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35

2002.05.23

개인 유전자 따라 약도 ‘맞춤제조’한다

증상 같아도 약은 따로따로… 부작용 줄이고 치료 효과는 껑충

  • < 김대공/ 동아사이언스 기자 > a2gong@donga.com

    입력2004-10-04 14: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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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 유전자 따라 약도 ‘맞춤제조’한다
    결혼해 한 아이의 엄마가 된 주부 K씨는 최근 매사 의욕이 없고 피곤하기만 했다. 어떤 일이든 걱정부터 앞서고 별것 아닌 일에 까닭 모를 죄책감이 들어 가정생활조차 힘들었다. 병원에 찾아가 본 결과 K씨는 초기 우울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주부는 사회와 동떨어져 있다’는 심리적 압박감이 스트레스로 작용해 우울한 상태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담당 의사는 네 종류의 화학약물을 함께 투여하면 완치될 수 있다며 K씨를 안심시켰다. 그런데 약물치료를 시작하자 전에 없던 두통이 생기고 구역질을 하며 가끔 발작과 졸도 증세도 나타났다.

    K씨가 병원 치료를 받기 얼마 전, S의료원 유전자클리닉 의사들은 ‘CYP2D6’ 유전자에 문제가 있으면 화학약물 ‘프로작’의 대사가 진행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프로작은 미국 일라이릴리사(社)에서 개발한 항우울약으로, 뇌에서 신경흥분을 담당하는 세로토닌의 재흡수를 억제해 기분을 좋게 하는 것. 세로토닌은 뇌 속의 신경세포 말단에서 분비되는 신경전달 물질로, 우울증 환자는 정상인에 비해 세로토인의 분비가 적다. 따라서 신경흥분을 이웃 신경세포에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 만약 신경 말단에서 방출된 세로토닌의 일부가 다시 처음 방출 부위로 되돌아가지 않는다면 신경흥분을 고스란히 이웃 신경세포에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원리를 이용한 약이 바로 프로작이다. 프로작은 세로토닌의 재흡수를 억제해 우울증 환자의 기분을 좋게 한다.

    개인 유전자 따라 약도 ‘맞춤제조’한다
    하지만 프로작은 모든 우울증 환자에게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약물이 체내에서 약효를 나타내려면 특정효소에 의해 분해된 다음 질환 부위로 운반돼야 하는데, 이때 필요한 효소는 CYP2D6 유전자에 의해 만들어진다. 하지만 K씨의 CYP2D6 유전자는 정상인과 달리 염기 하나가 바뀌어 정상적인 효소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결국 의사의 처방대로 프로작을 복용했지만 프로작이 분해되지 않은 채 체내에 계속 쌓여 부작용이 나타난 것이다.

    CYP2D6 유전자에 변이가 발생할 확률은 인구의 0.05%로 극히 드물지만 K씨는 여기에 속했다. 그러나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담당 의사는 K씨의 DNA에 맞는 치료법을 적용했다. 화학요법제에서 프로작을 빼고 치료한 결과 K씨의 증세는 차츰 호전됐고 요즘은 행복하게 지내고 있다.



    이처럼 유전자 하나에 문제가 생기면 치료를 받아도 병이 낫지 않고 오히려 치료제에 중독되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 이를 밝혀낸 것은 ‘약리유전체학’(pharmacogenomics)이라는 새로운 학문의 쾌거다. 약리유전체학은 인간게놈 프로젝트의 결과와 DNA칩 같은 신기술에 전통 의학을 결합해 환자의 유전적 특성에 맞는 치료법을 제시한다.

    K씨처럼 유전자 염기 한두 개가 바뀌는 현상을 ‘단일염기변이’(SNP· Single Nucleotide Polymorphisms)라고 한다. 모든 사람의 DNA는 99.9%가 동일하다. 단지 30억개의 염기 가운데 0.1%, 즉 300만개의 염기가 사람마다 다를 뿐이다. 이 차이가 눈과 피부색, 인종, 생김새, 체질, 질병의 감수성 차이를 만들어낸다.

