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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감동시대

TV엔 지금 휴머니즘의 반란

情·눈물·삶의 의지 등 다룬 프로그램 잔잔한 감동 … 보통사람들의 일상 꾸밈없이 그려내

  • 전원경 기자 winnie@donga.com

TV엔 지금 휴머니즘의 반란

TV엔 지금 휴머니즘의 반란

휴먼 다큐멘터리들이 보여주는 보통사람들의 삶은 평범하지만 치열하다. 이 다큐들은 대부분 10~20% 선의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어 시청률 면에서도 선전하고 있다.

서툴게 양배추를 썰거나 드레싱을 뿌리는 손들. 몸은 30대 초반의 성인이지만, 이 손들의 주인공은 IQ 70 내외의 정신지체인들이다. 한국장애인고용촉진공단에서 훈련 중인 이들의 목표는 외식업체에 취직하는 것. 목표 달성을 위해 이들은 요리실습 외에도 직접 장보기, 혼자 대중교통 을 이용해 목적지까지 가기, 싼 물건 사기 등 각종 ‘사회적응 훈련’을 반복한다.

이중에서도 가장 힘든 것은 살빼기 훈련. 30년이 넘도록 집 안에서만 살던 이들은 대부분 비만한 체격에 체력도 약하다. 취업하기 위해서는 체력단련과 살빼기가 급선무지만, 지능이 초등학교 저학년 수준인 훈련생들에게 살빼기 훈련은 너무 힘겹다. 그런데 저녁 운동을 빠지려고 ‘집에 전화해달라’고 떼쓰던 혁수씨(31). 그가 순순히 돌아와 ‘늦게라도 하겠다’며 운동장을 돈다. 다리를 절룩거리며 운동장을 걷던 혁수씨가 불쑥 말한다. “취직해서 돈 많이 벌고, 저축도 할 거예요. 부모님 돌아가시면… 저는 외톨이잖아요.” 장애인의 날 특집으로 방송된 MBC의 ‘심야스페셜’ 3부작. ‘정신지체인, 샐러리맨 되다’의 한 장면이다. 카메라는 정신지체인들이 서툴게 세상을 배워 결국 취업에 성공하고, 땀 흘리며 음식을 만들거나 손님에게 ‘맛있게 드세요’ 하며 웃는 모습을 따라간다. 정신지체인들의 홀로서기 과정을 과장 없이 담아낸 이 휴먼 다큐멘터리는 4월14~16일에 방송된 데 이어 18일에 다시 방송되었다.

요즈음의 TV에는 자극과 가학, 억지웃음과 무리한 설정이 넘쳐난다. 출연자들의 얼굴에 강풍을 쏘거나 물벼락을 맞히는 정도는 보통이다. 연예인들의 짝짓기를 통해 사랑이라는 순수한 감정도 인스턴트로 만들어버리는가 하면, 인터넷에 불법 유포된 연예인들의 사진이나 비디오를 ‘이런 거 다운 받지 마라’며 열심히 보여준다. 드라마는 드라마대로 아들과 며느리를 이혼시키지 못해 안달 난 시어머니가 한둘이 아니다.

이 같은 TV에 대한 반감이 커져서일까. 최근 시청자들은 시끌벅적한 TV 속에 조용히 자리잡고 있는 휴먼 다큐멘터리들에 조금씩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인간극장’(KBS 2TV) ‘피플, 세상 속으로’ ‘영상기록 병원 24시’ ‘한민족 리포트’(이상 KBS 1TV) 등이 잔잔하지만 깊은 감동을 전해주는 다큐 프로그램들. 이들은 4월 들어서도 전신화상을 입었지만 밝게 살아가는 이지선씨 이야기를 담은 ‘지선아 사랑해’(인간극장), 폐암으로 2개월 시한부 삶을 선고받고도 “엄마, 아파?” 하는 두 살배기 딸의 눈망울을 바라보며 2년여를 버텨온 나은경씨의 이야기 ‘엄마는 울지 않는다’(영상기록 병원 24시) 등 감동적인 화제작들을 계속 탄생시키고 있다. 프로그램의 인터넷 게시판에는 ‘마음으로 응원하고 사랑한다’ ‘오늘부터 감사하면서 살기로 했습니다. 힘내세요!’ 등 시청자들의 애정 어린 메시지들이 쏟아진다.

