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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新구로아리랑'

악몽으로 치닫는 ‘코리안 드림’

가리봉동 조선족들 불법체류 단속 피해 하나둘 떠나 … “빚은 빚대로, 고생은 고생대로 했는데”

  • 성기영 기자 sky3203@donga.com

악몽으로 치닫는 ‘코리안 드림’

악몽으로 치닫는 ‘코리안 드림’

가리봉동 조선족타운에서는 최근 사소한 불법행위에 대해서도 조선족끼리 신고하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빈 소줏병이 벌써 다섯 병째를 넘어서고 있었다. 1월23일 오후 4시 반.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 일명 조선족타운. 허름한 중국음식점 골방에 모인 4명의 ‘불법체류자’들은 오늘 일당을 포기하고 벌써 3시간째 술타령이다.

“누가 불법인 거 모르나? 기껏 노가다 뛰어서 겨우 빚 갚고 돈 좀 모아보려고 하니까 나가라니 속이 뒤집히는 거 아니냐고….”

“설날이라구요? 당장 3월만 지나면 붙잡으러 오겠다는데 올해는 설이고 뭐고 없지요. 떡국 먹을 기분도 안 나고….”

“한국 온 지 5년이 됐으면 뭐하고, 6년이 됐으면 뭐하냐? 들어오자마자 아이엠에프 맞아서 3년은 허송세월하고 제대로 돈 번 지는 이제 겨우 2년 넘을까말깐데, 무조건 들어온 지 3년 넘었으면 나라가니 환장할 노릇이지.”

부동산 업소엔 쪽방 매물 급증 … 거리엔 인적 뜸



정부가 3월로 시한을 정해 입국한 지 3년이 넘은 조선족들은 모두 강제출국시키겠다는 방침을 세운 뒤 가리봉동 조선족타운에서는 이런 광경을 여기저기서 볼 수 있다.

대낮부터 연신 소줏잔을 비우던 조운호씨(가명·48·중국 헤이룽장성)는 1996년 산업연수생으로 입국했다. 헤이룽장성에서부터 조씨를 형님으로 모시던 김춘석씨(가명·39)가 입국한 것도 98년. 법무부의 ‘3년 이상 체류자 강제출국 방침’에 따르면 이들은 모두 3월 말이면 보따리를 싸야 할 형편이다. 그러나 이들 4명의 ‘불법체류자’들은 이날 난상토론 끝에 일단은 가리봉동을 떠나지 않기로 의견을 모았다. 강제출국 당할 때 당하더라도 이대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정부가 불법체류자들에 대해서 단속의 칼을 빼들기 시작하면 가장 먼저 가리봉동 조선족타운을 칠 것이라는 소문은 이미 이 동네에서는 ‘정설’이 된 지 오래다. ‘소문’은 아직 ‘사실’로 바뀌지 않았지만 비슷한 조짐은 나타나고 있었다. 3월 출국 시한이 다가오면서 지난해 말부터 자취를 감추는 조선족들이 하나둘씩 늘어나더니 이제는 아예 거리 풍경조차 썰렁하기 그지없어진 것이다. 가리봉동 사람들은 한결같이 “정부방침 확정 이후에 입국한 지 3년이 지난 조선족들은 단속에 걸리기 쉬운 집단거주지역을 떠나 지방 중소도시 등으로 몸을 숨기고 있다”고 전한다. 이런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가리봉동 거리는 썰렁하기만 했다. 최근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매물들을 적어놓은 부동산 중개업소 앞의 안내판은 거의 빈틈이 없었다. 보증금 50만원에 월세 10만원짜리에서부터 보증금 100만원에 월세 10만~15만원 정도의 ‘쪽방’들이 대부분이다.

악몽으로 치닫는 ‘코리안 드림’

정부방침대로라면 오는 3월 중국으로 돌아가야 할 조선족 불법체류자들이 “이대로 떠날 수는 없다”고 입을 모은다.

이곳에서 20년째 부동산 중개업을 해온 ‘삼경사 부동산’ 하동원씨는 “평소 한 달에 10건 정도의 월세 물건이 나온다면 최근 들어서는 3건이나 거래될까말까한 실정”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거래는 끊겼어도 매물은 여전히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 부동산 중개업소에만 올해 들어 15개의 월세방이 매물로 나왔다. 3~4평짜리 쪽방에 살던 조선족들이 가리봉동을 떠나고 있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느낄 수 있는 곳은 바로 이 동네 부동산 중개업소들이었다. 하씨는 옛날식 연탄난로 연통으로 새어나오는 누런 그을음만 쳐다보고 있었다. 가리봉동 조선족타운의 상인들을 먹여 살리는 사람들은 조선족들이다. 거리에는 한 집 건너 중국어 간판들이 눈에 뜨일 정도. 당연히 조선족들이 가리봉동을 떠나기 시작하면서 상인들도 불안감에 휩싸이고 있다.