    이렇게 개인과 인종에 따라 다른 단일염기변이는 약리유전체학이 주목하는 연구 대상이다. 약리유전체학이 성공하면 한 종류의 치료제를 모든 환자에게 쓰는 방법은 원시적인 의학으로 취급받을 것이다. 앞으로는 ‘천식’이라는 병을 획일적으로 치료하는 대신 환자 개인의 특성에 맞춘 개인 약물요법 시대가 올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전망한다. 앞으로는 개인의 유전적 특성에 따라 약이 조제된다는 말이다.

    개인 유전자 따라 약도 ‘맞춤제조’한다
    약리유전체학으로 개발중인 신약 중 가장 눈길 끄는 분야는 치매다. ‘21세기 질환’이라 불리는 치매(dimentia) 또는 알츠하이머병(Alzheimer disease)은 오늘날 85세 이상 노인의 절반 정도에서 나타난다. 그동안 치매의 원인에 대해 많은 사실이 밝혀져 치료제도 여기에 맞게 개발됐다. 하지만 이들 약물은 일부 치매 환자에게는 효과가 일시적이거나 미약하고 심각한 부작용이 나타나는 등 아직 논란의 여지가 많다. 최근에는 약리유전체학을 이용해 인종과 민족의 유전적 특성에 따라 치매의 원인도 조금씩 다르다는 사실이 밝혀져 치매 극복의 새로운 돌파구가 마련되고 있다.

    질병이라고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생활을 불편하게 하는 요소를 없애주는 신약도 약리유전체학을 이용해 활발히 개발되고 있다. 대표적 분야는 남성 발기부전 치료제다. 기존의 발기부전 치료제로는 미국 화이자사가 개발한 비아그라가 가장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비아그라는 두통이나 얼굴 화끈거림, 심장에 대한 부담 등 여러 부작용을 나타냈다. 이에 따라 전 세계 제약회사들은 비아그라의 부작용을 없애고 개인의 유전적 특성에 맞는 ‘그들만의 비아그라’를 개발하는 데 박차를 가하고 있다. 최근 개발되고 있는 발기부전 치료제는 독일 바이엘사의 ‘바데나필’과 미국의 릴리아이코스사의 ‘사알리스’가 대표적이다. 이 신약들은 최근의 유전체학 연구 결과를 반영한 것으로 기존 비아그라의 부작용을 줄이고 각 인종의 유전 특성에 맞춰 개발되고 있다.

    한편 제2의 비아그라 개발에는 국내 제약회사들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한국형 비아그라 개발의 선두주자는 동아제약이다. 지난 1997년부터 제2의 비아그라 연구 개발에 착수한 동아제약은 최근 기존의 비아그라보다 효능이나 부작용 면에서 좀더 뛰어난 발기부전 치료제를 개발했다. ‘DA-8159’라고 이름 붙여진 이 신약은 현재 동물실험을 거쳐 임상실험중이며 2003년 시장 출시를 목표로 삼고 있다.

    또한 국내 한의업계에서도 한국형 비아그라 개발에 상당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체질에 따라 처방해 온 한의학에서는 어쩌면 약리유전체학이라는 개념이 별반 새롭게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말초신경과 혈관확장을 촉진하는 한약재료를 이용해 환자의 체질에 맞게 처방하는 한국형 비아그라가 나온다면 그야말로 최상의 발기부전 치료제가 될 것이다.

    복잡하고 신경 쓸게 많은 현대 사회에서 알약 하나로 젊음을 되찾고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며 항상 행복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면 그 소식은 분명 인류에게 ‘복음’일 것이다. 하지만 신약 개발의 역사를 살펴보면 인류에게 복음으로 여겨지던 신약이 곧 재앙으로 바뀐 경우가 많다. 지난 20세기 초 항생제 페니실린의 발견은 세균과의 전쟁에서 인류에게 결정적인 무기를 제공했다. 하지만 무절제한 항생제의 남용은 어떤 항생제도 듣지 않는 강력한 병원균을 출현시켰다.

    최근 폭발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첨단 생명공학과 의학은 우리에게 알약 하나로 ‘천국’을 약속하는 듯하다. 그러나 질병의 고통에서 해방되고 삶의 사소한 불편마저 해소하는 복음이 언제 어떤 재앙을 가져올지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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