휴먼 다큐 프로그램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한결같이 보통사람들의 일상을 꾸미지 않고 그대로 보여준다. ‘피플 세상 속으로’의 주인공들이 일견 평범한 사람들인 반면 ‘인간극장’에는 어느 정도 굴곡이 있거나 사회적으로 소외된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이 등장한다. ‘…병원 24시’는 그 제목처럼 희귀, 난치병 환자와 그 가족들이 주인공이다.



저녁시간에 방송되는 ‘피플 세상 속으로’의 애청자라는 주부 임희숙씨(40)는 “경박한 여러 프로그램들 속에서 특별히 귀하다는 느낌을 준다”고 휴먼 다큐의 특징을 설명했다. “요즘은 가족 외에는 이웃과 거의 단절된 생활을 하는 게 보통이잖아요. 그런데 TV를 통해서라도 평범한 이웃들의 삶을 알 수 있어서 좋아요. 물론 감동도 크죠. 개인적으로는 장애아를 둔 어머니나 힘든 와중에서도 부모를 모시는 자녀 등 가족애를 보여주는 프로그램에 감동받는 편이에요.”

TV엔 지금 휴머니즘의 반란

‘영상기록 병원 24시’에 소개된 나은경씨. 나씨는 폐암으로 2개월 시한부 삶을 선고받은 후에도 1년 8개월째 꿋꿋이 투병중이다.

휴먼 다큐의 선두주자는 2000년에 시작해 이제 3년째를 맞고 있는 인간극장. 인간극장은 하나의 이야기를 5회에 걸쳐 이어가는 일종의 ‘미니시리즈’다. 한 주인공의 이야기로 5회 분량을 채워나가기가 쉽지 않을 것 같지만 이 프로그램을 외주 제작하는 ‘리스프로’의 박은희 본부장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모든 인간의 삶은 드라마를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궁극적으로 인간극장은 왜 살아야 하는지를 묻는 프로그램입니다. 제작진들은 주인공의 삶에 어떤 메시지가 담겨 있으며, 그 메시지가 사회적으로 공감할 만한 것인가에 대해 항상 자문하죠. 인간극장을 제작하면 할수록 우리 사회에는 아직 순수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느낍니다.”

모든 휴먼 다큐들이 공통적으로 겪고 있는 어려움은 출연자 찾기다. 제작진은 기존 언론은 물론 인터넷을 뒤지고 인맥을 총동원하고 여러 행사에 참여해 적당한 취재 대상을 물색한다. ‘…병원 24시’는 프로그램의 특성상 병원에서 제보를 받는 경우가 많다. 최근 들어서는 휴먼 다큐가 보편화되어서인지 출연 섭외에 대한 큰 거부감은 없는 편이라고. 대부분 “내가 이 프로그램을 보고 큰 감동을 얻었 듯이 나도 남들에게 그 같은 감동을 주고 싶다”며 응한다고 한다.

약자나 소외계층에 대한 사회적 관심 높아져

프로그램 제작의 기본방침은 자연 다큐멘터리와 비슷하다. 즉 망원렌즈로 미세한 동물의 동작까지 포착하는 자연 다큐처럼 주인공의 삶을 밀착해서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자연 다큐와 마찬가지로 주인공에게 연기를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출연자가 원하지 않는 사생활은 방송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열흘에서 한 달 정도 걸리는 촬영이 시작되면 PD는 제작기간 내내 집에 못 들어가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가끔 프로그램을 촬영하는 도중에 출연자가 사망하는 일도 있다. ‘인간극장’의 임성구 PD는 지금까지 자신이 제작한 10여편 중 지난해 방송된 ‘눈물의 웨딩드레스’를 잊지 못한다. 가난 탓에 결혼식을 못 올리고 살던 해군 중사 부부. 남편은 암에 걸린 아내를 위해 결혼식을 준비하지만, 결혼식을 손꼽아 기다리던 아내는 웨딩드레스를 입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당시 프로그램 주인공이었던 해군 중사의 안부를 묻는 메일이나 전화가 지금도 심심찮게 온다고.

