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71

2003.02.06

‘보수’라는 말 꺼내지도 말자

한나라당 정개특위 회의 문건 … “온건개혁=우파=한나라로 당 이념 진로 잡아야”

  • 허만섭 기자 mshue@donga.com

    입력2003-01-30 09: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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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수’라는 말 꺼내지도 말자

    한나라당 정개특위 1분과 회의모습(위). 한나라당 정개특위의 ‘당 정체성 확립을 위한 워크숍’ 회의록.

    한나라당은 앞으로 ‘보수’라는 용어의 사용을 자제할 것 같다.

    대선과정을 거치면서 ‘보수=수구’라는 등식이 국민들 사이에 강하게 자리잡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보수 대 개혁’의 이분법적 틀 자체를 폐기하자는 논의다. 지난해 ‘중도보수론’ ‘따뜻한 보수론’을 당의 이념적 스펙트럼으로 내세우던 것에 비춰보면 주목할 만한 변화다.

    ‘보수’를 대신해 자신들의 정치적 성격을 규정해줄 대안으로 한나라당은 ‘온건개혁’과 ‘우파’를 적극 고려중이다. 현 정국 구도를 ‘급진개혁’ 대 ‘온건개혁’, ‘좌파’ 대 ‘우파’의 경쟁구도로 나눠, ‘온건개혁=우파=한나라당’으로 당의 진로를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논의는 한나라당 개혁안 수립의 전권을 맡은 ‘당과 정치개혁을 위한 특별위원회’(이하 정개특위)에서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정개특위 1분과는 2003년 1월23일 서울 여의도 한나라당사 5층에서 ‘당 정체성 확립을 위한 워크숍’(선진 민주사회 구축을 위한 한나라당의 역할)을 열었다. ‘주간동아’가 입수한 회의록에 따르면 이날 회의에선 ‘한나라당의 이념적 좌표를 새로 구축하는 문제’가 논의됐다. 한나라당 관계자는 “회의록에 수록된 K대학 국제관계학과 J교수의 주제발표문이 대다수 참석자들로부터 공감을 얻었으며 한나라당이 향후 이러한 방향으로 당의 진로를 잡아나갈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J교수 발표문은 우선 한나라당의 대선 패배 원인부터 규명했다. 발표문은 패배 원인을 ‘보수세력의 이념적 공동화(空洞化)’로 규정했다. 보수세력의 이념인 반공, 국가안보, 한미동맹, 근대화, 세계화, 원칙주의 등이 유권자들에게 더 이상 먹혀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렇게 설명됐다.



    “△반공-탈냉전시대를 맞아 ‘대(對)북한 이념 공간’을 진보개혁세력에 의해 장악당했다. △국가안보-남북화해 분위기에서 전통적 안보개념만 고집했다. △한미동맹-북한, 중국, 러시아 등 동북아 협력이 새롭게 부각되는 시점에서 설득력 있는 외교적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다. △근대화-근대화의 성과는 잊혀지고 근대화의 부작용인 정경유착, 재벌폐해, 권위주의만 부각됐다. △세계화-보수세력이 세계화를 선점할 경우 반전의 기회였지만 보수세력 스스로 세계화에 실패했다. △원칙주의-‘보수세력=원칙주의자’라는 이미지를 수립하는 데 실패했다.”

    당 내부 개혁·리더십 교체 주문도

    발표문은 또한 “뭔가 자신이 추구하는 바를 당당하게 내세워야 지지를 받을 수 있다”고 강조한 뒤 “보수세력에겐 이러한 비전이 없었다”고 진단했다. 발표문은 해법으로 “한나라당은 온건개혁정당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제시했다. 두 가지 상황논리가 제시됐다. 보수세력의 이념적 공간이 공동화됐다는 점, 현재의 집권세력이 온건개혁세력임을 표방할 경우 한나라당은 또다시 수구세력으로 몰릴 것이 자명하므로 한나라당은 집권세력에 앞서 온건개혁의 이미지를 선점해야 한다는 점이 그것이다.

    발표문은 한나라당 온건개혁화의 구체적 방향으로 당 내부 개혁과 리더십 교체를 주문했다. 이 밖에 국민적 이슈에 대한 지속적인 온건개혁 노선 견지, 대통령에서 국회로 정치 중심 이동, 원내총무나 상임위원회 위원장 및 간사의 역할 강화도 요구됐다. 발표문은 또한 “한나라당 지지세력은 한나라당이 보수라는 용어를 포기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나라당의 한 의원은 “한나라당 지지층 중 보수층이 차지하는 비율이 현저하게 높은 만큼 한나라당이 보수 이념을 포기하기란 쉽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나라당의 또 다른 당직자는 “지지층을 대변하는 것은 보수말고도 많다. 보수라는 용어 자체에 부정적 이미지가 너무 많아졌기 때문에 한나라당이 보수를 계속 표방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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