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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성두의 그림읽기|⑫ 로베르트 캄핀의 ‘메로드 제단화’

아기 예수, 마리아의 배 속으로 날아들다

  • < 노성두 / 미술사가 ·서울대 미학과 강사 > nohshin@kornet.net

아기 예수, 마리아의 배 속으로 날아들다

아기 예수, 마리아의 배 속으로 날아들다
날개 달린 천사가 마리아를 찾았다. 천사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심부름꾼이다. 무슨 볼일일까? 마리아는 갓 약혼하고 친정이 있는 나사렛에 혼자 돌아와 있었다. 약혼자 요셉은 호적정리를 위해 고향 베들레헴으로 떠난 후였다.

돌이켜보면 아이가 여섯이나 딸린 홀아비 요셉이 처녀 장가를 가게 된 것은 순전히 기적이었다. 마리아한테 장가가려는 구혼자들이 작대기를 하나씩 나누어 가졌는데, 그중 파란 잎새가 돋은 마른 나뭇가지가 하필 요셉의 것이었다. 홀아비치고는 억세게 운이 좋았던 셈이다.

흰 옷 입은 천사가 마리아의 방으로 들어선다. 예수 탄생을 예고하는 대천사 가브리엘이다. 처녀더러 곧 아기를 가지게 될 것이라고 폭탄 선언을 할 참인데, 마리아는 과연 그 말에 어떤 반응을 보일까? 천사는 내심 조바심이 났을 것이다. 엉거주춤 무릎을 세우고 앉아 왼손의 땀을 연신 허벅지에 문지른다. 한편 붉은 옷을 입은 마리아는 기도서를 읽느라 누가 들어왔는지도 모른다. 내외하느라고 일부러 못 본 척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흰 보로 기도서를 소중하게 감싸 두 손으로 받쳐든 자세가 무척 경건해 보인다.

예수와 천사 함께 등장 …당시 의학 지식 수준 반영

‘메로드 제단화‘는 높이가 겨우 세 뼘 남짓한 초소형 삼면화다. 이만한 크기면 교회에 세워두고 주일마다 열어 보이는 정식 제단화라기보다 신앙심 깊은 가문에서 집안의 좋은 자리에 모셔두는 경배화의 용도에 알맞다. 크기도 눈에 쏙 들어오지만 플랑드르 미술 중 수태고지 장면이 제단화의 복판에 등장한 첫 그림이라 더욱 반갑게 느껴진다.



‘메로드 제단화‘를 그린 화가는 로베르트 캄핀. ‘플레말의 대가‘라는 별명으로 널리 불리는 종교화의 거장이다. 1375년에 태어나 1444년에 죽었으니 이탈리아로 치면 초기 르네상스의 거장쯤 되겠지만, 북유럽에서는 여전히 고딕 미술이 전성기를 구가할 무렵이다. ‘메로드 제단화‘에도 답답한 고딕식 공간과 조형들이 덕지덕지 묻어 있다. 그렇다고 작품의 감동이 덜하다는 뜻은 아니다. 르네상스 원근법이나 비례 이론처럼 수학과 과학으로 말쑥하게 새 단장한 미술도 보기 좋지만, 마리아의 기적 같은 주제는 아무래도 옛 방식대로 자분자분 이야기를 풀어야 제 맛이 난다.

마리아의 방은 꼭 인형의 집처럼 보인다. 모를 낸 둥근 탁자 하나, 긴 나무 의자 하나에 손 씻는 물주전자와 수건도 하나씩 보인다. 덧문 달린 창을 열면 조망이 훤해 한 사람이 사용하기 딱 좋은 크기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목 좋은 15평 오피스텔쯤 될 텐데, 방 안 오른쪽에 붙은 벽난로는 고급 사양품목이라고 보아도 좋다.

마리아의 방 안에 흔히 놓이는 물주전자나 물병은 정결의 상징이다. 탁자 위의 백합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마리아는 멀쩡한 의자를 놔두고 바닥에 내려앉았다. 겸손한 성품 탓이다. 교만이 지옥으로 떨어지는 일곱 가지 큰 죄에 속한다면 겸손은 반대 의미에서 으뜸 덕목으로 친다. 천사의 전언을 듣고 나서도 버티지 않고 ‘이 몸은 주님의 종‘이라고 자신을 낮추었다는 마리아에게 잘 어울리는 자세다. 그러고 보면 방 안의 살림살이들도 모두 마리아의 선한 덕목과 영적 속성을 나타내고 있다.

천사가 앉은 뒤쪽 벽에는 두 개의 둥근 창문이 나 있고, 창문을 통해 빛이 스며든다. 천사 날개 위쪽을 보면 일곱 줄기 황금 빛살이 하느님의 말씀을 대신해 방 안으로 날아드는데, 빗살 위에 웬 아기가 떠 있다. 이 아기가 바로 예수다.

당시 북유럽의 의학 지식은 남성의 씨앗 속에 티끌보다 작은 아기가 들어 있는 줄 알았다고 한다. 그러다 여성의 태중에 들어가 원래 있던 모양 그대로 성장한다고 생각했다. 지금이야 다 아는 상식이지만, 그때는 태아가 임신 3주까지 아가미에다 꼬리가 길게 나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제단화가 캄핀은 마리아의 태중에 들어갈 성령이 틀림없이 훗날 태어날 아기예수하고 생김새가 똑같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

아기 예수, 마리아의 배 속으로 날아들다
수태고지, 로히르 반 데르 베이던 그래도 그렇지, 아직 씨앗에 불과한데 십자가까지 들고 가는 건 좀 심했다. 우리가 아는 보통 수태고지 장면에서는 흰 비둘기가 마리아의 품을 향해 날아들게 마련이다. 그러나 캄핀은 대놓고 직설적인 표현을 썼다. 만약 500년쯤 늦게 태어났더라면 십중팔구 황금 빛살 위에 까만 올챙이 같은 것을 그려놓지 않았을까?