휴먼 다큐 프로그램에 대한 시청자의 반응은 조용하지만 뜨겁다. 출연자들을 후원하는 카페가 자발적으로 조직되는 경우도 많다. 유난히 딱한 사정의 출연자들이 많은 ‘…병원 24시’는 홈페이지에 출연자들의 연락처나 계좌번호를 게시한다. 또 시청자의 반응을 재는 바로미터인 시청률 역시 대부분 15~20%선을 유지하고 있어 교양 다큐멘터리로는 꽤 높은 편.

그러나 휴먼 다큐 PD들은 휴먼 다큐가 딱한 사람들의 처지를 보고 눈물 흘리거나, “그래도 나는 저 사람들보다 낫구나” 하는 식의 안도감을 느끼게 하는 선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약자나 소외계층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환기시키는 것 또한 감동을 전하는 것 못지않은 휴먼 다큐의 중요한 역할이라는 것.

‘피플 세상 속으로’의 이재헌 PD는 그동안 제작했던 프로그램 중 가장 보람 있었던 경우로 대구 개구리소년들의 부모 이야기를 담은 ‘끝나지 않은 슬픔’을 꼽는다. 실종된 미아들의 문제와 그 가족의 고통을 보여준 이 프로그램의 방송 이후 ‘실종 미아 찾기 시민의 모임’이 결성되고 민주당 김희선 의원이 관련 법안을 국회에 상정했다. 이PD는 “휴먼 다큐는 프로그램의 특성상 시사 프로그램 같은 직접적 메시지는 전달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그러나 출연자의 아픔을 관찰하는 과정을 통해 사회에 논의의 단서를 제공할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러나 휴먼 다큐가 세상을 변화시킬 만큼 큰 위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TV는 학교 같은 교육기관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청자들은 쉬고 싶을 때,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을 때 TV를 본다. 그 때문에 TV의 전체적 기조는 가벼워질 수밖에 없다. 이 와중에서 진지한 이야기를 전하는 휴먼 다큐의 자리는 아직 외롭다.

MBC ‘느낌표’의 김영희 CP는 “TV는 시청자를 변화시킬 수 있다. 문제는 그 변화가 일시적인 변화에 그친다는 점이다”라고 말한다. “제가 ‘이경규가 간다’를 제작했을 때 적지 않은 운전자들이 횡단보도의 정지선을 정확하게 준수했습니다. 그러나 이 프로그램의 종영과 동시에 운전자들은 그전의 위험한 운전습관으로 돌아가고 말더군요.”

최근 ‘느낌표’에서 동남아 노동자들의 인권 찾기 프로그램 ‘아시아, 아시아’를 제작하고 있는 김CP는 “재미를 추구하는 것은 TV의 기본적인 속성이다. 그래서 나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더라도 개그맨들을 사회자로 등장시켜 진지함과 가벼움을 결합하는 방법을 택했다”고 설명했다. ‘아시아, 아시아’는 김CP의 말처럼 주제가 무거운데도 시청률이 40%를 넘나들고 있다.

광속의 스피드로 흘러가는, 그리고 나날이 경박해져 가는 이 시대에 평범한 삶들을 담은 휴먼 다큐들은 일견 남루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한 제작자는 “라이프 스타일은 많이 바뀌었지만 인간에게는 시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진실이나 순수함 같은 보편성이 있다”고 말했다.

그래, 그 말이 맞다. TV의 휴먼 다큐 속에 등장하는 삶들. 때로 견디기 힘든 역경에 부딪히지만 여전히 살려는 의지를 잃지 않는 그 모습에 우리는 왜 감동하는가. 그 속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삶은 어렵고 엄숙하지만, 그만큼 참되고 진실한 것이기도 하다.





주간동아 2003.05.01 382호 (p58~60)

전원경 기자 winni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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