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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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대째 정계 진출 日 ‘하토야마 家’

만 28세 다로, 도쿄도 의원 補選서 당선 … 고조부는 前중의원 의장, 증조부는 前총리 이치로

  • 조헌주/ 동아일보 도쿄 특파원 hanscho@donga.com

    입력2003-04-23 17: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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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조시대도 아니고 이 개명천지에 ‘5대째 정치가’라니 어디 있을 법한 일인가. 그런데 4월13일 치러진 일본 지방선거에서 5대째 정치인이 탄생했다.

    이번 지방선거는 도쿄 도지사와 10개 현 지사를 선출하고, 43개 도·부·현에서 지방의회 의원을 뽑는 제법 큰 선거였다. 그러나 여러 차례 한국인의 속을 뒤집어놓는 말을 내뱉어 TV나 신문에서 얼굴만 보아도 거부감이 드는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70)가 압도적 지지로 도쿄 도지사에 재선된 것말고는 이렇다 할 뉴스거리가 없었다.

    솔직히 ‘정치’ 하면 한국에서도 설레설레 고개부터 내젓는 사람이 많은데 의회정치 역사가 한국보다 긴 일본에서야 오죽하랴. 해방정국의 혼란과 내전, 쿠데타에 뒤이은 군부독재, 광주학살 등 격랑의 현대사를 겪어온 한국에 비하면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찻잔 속의 태풍’ 같은 변화만 몇 십년째 겪어온 탓도 크다. 언론매체만 선거 보도에 열을 올렸을 뿐 선거를 앞두고 기자가 만난 일본인들은 한 번도 정치 이야기를 화제에 올리지 않았다.

    주변사람들 ‘5할은 조상 덕’

    이처럼 무관심 속에서 치러진 이번 선거에서 그나마 화제의 주인공은 하토야마(鳩山) 가의 만 28세 청년 ‘다로(太郞)’다. 1974년 6월생인 그가 도쿄 도의회 의원 보궐선거에서 당선되면서 정치에 입문한 것이다. 왕가를 제외하면 고조부부터 5대째 정치를 ‘가업’으로 계승한 것은 근대 의회정치가 일본에 도입된 이후 하토야마 가가 처음이다.



    당사자인 다로는 178cm의 키에 잘생긴 얼굴, 그리고 와세다대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하버드대 연수까지 마친 자신의 실력이 당선 이유라고 굳게 믿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주변에서는 ‘5할은 조상 덕’이라고 수군거린다.

    그렇다면 일본 제일의 정치 명가로 통하는 하토야마 가는 과연 어떤 집안일까.

    1대는 중의원 의장을 지낸 하토야마 가즈오(鳩山和夫·1856~1911). 미국 컬럼비아대와 예일대에서 유학한 후 귀국해 변호사로 활동한 그는 도쿄 의회 의원, 중의원 9기, 외무차관, 중의원 의장 등 화려한 정치경력을 쌓았으며 와세다대의 전신인 도쿄전문학교의 교장도 지냈다.

    그러나 부인 하루코(春子) 여사는 남편이 이 정도 출세한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한 모양이다. 그는 매일 새벽 3시 반이면 두 아들을 깨워 등교하기 전까지 영어 수학 한문 공부를 시켰다. 그리고 이러한 ‘새벽 과외’는 두 아들이 소학교(초등학교) 상급학년 때부터 도쿄제국대학(이하 도쿄제대)에 입학할 때까지 10년이나 계속됐다. 맹자 어머니도 울고 갈 극성스런 치맛바람의 원조였던 셈이다. 그러나 하루코 여사가 제 자식 교육에만 욕심을 부린 것은 아니었다. 도쿄여자사범(현 오차노미즈여자대)을 졸업한 그는 공립여자직업학교를 창립한 사회교육가이기도 했다.

    2대째인 가즈오의 큰아들 하토야마 이치로(鳩山一郞·1883~1959)는 세 차례나 총리를 지낸 거물 정치인이다. 그는 도쿄제대 법학과를 졸업한 뒤 28세 때 도쿄시의회 보궐선거에서 당선돼 정치에 입문했다. 4년 후 중의원에 첫 당선됐으며 1932년 문부대신으로 입각했다. 그 후 1954년 12월, 55년 2월, 55년 11월 등 세 번에 걸쳐 총리를 지냈다. 가즈오의 작은아들 하토야마 히데오(鳩山秀夫) 역시 도쿄제대 법학과를 나와 모교에서 민법교수로 활동하다 변호사를 거쳐 정계로 진출, 중의원 의원을 지냈다.

