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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비디오’ 승자 없는 진실게임

스포츠신문 ‘H양’ 보도 파문 … 실체 미확인 속 당사자 지목 함소원양 억대 소송

  • 김현미 기자 khmzip@donga.com

‘섹스비디오’ 승자 없는 진실게임

‘섹스비디오’ 승자 없는 진실게임

① 함소원씨. 소속사인 코리아21엔터테인먼트 홈페이지에 있는 프로필 사진을 A신문이 도용했다고 주장한다.
② ‘H양 섹스비디오’를 확보했다고 처음 보도한 3월6일자 A신문.

”나는 H양이 아니다.” 어느 날 갑자기 섹스비디오의 주인공으로 지목된 후 눈물의 기자회견을 한 함소원씨(25). 현재 그는 경기도의 한 사찰에 머물며 매일 백팔 배로 지친 심신을 달래고 있다.

H양이 미스코리아 출신 함소원씨라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면서 함씨의 홈페이지는 이를 확인하려는 네티즌들로 서버가 다운됐고, 인터넷에 온갖 종류의 H양 동영상이 떠돌아다니는 등 섹스비디오 파문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됐다. 그러나 사건 발생 2주일이 지난 지금, H양 사건은 벌써 세인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가고 있다. 기승을 부리던 ‘H양 비디오 긴급입수’라는 제목의 스팸메일들도 한풀 꺾인 상태. 1999년 봄 ‘O양 비디오 사건’이 터진 후 한 달이 채 안 돼 “아직도 O양 비디오를 못 본 사람은 팔불출”이라는 말이 나왔던 것과 비교하면 사뭇 다른 양상이다.

H양 비디오에 대한 야릇한 호기심은 금세 식어버렸지만 H양의 진실은 여전히 미궁 속에 남아 있다. 문제는 ‘H양 섹스비디오 사건’을 터뜨린 기자와 소속 신문사의 몇 명 외에 이 비디오의 실체를 확인한 사람이 없다는 것. 3월5일 A신문의 첫 보도가 나간 후 특종을 놓친 다른 스포츠연예지들이 일제히 H양 비디오 추적에 나섰지만 모두 실패했다.

실명 안 썼지만 옆모습 사진 게재

사건의 발단은 지난해 12월18일자 D스포츠신문 기사였다. ‘H양 비디오 나왔대요’라는 제목으로 실린 이 기사는 H양이 모 미인대회 출신으로 귀여운 이미지가 어필해 현재 TV와 영화를 넘나들며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으며, 비디오는 미인대회 출전 직후 찍은 것으로 상대는 나이트클럽 DJ라고 밝혀 H양의 추측 범위를 상당히 좁혀놓았다. 그러나 이 기사는 탤런트 A양의 입을 빌려 “그런 소문이 나돌고 있다”는 내용을 전하고 있을 뿐, 소문의 진위를 파악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연예가의 입방아를 ‘날것’ 그대로 전달하는 가십은 사람들의 호기심만 증폭시켰다. 사실상 이때부터 연예가에서는 H양 찾기 게임이 시작됐다.



“3월5일 A신문이 발굴특종이라며 ‘H양 섹스비디오’를 터뜨렸을 때 그 신문 홈페이지에 여자의 옆모습 사진이 실렸다. 그때까지도 어디서 많이 본 듯하다고만 생각했지 우리 홈페이지에 있는 함소원씨의 프로필 사진인 줄 몰랐다.”

함소원씨 소속사인 코리아21엔터테인먼트(이하 코리아21) 정연식 이사는 3월5일 오후 6시경 A신문에 전화를 걸어 “왜 함소원의 사진을 썼느냐”고 항의했다. “연기자에게 물어보라”는 담당기자의 대답에 정이사는 “추측이냐, 확인된 사실이냐”고 따졌으나 정확한 대답을 듣지 못했다. A신문은 섹스동영상이 17분짜리, 50분짜리 2개의 버전이 있으며 정면 얼굴과 음성으로도 H양임이 확인된다고 못박았다. 하지만 H양의 실명은 밝히지 않았다.

A신문은 어떤 이유에선지 그날 저녁 홈페이지에서 함씨의 사진을 다른 사진으로 대체했으나, 이미 네티즌들은 그 사진의 주인공이 함씨임을 확인했고 이 사실은 인터넷을 통해 급속히 퍼졌다. 이번에는 B신문이 코리아21에 사실확인을 요청했다. 다음날 B신문은 함씨가 강력히 부인한 내용을 기사화하면서 실명을 밝혀 오히려 역효과를 냈다. 소문의 주인공이 함소원이라는 것을 삼척동자까지 다 알게 된 것. 정연식 이사는 “B신문에 사실이 확인될 때까지 며칠만 참아달라, 실명 대신 이니셜로 처리해달라고 거듭 요청했으나 이미 인터넷상으로 널리 유포된 사실이어서 싣지 않을 수 없다는 대답을 들었다”고 주장한다.

