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29

2002.04.11

한평생 禪수행 길 걸어온 ‘절구통 수좌’

  • < 신지홍/ 연합뉴스 문화부 기자 > shin@yna.co.kr

    입력2004-10-26 15: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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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평생 禪수행 길 걸어온 ‘절구통 수좌’
    3월26일 조계종 제11대 종정으로 추대된 법전(法傳·77) 스님은 한국 불교에서 가장 유명한 선승인 성철(性徹) 스님과의 각별한 인연으로 선지식의 길로 접어든다. 1947년 스물네 살로 만행중이던 스님은 해인사로 가던 길에 잠시 문경 봉암사를 들른다. 그곳에서 비단가사 대신 소박한 가사와 장삼, 목발우 대신 와발우를 쓰며 수행에 몰두하는 일단의 탁발 선승들을 만나 눌러앉게 된다. 이것이 성철 청담 자운 등 개혁 선승들이 주도한 전설적인 ‘봉암사 결사(結社)’에 우연히 참여하게 된 배경이다.

    식민 치하에서 물든 왜색(倭色) 불교를 바로잡고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결의를 통해 지금의 조계종 법풍을 확립한 것이 봉암사 결사다.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결사가 중도에 파하자 법전 스님은 성철 스님을 따라 통영 천제굴로 들어가 상좌처럼 시봉하며 선공부를 한다. 1951년에는 성철 스님으로부터 도림(道林)이라는 법호를 얻어 정식으로 사제 관계를 맺는다. 성철 스님이 파계사 성전암에서 10년간 문 밖에 나오지 않는 동구불출(洞口不出)을 할 때, 암자를 철조망으로 두른 이가 바로 법전 스님이다.

    법전 스님은 평생을 선수행으로 일관한 선승이다. 성철 스님이 ‘가야산 호랑이’라면 법전 스님은 ‘절구통 수좌’다. 150cm의 단구인 스님이 한번 참선에 들면 미동도 않고 며칠씩 밤을 새웠던 데서 유래한 별명이다. 스님의 열두 번째 상좌인 월간 ‘해인’의 편집장 원철 스님은 “한번 용맹정진에 들어가면 잠을 안 주무셨다”고 전한다. 스님 스스로도 “정진을 하고 시간이 지나야 화두가 들린다는데, 나는 앉자마자 바로 화두가 들려 힘들이지 않고 정진할 수 있다”는 말을 하곤 했다. “승려는 수행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며 모든 위상은 수행으로부터 나온다”는 말도 입버릇처럼 되뇌었다.

    문경 대승사 묘적암에서 선수행하던 시절, 스님은 한겨울에 찬밥과 김치로 허기만 달래며 씻지도 않고 청소도 하지 않은 채 3개월 두문불출의 혹독한 수행으로 깨달음에 이르고자 했다는 일화가 있다. 파계사 성전암으로 성철 스님을 찾아갔을 때 성철 스님이 그간의 공부를 점검, 스님의 깨우침을 확인하고는 득도를 의미하는 “파참재(罷參齋) 떡을 오늘 해주겠다”고 했으나 사양했다는 얘기는 스님의 겸양지덕을 전해준다.

    원로회의 의장을 역임한 스님은 강원과 선원, 율원을 갖춘 조계종 5대 총림(叢林·사찰) 가운데서도 가장 영향력이 큰 법보사찰 해인사의 방장을 지난 1996년부터 맡아왔다. 한국 불교계의 명문인 해인사는 81년 성철 스님, 99년 혜암 스님 등 역대 종정 9명 중 5명을 배출한 사찰로, 그곳 방장인 법전 스님의 종정 추대는 기정 사실처럼 예견돼 온 일이었다. 법전 스님의 종정 추대는 원로 스님들간의 만장일치 합의라는 대승적 모양을 갖춤으로써 극히 불교적으로 마무리됐다.



    그러나 과정이 반드시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화계사 조실인 숭산(崇山) 스님에 대한 지지도 의외로 만만치 않아 첫 추대회의에서는 선임에 실패했는가 하면, 두 번째 회의에서도 표결로까지 갔다. 해인사의 독주를 곱게 보지 않는 종단 일각의 견제가 컸던 탓이다. 여론의 역풍을 맞아 일단 제동이 걸리기는 했지만 세계 최대의 청동대불을 짓겠다는 해인사의 불사 계획에 법전 스님의 뜻이 실려 있었다는 소문도 불리하게 작용했다. 옥신각신하는 과정에서 복잡한 협상이 오갔다는 말들도 흘러 나왔다. 종정 추대법회 날짜는 4월18일로 잡혔다. 이런저런 이유로 종정의 일성(一聲)에 대중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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