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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광장 | 재즈 명인들 잇단 내한공연

서울의 2월엔 재즈가 흐른다

  • 황덕호/ 재즈 칼럼니스트 pannonica2001@yahoo.co.kr

서울의 2월엔 재즈가 흐른다

서울의 2월엔 재즈가 흐른다

1960년대 데뷔해 지금까지 최정상의 재즈 피아니스트로 군림해온 허비 핸콕(위).마일스 데이비스와 존 콜트레인 탄생 75주년을 기념해 결성한 올스타 밴드의 허비 핸콕, 마이클 브레커, 존 패티투치, 윌리 존스, 로이 하그로브 (오른쪽 사진 왼쪽부터) .

부산에 살고 있으며 한때 공연기획사에서 일했던 열혈 재즈팬 J씨는 지난 연말부터 2003년 2월 달력을 자주 들춰보곤 했다. 그리고 해를 넘겨 2월이 점점 다가오자 설렘과 한숨이 교차한다. 이유는 분명했다. 2003년 2월 셋째 주에만 굵직한 재즈공연이 잇따라 세 차례나 열리는데 도무지 어느 한쪽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2월12일 허비 핸콕과 올스타 밴드 연주, 13일 브래드 멜다우의 피아노 독주회. 16일 짐 홀 트리오 연주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런 거장급 재즈 연주자들의 한국 무대는 언감생심이어서 이번에 놓치면 언제 볼 수 있을지 기약하기 어렵다. 그러나 공연 티켓값에 부산에서 서울까지 오가는 교통비까지 포함하면 매회 15만원 정도 되는 경비가 그에게는 적지 않은 부담이다. 영화 ‘소피의 선택’에서처럼 잔인하게 단 한 편의 공연만 선택해야 한다면?

재즈팬들의 고민은 세 공연이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는 데 있다. 우선 핸콕, 브레커, 하그로브, 패티투치의 올스타 밴드는 천재일우의 이벤트다. 이들은 정규밴드가 아니라 이 공연을 위해 일시적으로 모인 밴드다. 만약 각각의 뮤지션이 만들어낸 음악을 들어본 적이 있는 골수 재즈팬이라면 이들이 한데 어울려 빚어낼 황홀한 연주를 상상하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다.

허비 핸콕이 누구인가. 1960년대 마일스 데이비스 5중주단의 멤버로 활약한 이래 오늘날까지 다양한 재즈 스타일을 주도하면서 정상의 재즈 피아니스트로 군림해왔다. 마이클 브레커 역시 70년대 형 랜디 브레커와 결성한 그룹 브레커 브라더스를 시작으로 30년의 연주 경력을 자랑한다. 브레커는 80년대 후반부터 존 콜트레인의 영향이 느껴지는 초절기교 연주로 최고의 테너 색소폰 주자로 평가받아왔다.



한편 로이 하그로브는 윈튼 마살리스와 함께 90년대에 등장한 신예 트럼펫 주자로, 현재 재즈팬들 사이에서 윈튼을 앞지르는 인기를 얻고 있다. 연주력도 점차 윈튼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을 담아내고 있다는 평이다. 존 패티투치는 80년대 칙 코리아 밴드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90년대 최고의 베이시스트들 중 한 명이다. 역시 출중한 기교로 어떤 작품도 완벽히 소화해내는 뮤지션이다.



이들은 2001년 마일스 데이비스와 존 콜트레인 탄생 75주년을 기리기 위해 함께 투어에 나섰으며 당시의 실황연주를 담은 음반 ‘음악의 지표들’(Directions in Music·버브)은 2002년 발표된 재즈음반 중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수작이다.

그러나 쟁쟁한 스타들을 한꺼번에 만나는 올스타밴드 연주만큼이나 브래드 멜다우의 독주회도 유혹적이다. 만약 지난해 3월 브래드 멜다우 트리오의 내한공연을 놓쳤다면 더더욱 이 독주회에 집착할 수밖에 없다. 트리오 활동을 주로 하는 브래드 멜다우의 흔치 않은 독주회라는 사실이 팬들을 더욱 안달하게 만든다.

서울의 2월엔 재즈가 흐른다

90년대 최고의 베이시스트로 꼽히는 존 패티투치.

