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79

2003.04.10

이라크에 개그맨 보내면 행복하십니까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03-04-02 17: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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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라크에 개그맨 보내면 행복하십니까

    \'본격 정치 코미디 ‘3자 토론’이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왼쪽부터 노무현, 이회창, 권영길 후보를 패러디한 배칠수, 박명수, 김학도 후보(위).

    “이라크 국민들 미국 개그맨 보고 안 웃습니다. 그런 이라크에 우리 젊은 개그맨들을 보내자는 겁니까?”

    “우리 개그맨들에게 직접 개그를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허허. 이라크에 가면 개그말고도 코미디 세트 만들기 같은 할 일이 많습니다.”

    “사막의 모래바람이 얼마나 무서운지 아십니까. 애써 만들어놓은 세트 다 무너집니다. 개그를 안 해도 위험한 건 마찬가지입니다.”

    미국 코미디와 이라크 코미디가 팽팽히 맞서면서 세계 코미디계가 흔들리고 있다. 그 현장에 우리 젊은 개그맨들을 보내야 할까. 즉각 보내야 한다는 박명수 후보와 절대 안 된다는 김학도 후보,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갈등하고 있는 배칠수 후보가 열띤 토론을 벌인다. 그들의 주장과 말투, 몸짓에서 16대 대통령선거에 나섰던 주요 후보들의 모습이 그대로 묻어나온다. 3월29일 방송된 MBC 코미디 하우스(연출 박현석, 토요일 오후 5시10분) ‘3자 토론’의 한 장면이다.

    노무현, 이회창, 권영길 세 후보가 다시 대통령선거에 나선다면 어떻게 될까. 이 상상을 현실로 옮긴 프로그램 3자 토론이 화제다. 개그맨 배칠수(민주당 노무현 후보), 박명수(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김학도(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가 현안에 대해 치열한 공방을 벌이는 이 프로그램에 젊은이들뿐 아니라 중년 시청자들까지 열광하고 있기 때문이다. 2월8일 첫 방송을 내보낸 후 MBC 인터넷 게시판에는 ‘100분 토론보다 훨씬 낫다’ ‘3자 토론 보는 낙으로 산다’는 의견이 매주 수천 건씩 올라온다.



    3월26일 오후 리허설 현장에서 만난 3명의 주인공들은 “예상 밖의 인기에 얼떨떨하다”면서도 “우리나라 정치 코미디의 새 장을 열겠다”는 의지로 가득 차 있었다.

    이 프로그램의 아이디어를 처음 낸 사람은 박명수씨. 대선이 끝난 후 박씨가 “세 후보의 특징을 포착해 코미디로 꾸미면 재미있겠다”며 라디오에서 대선후보 성대모사로 인기를 끌고 있던 배칠수씨와 김학도씨에게 같이 해보자고 제안한 것이 프로그램의 시작이었다. 박씨는 “사실 나는 다른 사람 흉내내는 데 소질이 없어 사회를 보려고 했는데 외모가 이회창 전 후보와 닮았다는 이유로 이 전 후보 역을 맡게 됐다”며 “지금도 내가 가장 비슷하지 않은 것 아닌가 고민한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박씨는 이 전 후보와 거의 흡사한 외모, ‘어~’ 하는 이 전 후보 특유의 말투, “체력에 자신 있습니다”라며 손바닥을 땅에 닿게 하는 등배운동 풍자 등으로 인기몰이중이다.

    “국민 여러분 행복하십니까,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라는 유행어를 탄생시키며 3자 토론 최고의 스타로 떠오른 김학도씨도 권영길 전 후보 흉내내기 분야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국내 1인자다. 권 전 후보의 트레이드마크인 플라스틱 테 안경을 쓴 채 수시로 마른 입술을 적시며 ‘내게도 신경 좀 써달라’고 조르는 듯한 말투로 말을 토해내는 그는 요즘 쏟아지는 CF, 휴대전화 컬러링, 포털사이트 배너 광고 제의로 데뷔 이래 최고의 인기를 실감하고 있다.

    그러나 3자 토론이 지금의 인기를 누리게 된 것은 이 같은 출연진의 흉내내기 재주 덕 때문만은 아니다. 사실 시청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건 거의 똑같은 세 후보의 목소리를 통해 쏟아져 나오는 날카로운 정치풍자다.

