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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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나토에서 입김 세진다

권리 격상으로 美와 양강체제 구축할 듯 … 유럽국들 “미국 하나도 벅찬데” 긴장

  • < 최재덕/ 유럽문화정보센터 연구원 > sahara2@orgio.net

    입력2004-11-01 15: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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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 나토에서 입김 세진다
    환경운동가 시절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어둠침침한 군사주의의 아성’으로 비판하곤 했던 독일의 외무장관 요시카 피셔는 최근 다시 나토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결정적인 이유는 나토 내에서 점점 가시화되고 있는 러시아의 영향력. 상황을 탐탁지 않게 여기기는 다른 유럽 외무장관들도 마찬가지다.

    이들이 염려하는 것은 나토가 워싱턴과 모스크바의 이중 지배체제 아래 놓이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러시아와의 긴밀한 협력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뜩이나 미국 주도하에서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는 터에 러시아로 인해 서유럽 국가들이 더욱 움츠러들 것은 자명한 일.

    소비에트 붕괴 이후 나토와 러시아는 1997년 창설된 ‘상설공동협의회’(PJC)의 테두리 안에서 소극적인 협력 관계만을 유지해 왔다. 한 번도 정상적인 활동을 벌인 적이 없는 이 회의체의 매월 정기회의는 제한된 의사 일정과 복잡한 절차로 늘 혼란을 겪곤 했다. 기존 회원국들의 의견을 취합한 다음 별도로 러시아의 ‘자문’을 구하는 ‘19+1’ 형식이었던 것.

    그러나 이 같은 상황은 지난 3월 초 공개된 ‘새로운 20개국(나토 19개국+러시아) 공동안보위원회’ 계획안에 따라 완전히 달라질 전망이다. 오는 5월28일 이탈리아 로마에서 각국 정상들이 모여 합의, 서명할 이 계획안은 러시아에 나토 정회원과 다름없는 권리를 부여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우선 회의 자체가 2주에 한 번씩 열리는 것으로 변경된다. 회의장의 원형 테이블에는 러시아 대표(R)가 알파벳 순서에 따라 포르투갈(P)과 스페인 대표(S) 사이에 비집고 자리를 잡는다. 나토 사무총장이 단독 회장을 맡게 되며 기존의 19개 국가끼리 따로 모여 미리 입장을 조율할 수도 없다. 한편 러시아는 자국에서 발생한 주제를 회의 의제로 상정할 수도 있고, 나토의 핵심인 군사위원회와 정치위원회에서도 마찬가지 권리를 누리게 된다. 형식적으로는 나토 가입국가가 아니지만 실질적으로는 대부분의 권리를 행사하게 되는 셈. 물론 기존 19개국이 러시아에 맞설 수 있는 장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러시아가 반대하는 사안일지라도 19개 국가는 이를 무시하고 단독으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것. 그러나 독일의 한 고위 외교 관계자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한 바 있다. ‘동등한 권리 부여’라는 취지를 거스르다 모스크바의 비난을 사는 상황을 자초하는 일은 없으리라는 분석이다.



    이 같은 변화는 나토 창설 당시의 상황이나 목적에 비추어볼 때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나토는 옛 소련 및 바르샤바조약기구 동맹국들의 침공에 대비해 서방 국가들의 연합작전 수행을 위해 만들어진 군사기구. 이제 과거의 적이 브뤼셀에서 ‘동맹국’의 한 탁자에 앉게 된 형국이다.

    외교 전문가들은 러시아가 나토 내에서의 지위 강화를 통해 서방세계의 문을 열고 있다고 말한다. 이미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발트해 연안 3개국의 나토 가입을 흔쾌히 받아들이는가 하면, 미국의 탄도탄요격미사일(ABM) 협정 탈퇴, 미국-캐나다 상공의 미사일 방어망 구축을 사실상 묵인하는 등 상당한 우호 제스처를 보여준 바 있다. 이는 러시아가 설정한 ‘서구식 경제 발전을 통한 강국화 전략’을 위해서 초강국 미국의 협조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 ‘21세기 에너지 강국’이라는 러시아의 경제발전 비전은 지난 3월23일 러시아가 월 석유 생산량에서 사우디아라비아를 제치고 1위를 기록하면서 더욱 힘을 얻고 있다.

    미국 역시 러시아의 나토 가입에 긍정적이다. 대(對)테러 전쟁에서의 협력은 물론, 중앙아시아의 석유와 가스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데도 러시아의 협조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은 9·11 테러 직후 “미국과 러시아는 공통의 이해를 갖고 있다”고 천명한 바 있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자 다급해진 것은 유럽 국가들. ‘유일한 초강국과 과거의 초강국 사이에 길고도 거대한 현수교가 유럽인들의 머리 너머로 놓이는’ 형국이라고 유럽 외교가의 고위 관계자들은 입을 모은다.

    20개국 위원회는 머지않아 ‘18+1+1’의 형태가 될 것이라는 예측도 나온다. 이렇게 되면 나토는 유럽 18개국과 두 강대국 간의 대립전선으로 재편될 수밖에 없다.

    러시아, 나토에서 입김 세진다
    서유럽 국가들은 나토에서의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자기들끼리의 보다 강력한 협력이 필수적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지난달 열린 유럽 외무장관 회의에서 독일의 피셔 외무장관은 “단합된 유럽인의 새로운 모습을 증명해 보일 것”을 끈질기게 주장했다. 그 결과 올 가을에는 사상 최초로 유럽연합군이 본격적인 군사 훈련을 실시하게 된다. 지난해 말 핀란드 헬싱키에서 열린 EU 정상회담은 ‘미국에 대한 방위 의존을 줄이고, 유럽 내 무력분쟁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유럽연합군 창설’을 결정한 바 있다.

    한편 EU는 동결 상태였던 24시간 위성 지리정보시스템 구축사업 ‘갈릴레오 프로젝트’를 위해 4억5000만 유로(한화 약 4500억원)를 투입하기로 했다. 지금까지 이 분야는 미국의 독무대였던 것이 사실. 미국의 GPS(Global Positioning System)는 하루 두 차례 지구 궤도를 도는 24개의 위성을 통해 수집한 정보를 전세계 항공기와 선박, 탱크와 자동차에 제공해왔다. EU 의장국인 스페인의 교통장관은 “이는 EU가 주권을 갖느냐 종속된 시장이 되느냐의 문제”라며 우주항공산업에서의 대미 종속을 극복하려는 유럽인의 자존심을 드러냈다.

    이에 대한 워싱턴의 반발 역시 간단치 않다. 유럽인들이 원하는 주파수는 군사 목적에 사용되는 것이라는 게 미국의 견해다. 갈릴레오 위성망은 1차적으로는 자동차, 선박, 휴대폰과 컴퓨터 이용자들에게 정보를 제공하지만, 적의 미사일 발사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거나 반대로 자국 미사일의 명중률을 향상시키는 군사목적으로 활용될 수도 있기 때문. 그러나 미국의 이 같은 우려가 서유럽 국가들의 ‘독립의지’에 영향을 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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