‘메로드 제단화‘에서 빗살과 성령의 씨앗은 투명한 창문을 통해 들어온다. 여기서 투명한 창문은 마리아의 상징이다. 고딕 성당의 색 유리창도 마찬가지 의미다. 성 베르나르두스는 이렇게 설명한다.

”태양의 빛살이 창문의 유리를 다치는 법 없이 지날 때

초월적인 빛살의 부드러움은 단단한 유리의 질료를 넘어서 범람하나

빛살이 들고나면서 결코 유리를 깨거나 조각 내지 않는 것처럼,

주님의 말씀, 주님의 빛살이

처녀의 집과 닫힌 품을 드나들 때도 그러하였다.”

마리아 앞에 놓인 촛불은 꺼져 있다. 촛불을 끈 것은 마리아에게 천사와 성령을 보낸, 그리고 오래 전 아담에게 첫 숨을 불어넣었던 하느님의 입김(flatus domini)이다. 꺼진 촛불은 또 ‘계약의 성사‘를 뜻하기도 한다. 한편 의자 팔걸이 위에 붙어 있는 사자와 개의 형상도 남녀부부의 덕목을 대신한다. 힘세고 용기 있는 사자는 남편을, 충성스럽고 정절을 지키는 개는 아내를 상징한다.

수태고지 장면을 가운데 두고 제단화의 양쪽 날개에는 각각 무릎 꿇은 주문자 부부와 목수 일을 하는 요셉이 그려져 있다. 마리아하고 정식으로 살림을 차린 게 아니라 아직은 각방을 쓰고 있다. 요셉은 작업실 창문을 광장 쪽으로 열어놓았다. 또 창문 난간에다 쥐덫을 하나 내놓았다. 실내 작업탁자 위에는 완성된 쥐덫이 하나 더 보인다. 요셉은 쥐덫 공장 사장인 셈이다. 하지만 웬 쥐덫?

일찍이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 예수를 쥐덫에 자주 비유하곤 했다. 예수야말로 ‘마귀 잡는 쥐덫‘(muscipula diaboli)이라는 표현을 즐겨 썼다. 엄연한 신성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짐짓 사람의 몸을 타고나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했으니 제아무리 눈치 빠른 마귀도 깜빡 속지 않을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요셉의 작업실에 흩어져 있는 도끼, 톱, 망치, 끌 같은 도구나 나무토막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가설이 나왔다. 단검처럼 생긴 톱은 예수가 붙잡힐 때 베드로가 로마 병사 말쿠스의 귀를 잘랐던 칼이고, 나무토막은 십자가 형틀을 상징한다는 식이다. 못과 망치는 당연히 수난의 도구가 된다. 또 이들 목공 도구를 예언자 이사야의 입을 빌려 아시리아에게 경고하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도끼가 도끼질하는 사람에게 어찌 으스대겠느냐?

톱이 톱질하는 사람에게 어찌 잘난 척하겠느냐?

또 지팡이가 어찌 그것을 든 사람을 움직이고,

몽둥이가 그것을 든 사람을 휘두르겠느냐?” (이사야 10, 15)

만약 제단화가 캄핀이 이사야의 비유를 요셉의 작업실에 흩어놓았다면 날개 그림을 조금 다르게 읽어야 한다. 행여 요셉이 마리아의 임신을 두고 못된 마음을 품지 않도록 아시리아에 내렸던 경고를 빌려 하느님의 의지에 순종하라는 의미로 풀이해야 하니까.

1997년 미술사학자 튀를레만은 ‘메로드 제단화‘의 날개 그림에 대해서 기발하기 짝이 없는 제안을 내놓았다. 왼쪽 날개의 무릎 꿇은 봉헌자는 제단화의 원 소유주이자 부부 사이인데, 이들의 이름이 제단화의 내용 구성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남편 엥겔브레히트의 이름을 풀면 ‘천사가 가져다 준다‘가 되고, 아내 쉬린메허스는 ‘목수‘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제단 중앙의 수태고지 장면에서 원탁에 놓인 복음서가 ‘천사가 가져다 준‘ 선물이고, 목수 일에 열심인 오른쪽 날개의 요셉이 두 사람의 이름풀이와 맞아떨어진다는 말이다.

하긴 마리아가 기도서를 들고 천사를 맞는 장면은 흔하지만, 수태고지에서 책이 두 권씩이나 나오는 일은 극히 드물다. 그렇다면 마리아가 들고 있는 것이 구약의 약속이고, 천사가 선물로 가지고 온 책은 신약의 실현이 된다.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여, 기뻐하라‘고 했던 천사의 축복을 두루마기로 만들어 천사 입에다 붙이는 관례적 방식 대신 책의 형태로 재현한 셈이다. 복음서 기자 요한은 이날 일어난 일을 이렇게 기록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 외아들을 보내주셨다.” (요한 3, 16)





주간동아 327호 (p64~66)

< 노성두 / 미술사가 ·서울대 미학과 강사 > nohshin@kornet.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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