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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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단체 목소리 커졌네!

북핵 문제 대두 이후 시위 잇따라 … 인터넷 통해 이미지 변신 노력도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03-03-13 14: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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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수단체 목소리 커졌네!

    1월11일 서울시청 앞에서 열린 ‘나라와 민족을 위한 평화 기도회’ 참가자들이 ‘주한미군 철수 절대 반대’ 등의 구호를 외치며 녹색 풍선을 하늘에 띄우고 있다.

    3·1절 서울시청 앞 광장은 하늘색 풍선을 든 10만여명(경찰 추산)의 사람들로 가득 찼다. 한국자유총연맹, 재향군인회, 납북인사가족협의회 등 114개 보수단체가 개최한 ‘반핵 반김(정일) 자유통일 3·1절 국민대회’(이하 3·1절 국민대회)에 참석한 인파였다.

    이들은 “북한의 핵개발로 7000만 한민족이 공포와 불안에 떨고 있다”며 “한반도와 세계의 평화, 자유민주주의와 국가 번영을 위해 정부는 미국과 손잡으라”고 촉구했다. 손에 손에 태극기와 성조기를 쥔 참석자들은 “좌익을 박멸하자” “우리는 미국을 사랑합니다” 등의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이날 서울 여의도 한강시민공원에서도 시위가 열렸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개최한 ‘나라와 민족을 위한 구국 금식 기도회’. 1월11일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초록색 풍선을 날렸던 개신교도 수만여명이 다시 모인 이날 행사에서 참가자들은 ‘미군 철수 반대’를 한목소리로 외쳤다.

    보수단체들이 움직이고 있다. 지금까지 각종 사회 현안에 대해 적극적으로 발언해왔던 쪽은 젊고 ‘진보적’인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 그러나 최근 주한미군과 북핵 문제가 불거지면서 60, 70대 노인들이 시위에 나서고 있다. 군복을 차려 입은 ‘참전용사’들도 소매를 걷어붙이고 구호를 외친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전문가들은 연이은 한나라당의 집권 실패로 위기에 처한 보수진영이 활로를 찾기 위해 집결하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한다. 더 이상 침묵할 경우 보수세력의 존재 자체가 어려워질 수 있다고 느낄 만큼 코너에 몰려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3·1절 국민대회에 참가한 김용석씨(67)는 “DJ 집권 5년 동안은 정권이 곧 바뀔 것이라는 희망 하나 갖고 살았다. 그런데 다시 민주당이 정권을 잡았고, 북핵 문제나 미군 철수 문제가 잇따라 터졌다. 이러다가 나라고 뭐고 다 끝장나는 거 아닌지 불안하다. 이제 할 말은 하고 살아야겠다”고 말했다.

    이슈 만들고 ‘수구’와의 차별화 부각 시도

    이날 참가자들은 “한국 정부가 북한의 통일전략전술에 놀아나고 있다” “돈 퍼준 보답으로 핵폭탄을 맞겠다는 거냐” 등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에 대한 비판 발언들을 쏟아냈다.

    이들의 불안감은 현재 한국의 대다수 보수세력의 정서와 비슷하다. 한국전쟁 이후 50년 가까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던 자신들의 자리가 흔들리면서 그와 함께 이 나라의 근간도 무너지고 있다는 위기의식이다. DJ 정부 이전까지는 언제나 같은 편에 서 있다고 느꼈던 언론과 사회 일반의 분위기가 예전과 다르게 흘러가는 것도 이들을 거리로 내모는 원인이다.

    한국자유총연맹 장수근 홍보매체본부장은 “북핵이나 미군 철수와 관련된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자유총연맹은 우리 정부의 대응 방법이 잘못됐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계속 발표했다. 하지만 언론들은 이 내용에 신경도 쓰지 않았다. 언론이 조명하는 것은 촛불시위 같은 반미 집회들뿐이다. 결국 우리의 주장을 제대로 알리려면 거리로 나서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과거 ‘진보적’ 시민·사회운동단체들이 가두 시위를 벌이며 내세웠던 논리와 놀랍게도 똑같은 주장이다. 보수단체들은 이 정권 아래서 스스로를 저항적 시민운동단체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이에 맞게 보수단체들은 과거의 시민운동단체들이 그랬듯이 이슈를 만들고, 지지자를 늘리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이들이 첫째 과제로 삼은 것은 보수의 이미지를 바꾸는 작업. ‘보수’가 현재 수세에 몰린 일차적 원인은 진보세력들이 이 단어 위에 ‘수구’의 이미지를 교묘하게 덧씌운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진보운동 진영이 ‘진보’와 ‘빨갱이’를 구별하기 위해 애썼다면 이제는 보수진영이 ‘보수’와 ‘수구’의 차이점을 부각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보수단체 목소리 커졌네!