가리봉시장 입구에서 ‘자매식당’을 운영하는 채정옥씨(45)는 “조선족들이 이 거리를 떠나면 식당문을 닫아야 할 판”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가리봉시장에는 줄잡아 200명 가까운 상인들이 주로 조선족들을 상대로 영업해 생계를 잇고 있다. 식료품점에 내놓은 물건들도 ‘건두부’라고 불리는 중국식 두부, ‘장차이’라고 불리는 중국식 야채 등 온통 중국 식자재들이다.

악몽으로 치닫는 ‘코리안 드림’

중국어 간판이 가득하던 가리봉시장에는 이제 썰렁한 기운만이 감돌고 있다.

채씨는 “한 시간을 지키고 있어야 시장에 지나다니는 조선족 교포들이 10명도 채 안 될 것”이라며 “최근 이 지역 조선족들이 30% 이상 줄어든 것 같다”고 말했다.

“조선족들 다 떠나가면 이 동네 상인들은 쫄딱 망합니다. 보다 못한 상인들이 이제 무슨 단체라도 만들어서 시위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술렁거립디다. 정부가 불법체류자들 단속하는 거야 좋지만 그 사람들 때문에 먹고사는 우리 같은 사람들 형편도 봐가면서 때려잡아야 하는 것 아니요? 가만히 보면 우리나라에서 힘들고 궂은 일은 조선족들이 다 하는 것 같더구만….” 가리봉1동에서 2년째 ‘상해반점’을 운영하는 김종호씨는 아예 금방이라도 팔을 걷어붙일 태세였다. 김씨는 지난해 3월 불법체류 조선족들의 자진신고 방침이 발표되고 난 뒤 3~4개월간이 가리봉동 차이나타운의 최대 호황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합법적으로’ 체류기간이 연장됐다는 안도감에 막노동을 마치고 돌아온 조선족들이 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소줏잔을 기울이는 날이 늘어났고 덩달아서 이 시장통 경기도 춤을 췄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7월부터 불법체류 조선족에 대한 단속 강화 방침이 발표되면서 하나둘씩 자취를 감추는 조선족 동포들이 늘어났다. 가리봉동을 떠나는 조선족들은 “들키지 않는 곳으로 간다”는 말만을 남기고 자신의 행적을 알리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모여 있을수록 단속에 노출되기 쉽다는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악몽으로 치닫는 ‘코리안 드림’

조선족들이 주로 거주하는 ‘쪽방’ 풍경. 최근 방을 내놓고 잠적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고 있다.

가리봉시장 주변 분위기 역시 최근 들어 험악해지기 시작했다. 얼마 전까지 조선족과 한국인 사이에 시비가 붙으면 조선족들은 동포들을 에워싸고 경찰과 맞서기까지 해 경찰들이 골치를 썩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쓸데없이’ 앞에 나서는 조선족들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주변 상인들은 “대신 최근에는 사소한 불법행위라도 발견되면 조선족들끼리 서로 신고하는 일이 잦아졌다”고 말했다. 3월 출국 시한이 점점 다가오면서 조선족타운은 불안과 두려움이 더해가고 있다.

그러나 아직 정부방침에 따라 자진 출국하겠다는 사람들은 별로 없는 실정이다. 얼마 전 서울조선족교회가 조선족 436명을 상대로 설문조사한 결과 17.9%(78명)만이 ‘올해 3월말까지 자진 출국하겠다’고 답했을 뿐, 61.0%(266명)는 ‘정부방침에 따르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런 조사결과를 증명이라도 하듯 가리봉동을 떠나 잠적하는 조선족들의 행렬은 이번 설을 기점으로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서울 조선족교회 서경석 담임목사는 “조선족 동포들이 1년만 출국을 연기해주면 전원 출국을 서약하겠다는 서명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만큼 법무부가 3월 출국시한을 1년 정도 늦춰 불법체류를 합법체류로 전환하도록 하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주장했다. 조선족교회측은 서명운동에 참여한 조선족 숫자가 한 달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4만명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주간동아 2003.02.06 371호 (p70~72)

성기영 기자 sky320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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