‘섹스비디오’ 승자 없는 진실게임

③ 3월12일 기자회견을 열고 결백을 주장하는 함소원씨. ④ A신문은 3월12일자에서 H양이 몰래카메라에 당했다는 내용의 후속 기사를 내보냈다. ⑤ 함소원씨가 결백을 주장한 기자회견을 한 후 A신문은 ‘오리저널 H양 비디오’가 있음을 재차 강조했다. ⑥ 시중에 떠돈 7분짜리 H양 비디오의 한 장면. ⑦ 비디오의 주인공이 자신임을 밝힌 성인물 배우 하늘.

이 와중에 A신문(3월12일자)은 다시 ‘몰카였다, 갈취당했다’는 자극적인 제목의 속보를 내보냈다. 촬영시기는 2000년, 장소는 서울 신천의 한 모텔, 러브호텔의 몰래카메라에 당했으며, 이로 인해 H양이 6개월에 걸쳐 금품을 갈취당했다는 등의 새로운 사실이 첨가됐다. 또 “시중에 떠도는 ‘H양과 매니저’라는 제목의 7분짜리 동영상은 가짜이며, 이 시점에서 H양이 섹스비디오의 악몽에서 벗어나는 길은 자신을 협박하고 돈을 갈취해간 일당에 대해 당당하게 정식 수사를 의뢰하는 방법뿐”이라고 충고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H양으로 지목된 함소원씨와 코리아21측은 A와 B신문을 명예훼손 등의 혐의로 고소하고 3월12일 공식 기자회견을 열어 결백을 호소했다. 7분짜리 동영상의 실제 주인공으로 성인배우 하늘(25)이 등장한 것도 이 무렵. 네티즌들 사이에서 또 다른 H양의 존재가 알려지자 하늘은 정식 인터뷰를 통해 “애꿎게 함소원씨를 비롯해 H성을 가진 여자 연예인들이 피해를 보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웠다”며 “몰래카메라가 아니라 통상적인 성인 영상물”이라고 밝혔다.

“사실 여부 떠나 명예훼손죄 성립”

이로써 모든 의문이 풀린 듯했으나 A신문이 다시 “인터넷에 떠도는 가짜 말고 긴 머리에 나체로 찍힌 오리지널 H양 비디오”라고 거듭 주장해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다. 정연식 이사는 “A신문이 처음 기사를 내보내면서 동영상의 복사본이 시중에 퍼지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했지만 아직까지도 오리지널을 봤다는 사람이 없다. 이쯤 되면 모든 내용을 공개하고 진위 여부를 가려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한다.

과연 함소원씨와 A신문 중 어느쪽이 거짓말을 하고 있을까. 흥미로운 사실은 A신문이 첫 기사에서 함소원씨의 사진을 사용했지만 지금까지 H양이 함소원이라고 명시한 적이 없다는 것. ‘H양=함소원’이라는 추측은 인터넷에서 유포됐다. 그렇다고 A신문이 “H는 함소원이 아니다”라고 말한 적도 없기 때문에 의혹은 더욱 깊어진다. 현재 오리지널 동영상의 존재와 H양의 실체를 아는 것은 오로지 A신문뿐이다. 경쟁지인 C스포츠신문의 한 기자는 “이제는 H양 비디오가 정말 존재하는지 의문”이라며 “과거에도 소문만 무성했을 뿐 결국 실체가 확인되지 않은 섹스비디오 사건이 수차례 있었다”며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함씨를 대리해 이 소송을 맡은 이성문 변호사는 “A신문 기사는 그동안 시중에 떠돌던 소문을 취합한 수준”이라며 “법률적 관점에서 기사의 내용이 사실이든 허위든 명예훼손죄가 성립될 수 있다”고 말한다. 또 최초로 실명을 사용한 B신문에 대해서도 “해명기사인 것처럼 보이나 함소원씨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았으며 함소원임을 지목하는 역효과를 낸 책임이 있다”고 했다. 만약 섹스동영상 존재가 허위사실일 경우 형사처벌 대상이 되며, 언론이 사실 여부를 확인하려는 노력을 얼마나 했느냐 등에 따라 손해배상 액수도 달라질 수 있다. 현재는 양 신문에 합계 6억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한 상태.