브래드 멜다우는 빌 에반스, 키스 자렛의 계보를 잇는 재즈 피아노의 젊은 거장이다. 빌 에반스와 키스 자렛이 오늘날 재즈 피아노에 끼치고 있는 막대한 영향력을 생각할 때, 멜다우가 이 계보의 ‘법통’을 이었다는 세간의 평가는 수많은 재즈 피아니스트들 가운데 그가 얼마나 독보적인 존재인가를 가늠하게 한다. 그가 자신의 트리오를 통해 발표하고 있는 연작 ‘트리오의 예술’ (The Art of Trio·워너)은 이러한 평가가 결코 과장이 아님을 말해준다. 때론 지나치게 현학적으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만이 지니고 있는 젊은 실험성은 앞으로 독자적인 방향으로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담보하고 있다.

그렇다면 2월의 재즈공연은 올스타 밴드 대 브래드 멜다우의 양강구도일까? 천만에. 이 두 공연에 대한 깊은 관심이 거슬러 올라가자면 마일스 데이비스, 존 콜트레인, 빌 에반스 등과 같은 ‘흘러간 전설’에 닿아 있다면, 자신의 트리오를 이끌고 처음으로 한국 무대를 찾는 기타리스트 짐 홀의 공연은 말 그대로 ‘살아 있는 전설’과의 만남이다.

과거 지미 주프레, 소니 롤린스, 폴 데스몬드에게 더없이 영민한 반주를 선사했던 올해 73세의 이 베테랑 기타리스트는 단적으로 말해 기타의 영역에서 빌 에반스에 버금가는 업적을 남긴 스타일리스트다. 빌 에반스 그리고 베이시스트 론 카터와의 이중주가 말해주듯 그의 연주는 독주, 반주라는 재즈의 관습적인 이분법에서 벗어나 상대 연주자와의 즉흥적인 대화를 통해 음악을 풀어나가는 소위 ‘인터플레이’ 스타일을 확립했다. 또 60년대부터 들려줬던 그의 부드러운 음색과 악절은 팻 메스니, 존 애버크롬비, 빌 프리셀 등과 같은 오늘날의 기타 리더들이 모두 짐 홀의 자장(磁場) 안에 있음을 말해준다.

최근까지도 전성기의 기량을 온전히 간직하고 있는 그는, 지난 20여년간 꾸준히 함께해온 돈 탐슨(베이스·피아노), 테리 클락(드럼)과 함께 한국공연을 할 예정이어서 재즈 팬들은 기대에 부풀어 있다.

그렇다. 정말이지 가슴이 부푼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마냥 부풀 수만은 없다. 도대체 어떻게 하나만 고르란 말인가. 그리고 왜 이렇게 한꺼번에 몰려오는 것일까. 재즈 명장들의 잇따른 한국 무대를 설명하려면 아무래도 작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서울의 2월엔 재즈가 흐른다

기타리스트 짐 홀의 공연은 ‘살아 있는 전설’과의 만남이다(왼쪽). 프랑스 출신의 노장 재즈 피아니스트 클로드 볼링(가운데)과 트리오.

2002년 여름, 국내 재즈공연사는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었다. 찰리 헤이든, 곤잘로 루발카바, 브래드 멜다우 트리오, 브랜포드 마살리스 쿼텟, 사이러스 체스트넛 트리오, 다이아나 크롤, 투츠 틸레망까지. 이 정도의 양과 질이라면 국내 재즈공연계는 포만감으로 한해를 마감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3월부터 8월까지의 이 스케줄은 서곡에 불과했다. 9월 들어 존 스코필드 밴드, 포플레이, 팻 메스니 그룹(이하 PMG)이라는 최고의 퓨전 재즈밴드들이 한 달 내내 서울을 방문했다. 특히 PMG의 총 6회 공연은 공연 3개월 전부터 매진 기록을 세웠다. 아울러 PMG와 같은 일급 밴드가 6회 공연이라는 장기 스케줄로 국내무대를 찾은 것 자체가 전례 없는 일이었다.

일급 재즈 뮤지션들의 방한 러시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10월 들어 윈튼 마살리스와 링컨센터 재즈 오케스트라의 공연이 있더니 이어서 브레커 브라더스, 조지 벤슨, 칼라 블레이 트리오, 로라 피지, 존 애버크롬비 트리오가 11월 셋째 주와 넷째 주에 집중적으로 국내 무대에 오름으로써 2002년 재즈공연의 정점을 이룬 것이다. 마치 서울에서 대형 국제 재즈 페스티벌이 열린 것처럼 황홀한 상황이었다.

