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29

2002.04.11

교수 꿈 접고 연예기획사 ‘즐거운 경영’

싸이클론 엔터테인먼트 한기원 사장… 새로운 분야 두려움 없이 패기로 극복

  • < 성기영 기자 > sky3203@donga.com

    입력2004-10-27 14: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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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수 꿈 접고 연예기획사 ‘즐거운 경영’
    이병헌 이정재 장진영 등 톱스타들이 소속돼 있는 싸이클론 엔터테인먼트의 한기원 사장. 연예 매니지먼트 사업을 운영하는 연예기획사 사장들이 대부분 연예활동과 직·간접적으로 관계 있는 분야에 종사했던 점에 비춰 한사장도 대략 비슷한 경력의 소유자라고 판단해 버리면 큰 오산이다. 의외로 한사장은 올초 싸이클론의 대표이사로 취임하기 전만 해도 연예인이라고는 이름조차 제대로 외우지 못하던 경제연구소 연구원 출신이다.

    그의 이력서 맨 앞줄에 쓰인 직업을 정확히 말하면 대학 시간강사다. 한국해양대학교 경영학과 86학번인 그의 원래 꿈은 대학 교수. 해양대를 택한 것도 남들이 손대지 않는 분야를 집중적으로 연구해 단기간에 이 대학에 교수로 정착하기 위해서였다. 게다가 아버지의 절친한 친구가 이 대학에 교수로 재직하고 있어 어느 정도까지는 ‘키워주기로’ 했던 만큼 마음만 먹으면 대학 재학 시절부터 교수라는 미래는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교수라는 목표를 향해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던 중 교수 사회의 보수적 문화와 파벌주의 등에 실망을 느껴 한 학기 만에 박사과정을 포기하면서 그의 인생항로는 ‘직선형’에서 ‘나선형’으로 급선회한다. 시간당 1만8000원을 받던 대학 시간강사에서 60명의 배우와 50명의 모델을 거느린 대형 연예기획사 사장으로 변신하는 과정에는 그만큼 우여곡절이 적지 않았다.

    그는 시간강사 생활을 마친 뒤 당시 포항제철에서 연구소를 만든다는 모집 공고를 보고 포스코경영연구소 연구원으로 취직했다. 5년간 연구원으로 근무하고 나서 전국경제인연합회로 옮겼다. 전경련에서는 기획홍보팀을 새로 만들어, ‘기자들 술 먹이고 기사 빼는’ 구태의연한 홍보 방식을 벗어나 보기 위해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내놓은 적도 있다. 그러다가 전경련에서 처음으로 벤처사업팀을 만들어 벤처 투자에 나선 것이 생소했던 연예계에 첫발을 내딛는 계기가 됐다. 전경련에서 중소 벤처기업들을 지원했던 것을 인연으로 한솔 조동만 부회장과 의기투합해 정보기술(IT) 전문 창업투자회사를 만드는 작업에 참여하게 된 것. IT 전문 창업투자회사를 준비하는 3개월 동안 그는 낮에는 전경련 업무를 하고 밤에는 실무진과 함께 비밀리에 창업투자회사 설립 작업을 준비하는 ‘투잡스’(two jobs)족 신세가 될 수밖에 없었다.

    교수 꿈 접고 연예기획사 ‘즐거운 경영’
    “전경련 업무가 끝나면 곧바로 강남 오피스텔로 가, 저녁 9시부터 새벽 2∼3시까지 일하고 귀가하는 철야작업을 계속했지요. 하지만 남들 뒷바라지만 하던 전경련 업무와 달리 저 스스로 뭔가를 개척해 간다는 생각 때문에 피곤한 줄도 몰랐습니다.”



    이런 준비작업 끝에 그는 한솔아이티벤처스를 만들었고 이 회사에 부사장으로 입성한다. 그 뒤 이 회사가 싸이클론 엔터테인먼트에 20억원을 투자하면서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줄로만 알았던 연예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대기업과 전경련에 오래 몸담았던 한사장이 연예기획사에 취임한 이후 첫번째 착수한 작업은 회사의 회계시스템을 재정비하는 일이었다. 100명이 넘는 연예인에 25명의 매니저가 영화, CF, 드라마 현장을 종횡무진 누비면서 지출해 온 경비에 대해, 영수증 한 장 제대로 보관돼 있지 않은 주먹구구식 경영에 칼을 대기 시작한 것이다. 촬영이 없는 시간에 마신 커피 한 잔, 떡볶이 한 접시에도 영수증을 요구했고 생산성이 낮은 부문은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연예인들도 해외로 진출해야 한다는 소신에 따라 이병헌, 이정재에게는 개인 영어강사를 붙여주기도 했다.

    물론 연예인들의 업무 특성상 ‘온실에서만 커온’ 한사장이 적응하기 어려운 부분도 한둘이 아니었다. 싸이클론 엔터테인먼트 소속의 유명 연예인들은 대부분 한사장을 ‘형’이라고 부른다. 그동안 직장생활을 통해 ‘과장, 팀장, 부사장’ 등으로만 불려온 한사장으로서는 이런 사소한 것부터가 선뜻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을 터.

    뿐만이 아니다. 한밤중에 “형, 술 한잔 사줘!” 하는 이병헌의 전화를 받고 머리맡 시계를 보면 새벽 4시를 가리키는 적도 있었고, 이정재 같은 톱스타의 CF 촬영장에서는 무조건 함께 밤을 새워줘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모든 것이 한사장이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새로운 현상들. 그러나 그는 연예계 문화에 적응하는 것이 하나도 어색하지 않고 오히려 재미있었다고 한다.

    대학 시간강사에서 출발해 다채로운 경력을 거쳐 30대 중반이라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최고경영자의 위치에 오른 한사장에게 경력관리의 비결을 물었더니 의외로 평범한 답변이 돌아왔다.

    교수 꿈 접고 연예기획사 ‘즐거운 경영’
    “학벌보다는 인간관계가 더 중요하더군요. 사회생활을 통해 만난 수많은 사람들이 결국 제 경력관리의 순간순간마다 디딤돌이 되어준 게 큰 힘이 됐습니다.”

    인간관계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술. 그러나 의외로 한사장은 5년 전까지만 해도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그러나 인간관계를 엮어 나가는 데 술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느낀 후 가까이하게 됐다고. 전경련 시절 출입기자들과 술판이 벌어지면 기싸움에서 지지 않으려고 화장실에서 몰래 목구멍에 손가락을 밀어넣어 가면서도 먼저 정신을 놓은 일은 없었다. 그러나 다소곳하게 생긴 외모에서 ‘폭탄주를 70잔까지도 받아 마셨다’는 무용담이 거침없이 나오는 걸 보면 한사장에게 술은 일의 연장임이 분명했다.

    직장을 자주 옮긴 만큼 순간순간 주저하지 않고 빠른 결단을 내린 것도 경력관리에 성공한 중요한 원인이다. 포스코경영연구소에서 전경련으로 옮길 때도 그랬고 한솔 계열의 창투회사로 옮길 때도 전혀 망설임이 없었다고. 새로운 분야 앞에서 우물쭈물하지 않고 ‘부딪쳐 보자’는 패기가 오늘의 한기원 사장을 있게 한 자양분이었던 셈이다.

    “평범한 직장인에게 기회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다가오는 기회도 잡지 못한다면 기회를 만드는 것은 더욱 어렵지요.”

    그때그때 기회를 만들어가며 변신에 성공한 한사장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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