    5대째 정계 진출 日 ‘하토야마 家’
    3대 정치인을 만들어낸 이는 아무래도 이치로 전 총리의 부인 가오루(薰)였다. 그 시어머니의 그 며느리라고나 할까. 뇌일혈로 쓰러져 거동이 불편한 남편을 늘 곁에서 도운 가오루 여사는 남편이 총리에 오른 뒤 “재상을 만들어낸 현부인(賢夫人)”이라는 칭송을 듣기도 했다.

    이들의 장남 하토야마 이이치로(鳩山威一郞·1918~1993)는 도쿄제대를 나와 대장성 관료 생활을 하다 1974년 중의원에 출마, 3선 의원이 됐다. 1976년에는 외무장관을 지냈다. 이이치로의 부인 야스코(安子)는 ‘하토야마 가문의 대모’로 불린다. 자동차 타이어로 유명한 ‘브리지스톤 타이어’ 창업가의 딸인 야스코 여사는 두 아들을 모두 하토야마 가문 4대 정치인으로 키워냈다. 친정집에서 마련해준 넉넉한 자금도 있었지만 그는 원체 배포가 컸다. 두 아들이 일본 정치 개혁을 외치며 새로운 야당, 민주당을 결성할 때 50억엔(약 500억원)을 마련해주었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다.

    큰아들은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1947~). 도쿄대 공대를 졸업한 뒤 미국 유학을 다녀와 대학교수를 지냈다. 하지만 역시 정치인 집안의 피는 속일 수 없었던지 이과계통 교수로는 이례적으로 정치에 뛰어들어 1986년 자민당 소속 중의원에 당선됐다. 일본 제1야당 민주당을 만들어 대표를 지낸 유키오는 현재도 당의 상임간사로서 민주당 ‘공동창업자’인 간 나오토(管 直人) 대표와 함께 일본 제1야당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유키오의 목표는 총리를 지낸 조부 하토야마 이치로. 하지만 집권 자민당이 버티고 있는 현재의 일본 정계 구도로 보면, 정권교체 후 총리에 오르는 꿈은 좀더 보류해두어야 할 것 같다.

    ‘행정은 서비스산업’ 개혁 다짐

    한 살 터울의 작은아들 구니오(邦夫·1948~) 역시 도쿄대 출신. 법대를 졸업하고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전 총리의 비서로 정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초선의원이 된 시기는 형보다 10년이나 빠른 1976년. 이후 자민당 8선 의원으로 문부성 장관, 노동부 장관을 거쳤다. 야당으로 옮겨 신진당 부대표, 형이 만든 민주당 부대표 생활도 했으며 4년 전 도쿄도지사 선거 때는 민주당을 탈당,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현재는 자민당으로 복귀했다. 부인은 ‘에밀리’라는 이름의 유명 TV 탤런트다. 이번에 정계에 입문한 하토야마 가문의 5대 정치인 다로가 구니오의 장남이다.

    다로가 당선된 지역은 바로 하토야마 가문의 ‘금성탕지(金城湯池)’로 통하는 도쿄도 분쿄구. 도쿄대학 홍고 캠퍼스가 있는 곳이자 아버지 구오의 지역구다. 구오가 아직 예순도 안 되었지만 언젠가 다로가 부친의 뒤를 이을 것으로 일본인들은 예상하고 있다. 다로는 지난해 12월까지 출판 관계 회사를 다니다 그만둔 뒤 일단 도쿄도의회 의원으로 정치에 첫발을 내디뎠다. 총리를 지낸 증조부가 도쿄도의회 의원으로 정계에 투신했던 나이 역시 다로와 같은 스물여덟이었다.

    다로의 정치 비전은 “행정은 최대의 서비스산업”이라는 주장으로 요약된다. 비정부기구(NGO)와 민간자원봉사자의 협력을 받아 정책입안 단계에서부터 도민의 의견과 아이디어를 집약해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올리는 행정시스템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의 정치 비전이 ‘개혁대상 1호’로 꼽히는 일본 정치판에서 얼마나 실현될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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