 있는 현재의 자리로 보육원을 옮겼다. 1만5000여평의 부지에 17개의 방이 있는 이 보육원 터는 전쟁 중에 아들이 실종된 바로 그곳. 황씨가 아들을 키우는 마음으로 이들을 키우고 지켜왔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여중·고 설립 … 여성 교육사업에도 힘써

이러한 황씨의 삶은 때때로 가족들에게조차 이해받지 못했다. 다른 가족과 모두 사별한 황씨를 홀로 모시고 사는 딸 강씨는 “제가 자라던 때만 해도 일하는 여성은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아직 어린 저희를 부산 피난처에 두시고 혼자 제주도로 떠나셨지요. 고아를 돌보는데 내 자식이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셨겠지만 서운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어린 마음에 ‘우리 어머니는 이상하시다’라고 혼자 생각한 적이 많았습니다”라고 회고했다.

그렇게 키워낸 ‘자식’들을 황씨는 지금도 친자식처럼 아낀다. 특히 기억에 남는 이를 꼽아달라는 질문에도 “몇 명 이름만 이야기하면 다른 자식들이 상처받는다”며 끝내 답을 주지 않았다.

“교수, 박사, 스님 등 다양한 쪽으로 성공한 자식들이 많아요. 하지만 할머니는 시골에서 돼지 치는 분이 올라와 인사를 드리는 것을 제일 반가워하셨습니다. 아, 돼지 치는 분이 한 분밖에 안 계셔서 이렇게 말하면 할머니께 혼날지도 모르겠네요”라는 손자 허엽씨(50)의 설명을 통해 황씨의 사랑이 친어머니의 그것 못지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 뿐이다.

보육원에 전념하던 그는 1970년 여성교육 사업도 시작했다.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에 휘경여중, 휘경여고를 세워 이사장에 취임한 것. ‘나라가 발전하려면 여성을 가르쳐야 한다’는 평소의 지론에 따른 것이다.

황씨는 2001년 경희대 강연에서 “여기 조영식 경희대 학원장님하고 나하고 옛날에 내기를 한 적이 있어. 나는 휘경학교를 하고 있을 때고 조이사장님은 경희대 총장을 하실 때인데, 서로 ‘나중에 누가 더 훌륭한 학교를 만드는가 내기하자’고 한 것이지. 그런데 지금 봐요. 누가 봐도 경희대가 더 훌륭해졌잖아. 남자여서 큰일을 했다고도 하겠지만 그게 아닙니다. 큰 꿈을 가지셨으니 큰일을 해내신 거예요…”라고 말한 적이 있다. 경희대의 발전을 축하하는 말이었지만, 한편으로는 휘경학원을 세웠던 시절 그가 품었던 소망의 한 부분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고아 7000여명 내 자식처럼

건강이 나빠진 그는 집 안에 자신이 설립한 휘경학원의 모형을 두고 학교를 그리워하곤 한다.

시대의 선각자였던 황씨는 ‘여자이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당대의 차별을 남들보다 더 많이 느꼈다고 한다. 그래서 늘 ‘여성이 마음껏 능력을 펼칠 수 있게 교육하고 힘을 실어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것을 내가 하겠다’는 뜻을 갖고 살았다. 평생 단 하나 아쉬운 것이 여자대학을 세우지 못한 것이라고 안타까워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황씨는 지금도 체력이 허락하면 늘 책을 읽고 글을 쓸 정도로 건강하다. 담당 의사는 “저 연세에 혼자 화장실에 가는 것은 젊은이들이 마라톤을 완주하는 것보다 힘든 일”이라고 혀를 내두르지만, 아침에 일어나면 스스로 양말을 신고, 혼자 화장실을 다녀온다. 하지만 최근 부쩍 체력이 떨어져 곧 지치고, 한 번 꺼낸 말을 수없이 되풀이하는 일이 많아졌다. 청력도 예전 같지 않다. 그래서 요즘 그의 소망은 누군가 자신의 뜻을 이어 좋은 여자대학을 세워주는 것이다.

“좌우명이랄 건 없어요. ‘너 좋자고만 하면 어떡하나. 다른 사람 생각을 해야지’라는 부친의 가르침을 평생 마음에 품고 살았습니다.”

지금껏 황씨의 삶을 이끌어온 것은 지극히 소박한 이 가르침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삶을 통해 실천한 그는, 지금 그 누구보다 위대하다.



주간동아 436호 (p78~79)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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