억대의 소송사태로 번진 H양 사건은 검찰조사를 통해 진실이 밝혀지겠지만, 이처럼 잊을 만하면 터지는 ‘섹스비디오’ 파문에 대해 네티즌들 사이에서 질타와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사건 직후 다음 사이트에 개설된 ‘H양비디오대책위원회’는 “O양 때부터 시작된 몰카들, 그 진실이 무엇이든 간에 그들의 사생활이 공개된 후 죄인이 돼야 하는 일이 반복되는 것에 염증이 난다”며 스포츠신문의 선정주의를 강력히 비난하고 서명작업에 나섰다. 또 H양 비디오를 찾아다니는 ‘섹티즌’들을 골탕먹이기 위해 패러디물도 속속 만들어졌다. 예를 들어 ‘H양 비디오 공개’라는 제목의 게시물을 클릭하면 ‘H양 비디오’라는 자막이 나오는데 이 자막으로 마우스를 가져가면 자막이 계속 피해 다녀 도저히 클릭을 할 수 없다. 섹스비디오를 탐닉하는 사람들의 부질없는 욕망에 대한 재치 있는 경고인 셈. 양의 그림으로 만들어진 커다란 H, B, C자는 그동안 우리사회를 떠들썩하게 한 무슨무슨 양 비디오 파문을 꼬집은 것이다.

또 과거 같으면 “연예인도 공인인데 어떻게 그런 비디오를 찍느냐”는 등 개인을 향한 비난 여론이 많았지만 지금은 오히려 “연예인은 사생활도 없나. 찍는 것은 개인의 자유이며 오히려 유포한 죄가 크다”는 의견이 대세다. 팬클럽 ‘함소원 사랑’의 게시판에는 섹스비디오 파문 후 오히려 격려 메시지가 쇄도하고 있다.

한국여성민우회는 이 사건과 관련해 “여성연예인의 인권을 유린한 H양 보도에 대해 책임 있는 수사를 촉구한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여성민우회 강혜란 사무국장은 “누가 H양인지에는 관심도 없고 중요한 문제도 아니다. 이런 식의 인권침해적인 보도는 음란물시장을 도와주는 일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며 “이번 사건을 계기로 우리사회에 만연한 관음주의와 전면전을 벌일 것”이라고 말했다. 문화개혁시민연대측도 “여성연예인의 사생활과 인권을 침해하는 스포츠연예지는 선정보도를 중단하라”라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번 사건을 통해 새롭게 부각된 것이 연예인의 인권문제. 어디까지가 ‘국민의 알 권리’에 따라 공개해야 할 정보인지, 또 어디까지가 보호받아야 할 사생활의 영역인지 논란이 되고 있다. 가수 백지영씨 사건을 맡았던 최정환 변호사는 “이번 사건은 H양 비디오의 진실 여부와 프라이버시 침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봐야 한다”고 말한다. “연예인들은 사회적 관심의 대상이기 때문에 프라이버시도 제한적으로 보호될 수밖에 없지만 가족, 병력, 성 등 개인에게 치명적인 정보는 반드시 보호돼야 한다. 만의 하나 함소원씨가 진짜 H양이라 하더라도 널리 유포되지 않은 정보(섹스 동영상)를 언론이 고의적으로 공개했다면 프라이버시 침해 여지가 있다.”

조이엔터테인먼트의 김성덕 대표는 더욱 단호하다. “어느 연예인이 아들을 낳았는지 딸을 낳았는지, 이혼을 했는지 결혼을 했는지가 과연 ‘국민의 알 권리’인가. 알 권리를 들먹이며 불필요하게 사생활을 들추는 선정적인 보도가 반복되지 않도록 이번 사건의 진실은 철저히 밝혀져야 한다.”

함소원씨는 ‘양들의 침묵’(과거 스캔들의 주인공들이 제발 세상이 빨리 잊어주기만 기다리고 침묵하던 관행)을 깨고 전례 없이 초강경 대응을 선언했다. 함씨는 3월12일 기자회견에서 “극단적 상업주의 보도로 인해 연예인을 떠나 한 여자로서의 삶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게 됐다.(중략) 나 자신보다 제2, 제3의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 자리에 나왔다”며 자신의 사진을 사용하고 실명을 거론한 언론사와 끝까지 싸우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다. 어쨌든 H양의 진실게임 결과는 앞으로 연예계 보도관행에 큰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보인다. 무소불위의 황색바람이 명예훼손 앞에서 무릎을 꿇을까.





주간동아 2003.04.03 378호 (p64~66)

김현미 기자 khmzi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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