이채로운 것은 PMG 공연을 비롯한 이들 공연 대부분이 흥행면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다는 점이다. 재즈 페스티벌을 방불케 하는 촘촘한 공연 스케줄이 전해졌을 때 몇몇 평론가들은 물론이고 공연 기획자들마저 회의적인 전망을 내놓았던 것과는 정반대의 결과였다. 몇몇 언론은 재즈라는 무거운 음악에 젊은층 관객들이 몰린다는 사실이 꽤나 당혹스러웠는지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는데, “월드컵 이후의 공허감을 재즈공연을 통해 채우려고 했다”는 분석이 나오는가 하면 갑작스런 재즈붐을 젊은층의 명품바람과 동일시하려는 억지스러운 분석도 등장했다.

서울의 2월엔 재즈가 흐른다

빌 에반스, 키스 자렛의 계보를 잇는 젊은 거장 브래드 멜다우(왼쪽). 한국에서 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는 하모니카 연주자 리 오스카. 이번 한국공연에서는 맨해튼 트랜스퍼 밴드와 함께 한다.

하지만 이에 대한 보다 설득력 있는 해석은 일종의 ‘시너지 효과론’이다. 2002년 한해 동안 재즈 콘서트가 빈번하고 그만큼 언론에 자주 오르내리자 ‘콘서트 고어’라 불리는 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각각의 공연이 단순히 매표 경쟁을 벌인 게 아니라 궁극적으로 시너지 효과를 일으킨 것이다. 마치 특정 업소를 고집하지 않고 낙지를 먹으려면 무교동으로 가고, 아구찜을 먹으려면 낙원동으로 가듯이 2002년 음악팬들은 ‘재즈’의 맛을 찾아 공연장으로 몰렸다.

그렇다면 이러한 ‘시너지 효과’가 올해도 지속될 수 있을까. 불행히도 낙관하기는 이르다. 재즈붐이 지속되려면 공연의 여파가 음반판매와 국내 재즈클럽에까지 미쳐야 하는데 그러한 기미는 아직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음반업계 관계자들은 “재즈붐이 남의 동네 이야기처럼 들린다”며 시큰둥해 한다. 한마디로 2002년에 재즈계가 안정적인 팬을 확보했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그럼에도 올해 국내 재즈공연은 위의 세 공연으로 끝나지 않는다. 클로드 볼링(2월20~22일), 국내 정상급 피아니스트 곽윤찬(2월23일), 알 자로(3월4~5일), 디디 브리지워터(3월5일) 등 작년 상반기보다 훨씬 빡빡한 공연 일정이 잡혀 있다.

한편에서는 이와 같은 재즈 과열 양상에 대해 작년의 흥행성적이 ‘허수’로 작용해 올해는 공연계가 위태로워질 수도 있다는 분석을 내놓는다. 그러나 재즈공연 러시가 반드시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오리라고 속단할 수는 없다. 장기적으로 볼 때 이들의 내한공연이 한국에 재즈의 뿌리를 튼튼히 내리게 할 것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흥행이 흑자든 적자든 이번 기회에 세계 최고의 연주를 접한 사람이라면 견고한 재즈팬이 될 가능성이 높다.

미국에서 재즈가 침체기에 있던 70년대, 과거에 비해 규모가 한층 줄어든 ‘몬터레이 재즈 페스티벌’에서 한 젊은 청중이 이 축제의 프로그래머였던 오린 킵뉴스에게 물었다. “몇 년 후면 재즈가 정말 죽음에 이를까요?” 그러자 킵뉴스는 이렇게 반문했다. “혹시 정신과 음악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을 아시나요?”

이번 공연들이 아무리 적자가 난다 해도 허비 핸콕, 짐 홀, 브래드 멜다우가 뿌린 재즈의 씨앗은 결코 죽지 않는다. 한 달에 한 편만 골라야 하는 선택이 고통스럽더라도 재즈 팬들은 여전히 설렘 속에 그 고통을 즐길 것이다.







주간동아 2003.02.06 371호 (p112~115)

황덕호/ 재즈 칼럼니스트 pannonica2001@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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