    3월1일 114개 보수단체 주최로 열린 ‘반핵 반김 3·1절 국민대회’ 참가자들이 태극기와 성조기를 함께 흔들며 만세를 부르고 있다(왼쪽).‘반핵 반김 3·1절 국민대회’에서 한 참가자가 성조기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고 있다.

    한국 사회의 대표적 보수주의 학자 중 한 명인 연세대 사회학과 유석춘 교수는 “현재 우리 사회에서는 ‘보수’와 ‘진보’라는 용어 자체가 왜곡돼 있다”며 “지금 ‘보수’라고 불리는 평범한 사람들은 신주류로 부상한 소위 ‘진보’세력과 다른 견해를 갖고 있으며 그들의 부상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이러한 해석에 따라 보수단체들은 보수의 이미지를 시장질서 존중, 자율 강조 등 역동적이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꿔놓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단체의 정체성을 ‘젊은 보수’로 규정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다.

    중산층을 대변하는 중도 시민단체라고 자임하는 ‘바른 사회를 위한 시민회의’(이하 시민회의)의 박현철 대외협력실장은 “우리는 분명히 보수주의 단체지만 우리가 수호하고자 하는 가치는 헌법과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질서다. 이것들을 공고히 하면 그 외의 것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개혁적 입장을 취할 수 있다”고 밝혔다. 시민회의는 3월12일 ‘한국 시민운동의 현황과 과제’에 대한 심포지엄을 열어 현 상황에서 한국 시민운동이 나아갈 바에 대한 아젠다를 설정하는 등 시민단체로서의 정체성을 명확히 할 계획이다.

    이처럼 ‘보수’의 부정적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한 노력과 더불어 보수단체들이 집중하고 있는 것은 사이버 세계로의 진출이다. 지난 대선에서 인터넷의 위력을 실감한 보수적 네티즌들은 웹진을 창간하거나 각종 인터넷 게시판에서 벌어지는 토론에 적극 참여하는 등 사이버 세계 공략에 나서고 있다. 상당수 단체들은 진보적 사이트에 비해 접속 속도가 느리고 기능이 떨어졌던 인터넷 홈페이지도 개선하고 있다.

    보수진영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인터넷 매체는 ‘인터넷 독립신문’. 이 신문은 지난 3·1절 국민대회 직후 17만명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접속했을 정도로 보수집단을 대표하는 언론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인터넷 방문자 순위 집계 사이트 ‘랭키 닷컴’에 따르면 3월7일 현재 독립신문의 3월3~7일간 접속 횟수는 전체 인터넷 매체 중 13위를 기록했다. 아직은 1, 3, 4위를 차지한 오마이뉴스, 프레시안, 딴지일보 등 진보적 성향의 매체들에 비해 뒤지지만 2주 새에 종합 순위를 100개 이상 뛰어올라 속도면에서는 단연 1위다.

    “동원문화에 익숙 … 제대로 된 시민운동으로 볼 수 없다”

    ‘보수적 애국주의’를 내세우는 이곳의 네티즌들은 젊은이들에게 왜 보수가 필요한지를 납득시킬 수 있는 논리를 개발하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 인터넷상에서 미군 철수나 북핵 문제, 새 정부의 인사정책 등과 관련한 논쟁이 벌어질 경우 ‘보수적 입장’을 내걸고 참여하기도 한다.

    보수단체들은 이처럼 사이버 세계에 공을 들이기 시작하면서 ‘보수적인 세계관’에 공감하는 젊은이들이 크게 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재향군인회 관계자는 “보수단체의 집회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젊은이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인터넷 상에서도 우리 의견에 동의하는 젊은 네티즌을 보는 경우가 많다”고 밝혔다.

    한나라당 이회창 전 대통령 후보의 팬클럽 ‘창사랑’ 홈페이지에서 한 네티즌(ID: Dionysus)은 조갑제 월간조선 편집장이 모 매체에 쓴 “좌파에게 빼앗긴 사이버, 광화문, 지하철, 언론을 되찾아야 한다”는 말을 인용하며 “이제 우리도 행동하는 젊은이가 됩시다. 어른들이 일어나니 더욱 든든하지 않습니까?”라고 쓰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보수단체의 활동에 대해 기존 시민단체 쪽의 반응은 냉랭하다. 자생적으로 발전한 진보적 시민운동과 달리 기본적으로 ‘동원문화’에 익숙한 보수단체들의 활동을 제대로 된 시민운동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한 진보적 시민단체의 간사는 “최근 보수단체 결집의 원인이 된 남북 위기는 상당부분 과장된 것이며, 지금 그들의 시위는 기득권 보호용일 뿐”이라며 “이들을 또 하나의 시민운동이라고 보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혹평했다.

    그러나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조기숙 교수는 “민주사회에서 다양한 논의가 이뤄진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며, 그런 점에서 볼 때 보수단체들이 정책 대안을 제시하고 건전하게 활동한다면 이들의 움직임은 사회발전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며 “다만 이들의 의견이 독선이나 수구로 흐르지 않도록 합리적인 여론주도층이 균형을 잡아줘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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