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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 공화국 … ‘중도’ 설 자리 없다

‘친구 아니면 적’ 양극단의 사회 분위기 팽배 … 합의 뒷전 충돌 일관 ‘민주주의 위기론’

  • 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

흑백 공화국 … ‘중도’ 설 자리 없다

흑백 공화국 … ‘중도’ 설 자리 없다
서울 모 대학의 A교수는 세칭 진보적인 교수다. 시민단체와 지속적으로 교류해왔고, 그 핵심멤버로 활동하기도 했다. 저술활동도 활발히 했을 뿐 아니라 유력 일간지의 단골 ‘칼럼니스트’로 필명을 날리기도 했다. 이런 상황은 작년 초까지 변함없었다. 문제가 발생한 것은 작년 여름 한 유력 일간지의 기획위원으로 참여하면서부터. 이 소식이 전해지면서 즉각 그가 관여했던 시민단체로부터 혹독한 비판이 쏟아졌다.

“당신의 색깔은 뭔가, 왜 당신은 우리와 노선을 달리하는가?”

한쪽 편 들지 않으면 반대파 낙인

A교수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은 감수할 수 있었지만 갈등 당사자 간의 지나친 대결구도 속에서 이슈마다 이성적 판단을 내릴 여지를 주지 않는 강압적인 분위기만큼은 참기 힘들었다. 반미시위와 북한 핵문제는 말할 것도 없고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고용허가제, NEIS(교육정보화시스템), 심지어 학교에 건물 하나 새로 짓는 것까지 한쪽 입장을 옹호하지 않으면 즉각 반대파로 몰렸다. 그는 “사회의 갈등은 자연스러운 일이나 최근의 상황은 양측이 대화를 단절한 채 정면충돌로 일관하여 민주주의의 근간인 ‘합의’가 불가능한 지경”이라며 곤혹스러워했다.

경제 관련 시민단체에서 일하는 B씨는 이 분야에서 짧지 않은 경력을 갖고 있으며 다방면의 NGO(비정부기구) 인사들과 오랜 친분을 유지해오고 있다. 단체마다 노선과 전략의 차이는 있지만 ‘개혁’이라는 공통의 목표가 있고, 박봉으로 힘겹게 일하는 처지를 이해하는 동류의식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올 들어 이런 동류의식은 점차 희박해지고 오히려 서먹한 관계로 변하고 말았다. 결정적으로 작년 말부터 시작해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반미 흐름’이 이런 상황을 만들었다. 반미시위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그는 주변 시민운동가와 반대편 인사들의 ‘눈치’와 ‘비아냥’을 감내해야 했다. B씨 역시 최근 우리 사회의 분위기가 양극단의 논리로 치달으며 대결국면으로 흐르고 있는 점을 우려한다.



“양측 모두 반미 구호를 외치지 않거나 반(反)김정일 논리를 펴지 않으면 같은 편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죠. 세상일이 자기 뜻대로만 움직이는 것이 아닌데 끊임없이 편향된 틀로만 친구와 적을 구분하더군요.”

작년 말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 개정 촛불시위에서 촉발된 여론의 대치국면은 최근 이라크전쟁 파병 논란을 둘러싸고 절정에 이르렀다. 파병동의안 처리를 둘러싼 논란은 노무현 대통령의 국회 국정연설에 이은 국회 표결로 가결될 때까지 보름 이상 국론을 두 동강 냈다.

그러나 문제는 단지 여론의 양극화에만 있지 않다. 파병 반대와 찬성 시위의 치열한 싸움을 지켜본 한 국회의원은 “북한 핵과 파병안 논란은 ‘절대강국 미국’이라는 신국제질서에 대한 전략의 차이라고 이해할 수 있지만 사회 각 분야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극심한 대치국면은 명분과 원칙 싸움으로 일관해 ‘민주주의의 위기’로 확대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즉 그동안 사회갈등의 완충작용을 했던 중도세력들이 자기 목소리를 전혀 내지 못하면서 우리 사회가 표류하고 있다는 것. 연세대 사회학과 김호기 교수는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민주적 절차와 제도를 스스로가 책임지는 경험과 훈련이 필요한데 그런 절차적 민주주의의 역사가 일천하다 보니 중간층의 목소리가 힘에 가로막혀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더구나 드러난 갈등이 명분과 선명성 싸움으로 확대·발전하는 양상을 보이는 점은 더욱 우려되는 대목이다. ‘인간교육실현 학부모연대’(이하 학부모연대)는 지난달 말 전국 교육 관련 NGO 모임인 ‘교육개혁시민연대’에서 탈퇴했다. 학부모연대의 이경자 사무국장은 “자립학교 논리에 일정 부분 찬성했다가 전교조로부터 교육개혁을 거스르는 단체라고 매도당했다”고 주장했다.

흑백 공화국 … ‘중도’ 설 자리 없다

이라크전쟁 파병안을 두고 국론은 양극단으로 갈라졌다. 3월28일 국회앞에 모여 전쟁참여를 촉구하는 해병 전우회 회원(오른쪽)과, 3월 30일 한국노총집회에서 파병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는 조합원과 아이들.

