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29

2002.04.11

그라운드 환상 지휘자 “내 발을 믿어라”

21세기 최고 ‘플레이메이커’ 자존심 격돌… 불우한 유년 딛고 축구로 ‘야망’일궈

  • < 김한석/ 스포츠서울 체육부 기자 > hans@sportsseoul.com

    입력2004-10-27 15: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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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운한 추방자의 아들과 ‘체 게바라’를 존경한 거친 반항아. ‘21세기 최고의 플레이메이커’ 자리를 두고 2002 한·일 월드컵에서 자웅을 겨루게 될 두 선수의 유년 시절은 이렇게 요약된다. 98월드컵 우승팀 프랑스의 ‘지주’(zizou) 지네딘 야지드 지단(30·레알 마드리드)과 남미 예선 1위로 2002월드컵 본선에 오른 아르헨티나의 ‘작은 마법사’ 후안 세바스찬 베론(27·맨체스터 유나이티드). 98월드컵을 통해 월드 스타로 발돋움한 두 선수가 각각 북반구와 남반구의 자존심을 걸고 펼치게 될 명예 대결은 2002월드컵의 또 다른 관전 포인트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란 찬사 속에 1980년대 프랑스의 예술축구를 선도한 미셸 플라티니가 지단의 뒤에 있다면, 베론 역시 아르헨티나의 전설적인 축구영웅 디에고 마라도나의 바통을 이어받았다. 명성으로만 따지면 국제축구연맹(FIFA)이 선정한 ‘올해의 선수’에 두 번이나 뽑힌 지단이 단연 화려하다. 그러나 절제된 동작으로 공격을 지휘하는 베론 역시 경기마다 팀의 실익을 극대화하는 능력에서는 결코 뒤지지 않는다.

    두 스타를 비교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불우한 유년 시절과 시련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지켜온 그들의 야망에 대한 이야기다. 지단은 프랑스 남부에 있는 항구도시인 마르세유의 변두리 빈민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제2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군과 함께 싸운 알제리인으로, 1962년 알제리가 프랑스로부터 독립하자 자국에서 추방돼 무작정 프랑스로 건너왔다.

    아버지의 부끄러운 전력과 곤궁한 경제력 때문에 어린 시절의 지단은 그리 행복하지 못했다. 유명 유소년 클럽 대신 길거리에서 축구를 배워야 했던 것 역시 그 때문이었다. 숨은 재능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은 11세 때. 이 불운한 천재에게 주목한 지역 유소년팀 코치의 추천으로 ‘셉템므 스포르 올랭피크’에 입단하면서부터였다. 84년 유럽선수권대회에서 볼보이로 일하며 옆에서 지켜본 플라티니의 플레이는 소년의 영혼에 불을 질렀다.

    88년 칸 클럽 데뷔, 90년 청소년 대표로 선발, 그리고 94년 드디어 프랑스 대표팀에 발탁. 그해 신인상을 거머쥔 지단은 더 이상 소년이 아니었다. 96년부터 이탈리아 유벤투스에서 절정의 명성을 확인한 뒤 지난해 6700만 달러라는 세계 축구 최고의 이적료를 챙기며 스페인 레알 마드리드에 둥지를 튼 그는 이제 스스로 플라티니가 되었다.



    지단과 비교해 보면, 60년대 아르헨티나 1부리그와 대표팀에서 스트라이커로 명성을 날린 라몬의 아들로 태어난 베론은 행운아였다. 이미 5세 때 유소년팀에서 공을 차기 시작했던 것. 아버지가 ‘마법사’란 별명을 얻으며 활약할당시, 7세의 베론은 유소년팀 경기에서 혼자 13골을 터뜨려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성장기가 순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해충, 사고뭉치, 작은 악동 같은 별명들이 사춘기 시절 끝없는 탈선행각을 벌인 소년 베론에게 따라다녔다. 어머니의 주머니를 뒤져 축구 스티커를 사고, 아버지 차를 훔쳐 여자 꼬시기에 나서곤 했다는 회고는 애교에 가깝다. 학교에서 내준 숙제는 무조건 빼먹는다는 철칙에서부터 여자 팬티만 수집하는 기이한 취미는 전형적인 남미 소년의 반항기를 그대로 보여준다. 대혁명가 ‘체 게바라’의 얼굴을 오른쪽 어깨에 문신으로 새겨넣은 것도 이 시절의 전리품이다.

    오전에는 가게에서 일하고 오후에는 축구로 소일하던 베론의 방황이 끝난 것은 96년 보카 주니어스에서 우상 마라도나를 만난 뒤였다. 이때부터 착실히 명성을 쌓으며 아버지를 따라 ‘작은 마법사’(La Brujita)라는 별명을 얻기 시작한 그는 이탈리아 프로팀들을 거쳐, 지난해 프레미어리그 사상 최고 이적료 3360만 달러를 기록하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안착했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두 선수의 플레이 패턴이 유럽과 남미의 스타일을 바꾸어 갖추고 있다는 점. 지단은 남미의 현란함을, 베론은 유럽 특유의 파워와 스피드가 강점이다. 화려한 개인 돌파와 넓은 시야, 가공할 킥, 자로 잰 듯 정확한 전진 패스를 이어주는 지단의 모습은 어김없이 남미 선수들의 현란한 플레이와 닮았다. 순간순간 360도를 자유자재로 돌면서 상대 수비수를 헤집고 다니는 그의 유연한 플레이는 장대같이 뻣뻣한 유럽 선수들에게서는 결코 볼 수 없는 모습이다.

    그렇다고 얌전한 플레이에만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지단은 투박하기로 소문난 터프가이다. 지난 시즌 유럽챔피언스리그 함부르크전에서 요헨 키엔츠의 얼굴을 머리로 들이받아 광대뼈 골절과 뇌진탕 증세를 일으키게 해 5경기 출장정지 처분을 받기도 했다.

    반면 베론은 내실 있는 팀 플레이를 추구한다. 그는 페이스 조절 능력이 매우 뛰어나다. 아르헨티나가 수위로 월드컵 본선에 연착륙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절제된 경기운영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스피드와 체력을 가장 중요시하는 프레미어리그에서 남미 출신 선수가 성공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러나 유럽 스타일을 가미한 베론의 축구는 빠르게 잉글랜드 축구에 적응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세계 최강 팀으로 이끌고 있다.

    윗머리가 휑하니 벗겨진 지단, 잘 다듬은 수염과 달리 머리를 시원하게 밀어버린 베론. 각각 65경기 18골(지단), 50경기 8골(베론)이라는 A매치 관록을 자랑하는 두 베테랑의 황홀한 플레이가 펼쳐질 날이 이제 2개월도 채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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