    이 프로그램의 진가를 알린 3월15일 방송 내용. 배칠수 후보가 코미디언실 규율부장으로 기수가 낮은 여자 코미디언을 임명한 데 대해 평코미디언들이 집단 반발한다. “저희들을 놔두고 왜 배후보와 규율부장 두 분이 밀실인사를 했습니까?”라고 항의하자 배후보는 “밀실인사 아닙니다. 당신 같으면 이 여자랑 밀실에 있고 싶습니까? 인사권은 제 고유 권한입니다”라고 반박한다. 옆에서 치마를 입고 다리를 꼰 채 앉아 있던 규율부장은 “저더러 점령군이라 그러는데, 저 군대 다녀온 적 없습니다. 여러분과 똑같은 코미디언 출신입니다”라고 한마디 거든다. 민감한 정치 이슈를 개그의 공간으로 옮겨놓고 내용을 비틀어 풍자한 것이다.

    3월22일 방송에서 배후보가 횡설수설하는 대변인에게 던진 “자를 수도 없고…”라는 말은 현재의 정치 상황과 청와대의 고민을 정확히 집어낸 촌철살인으로 주요 일간지에 게재될 만큼 화제를 모았다.

    이처럼 날카로운 정치풍자 코미디의 대본을 쓰는 사람은 누구일까. 놀랍게도 3자 토론의 대본은 출연진의 아이디어로 만들어진다. 박명수, 배칠수, 김학도 등 주요 출연자들은 하루에 2,3종의 신문을 읽고, 시사잡지와 토론 프로그램까지 챙겨보며 아이디어를 낸다. 이들의 의견이 처음 모이는 것은 금요일 오후 8시. 각자의 스케줄을 끝낸 뒤 모여 시작되는 이들의 난상토론은 밤 11시까지 이어지기 일쑤다. 이 내용을 정리한 대본 가안이 나오는 월요일에 2차 회의, 화요일에 3차 회의가 열리고 최종 대본 수정과 리허설은 수요일에 한다.

    3자 토론의 전상혁 작가는 “섭외 과정에서는 스케줄이 바빠서 녹화일에만 나오겠다고 말했던 배칠수씨마저 나흘을 꼬박 나오며 회의에 참석할 정도”라고 귀띔했다.

    이라크에 개그맨 보내면 행복하십니까

    연출을 맡은 박현석 PD(왼쪽)와 작가 전상혁씨.

    김학도씨도 “개그맨을 시작할 때 부터 관심 있던 분야가 정치풍자였다”며 “하고 싶은 영역을 하면서 시청자들의 호응까지 얻으니 더 바랄 게 없을 만큼 기분 좋다. 다음달부터는 스케줄을 줄여서 3자 토론에 더 집중할 계획”이라고 말할 정도다.

    이들이 말하는 3자 토론의 매력은 ‘정치인 흉내내기’ 수준을 넘어서는 본격 정치풍자. 지난해 3월 배칠수씨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목소리를 흉내내 F-15K 전투기 구입 문제를 풍자했던 ‘엽기 김대중’ 파일의 연장 선상에 있는 코미디라는 점이다.

    배씨는 “사실 나는 평균적인 30대 남자 수준의 정치적 관심을 갖고 있을 뿐이다. 젊은 사람들이 정치에 대해 무관심하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다들 마음에 안 들고 비꼬고 싶은 기분을 느끼고 있다”며 “이 사람들의 간지러운 곳을 긁어줄 수 있는 코미디가 바로 3자 토론”이라고 말했다.

    물론 정치 현안을 본격적으로 풍자하는 데 따른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최근 강금실 법무부 장관과 송경희 청와대 대변인을 잇따라 성대모사하며 3자 토론의 깜짝 스타로 떠오른 전영미씨는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자신 있게 내뱉지 못하는 평범한 사람들을 통쾌하게 만들어주려면 다소 무리하다 싶은 희화화도 불가피하다는 것을 이해해줬으면 좋겠다”고 주문하기도 했다.

    그러나 본격 정치풍자 코미디 3자 토론의 앞날이 밝은 것만은 아니다. 식상하기 쉬운 성대모사가 내용의 중심을 이루고 있고, 참여정부 출범 이후 끊이지 않은 파격과 정치적 역동성이 사라지고 나면 곧 소재 고갈에 직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 전상혁씨는 “김길수, 정몽준 후보 등 다른 후보를 출연시키거나 ‘국민과의 대화’처럼 일반인들의 돌출질문에 대한 대응을 프로그램에 반영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 배칠수 후보는 정부 입장, 박명수 후보는 보수 입장, 김학도 후보는 NGO와 진보 진영의 입장을 대변하도록 해 성대모사나 어투의 특징이 없더라도 통쾌함과 웃음을 줄 수 있는 코미디를 만들겠다는 게 3자 토론 팀의 포부다.

    ‘5년 뒤 17대 대선 때까지 3자 토론을 계속하며 웃음의 대박을 터뜨리겠다’는 이들의 다짐이 어떻게 현실화하는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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