“예를 들어 ‘선생님 평가’만 해도 학부모들은 자녀가 더 좋은 선생님한테서 배우길 원해 찬성했습니다. 그러나 전교조는 교육개혁이란 이름으로 ‘절대’ 반대만 하고 있으니 우리가 설 자리가 없었습니다.”

명분과 원칙에 집착하는 모습은 ‘핵폐기장 건설’과 ‘새만금 사업’ 등 환경 분야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일부 환경단체와 종교인들은 새만금 사업에 대한 모든 합의과정이 수포로 돌아갔다며 ‘삼보일배’라는 극단적인 투쟁으로 ‘사업 포기’를 주장하고 있다. 반면 지방자치단체에서는 지역경제 살리기 등을 앞세워 정부측에 ‘절대 강행’을 촉구하고 있다.

이런 갈등이 중재안이 없어 계속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양측 모두 서로의 원칙에 너무 집착해 협상안을 받아들일 여지가 없어 상황이 계속 어려운 쪽으로 흘러왔다.

노무현 대통령은 4월15일 국무회의에서 24개 사회 각 분야의 갈등 이슈(표 참조)를 선정해 정부가 갈등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당부했다. 갈등이 더 깊어지기 전에 대통령이 직접 나서 이를 챙기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셈이다.

이 같은 파국적 상황의 근저에는 과거 시대의 유산인 ‘투쟁’에 대한 향수가 자리잡고 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또 쉽게 승복할 만한 권위가 사라지고 있는 점도 갈등 해소를 지연시키는 원인이다. ‘사회지도층 인사 자제의 군대 기피’나 ‘재벌그룹들의 재산 상속문제’ 같은 기존 권력층의 비도덕적 행태나 ‘YMCA 사태’나 ‘꽃동네 비리’ 같은 사회 각 분야의 비리가 이러한 현상을 부채질하고 있다.

이런 부조리는 단지 ‘정치권력’에 한정되지 않고 이미 권력화한 ‘산업화세대 민주화세력’에 대한 전면적인 비판으로 이어지고 있다. 결국 이는 기존 질서의 정통성에 대한 거부로 연결돼 ‘세대교체론’으로 확장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최근 부패와 성차별의 문제가 현실화되면서 표면적으로는 이념과 세대의 대결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최근 강성 전교조 논란을 빚은 한 초등학교 교장의 자살은 결국 산업화세대와 인터넷세대의 갈등이 표면화된 대표적인 사례로 기록될 것이다.

“절충안이나 신중론 돌 맞기 십상”

흑백 공화국 … ‘중도’ 설 자리 없다

사회갈등을 중재할 세력과 권위가 사라졌다. 기존 권위의 붕괴를 보여주는 YMCA 사태

젊고 진보적인 인사들은 “사회의 의제가 바뀌었는데 아직도 과거를 기준으로 해서 어물쩍 넘어가려고 한다”고 반발하고 있다. 산업화시대의 중심 의제는 ‘경제발전’이었다. 경제가 제일의 가치였기 때문에 그 이외의 것은 희생할 수 있었다. 산업화세력이 ‘경제발전’ 논리에서 한 발짝도 못 나가는 동안 시민사회는 새롭게 설정된 ‘정보화’ ‘수평적 네트워크화’란 의제를 적극적으로 확산해 나갔다.

역사학자 최상천씨는 “한국의 민주화 수준이 사회분야에 절대적으로 취약했으며, 특히 기업 학교 종교 언론의 영역에서 부족했다”고 지적했다. 이런 변화의 와중에 과거의 권위가 힘을 잃고 권력의 상실기에 나오는 헤게모니 다툼이 거세졌기 때문에 양쪽 모두 중도파를 의도적으로 배제하면서 생존을 위한 투쟁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

“절충안이나 신중론을 제기했다간 돌 맞기 십상입니다. 타협안을 냈다가 실패했을 경우 그 책임은 모두 제안자에게 돌아옵니다.”

얼마 전 ‘상가임대차보호법안’에 대해 신중론을 제기했던 국회의원의 하소연이다. 최근 의원회관 방으로는 하루에도 몇 번씩 ‘낙선운동’을 하겠다는 협박성 전화가 걸려온다.

결국 중도주의란 진보주의와 보수주의 중간에 있는 이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념은 이미 설 자리를 잃고 중도는 수식어에 불과한 상황이 됐다. 수원대 철학과 이주향 교수는 “이제 이념적 의미의 중도는 사라지고 사회의제에 따라서 사안별로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한때 진보였던 개발논리가 지금은 보수적인 논리라는 것.

국내에서는 중도가 단 한 번도 정치세력화에 성공한 적이 없고, 할 여건도 마련되지 못했다. 결국 민주적 절차에 의해서 양쪽 의견을 절충해나가는 협상파를 이 시기의 ‘중도’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최근 이 협상파들은 ‘개량’ ‘무원칙’ ‘회색주의자’로 분류되어 갈수록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이런 추세가 상당 기간 지속될 것이라는 데 중도주의자들의 고민이 있다.









주간동아 2003.05.01 382호 (p64~67)

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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