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20

2002.01.31

두 검사의 아름다운 밀어주기

이명재·김경한씨, 검찰총장 고사하며 서로 추천 … 고교·대학·은행 선후배로 ‘막역’

  • < 이수형/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 > sooh@donga.com

    입력2004-11-09 16: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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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검사의 아름다운 밀어주기
    프랑스혁명 직후 프랑스 귀족 대니는 잔혹한 프랑스 귀족제도에 염증을 느껴 런던으로 건너가 영국인으로 살아간다. 카튼은 전형적인 런던 출신의 낭만적인 변호사. 이들은 숙명적으로 아름다운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된다. 그녀의 이름은 루시. 그러나 귀족 출신의 대니는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혁명정부에 의해 처형당할 위기에 놓인다. 이때 카튼은 대니를 대신해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

    프랑스혁명을 배경으로 1850년대에 발표된 디킨스의 유명한 소설 ‘두 도시 이야기’(A Tale of Two Cities)의 내용이다.

    어떤 면에서 이와 비슷한 ‘두 검사 이야기’가 검찰에서도 화제다. 이명재 검찰총장과 김경한 전 서울고검장이 화제의 ‘두 검사’다. 이들은 신승남 전 검찰총장의 사퇴 직후부터 유력한 후임 총장 후보로 거론됐다. 검찰총장은 검사라면 누구나 한번 꿈꿔보는 최고의 영예. ‘두 도시 이야기’에 비유하면 대니와 카튼의 ‘루시’라고 할 수 있다.

    권력은 때로 사랑보다 더 강한 중독성을 지닌다. “권력은 부모 형제도 못 나눈다”는 말도 있듯, 현실의 권력 앞에서는 친구도 선후배도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권력과 출세를 눈앞에 두고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는 상황은 최근까지도 많았다.

    그러나 이들은 그렇지 않았다. 지난 1월14일 신 전 총장이 사퇴를 발표한 직후 후임 총장으로 이총장과 김 전 고검장이 유력하게 거론될 때 이총장은 “나보다 더 적임자가 검찰 내부에 있다”며 고사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적임자’는 바로 김 전 고검장을 일컫는 것이었다.



    1월16일 오후 5시30분 청와대는 후임 총장 내정자를 1시간 뒤쯤 발표하겠다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그러나 30분 뒤 다시 “오늘은 총장 내정자를 발표하기 어렵다”고 말을 바꿨다. 청와대가 후임 총장 인선문제에 대해 이렇게 오락가락한 배경에는 이총장이 끝까지 총장 자리를 고사했던 이유도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 전 고검장도 “명재 형이 오면 검찰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며 자리에서 비켜줄 뜻을 나타냈고, 이총장 내정자가 발표된 다음날 가장 먼저 사퇴 의사를 밝혔다. 이총장의 후임 인선에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이런 광경은 예전엔 보기 어려웠던 모습이다. 과거 검찰총장 임명을 앞두고 검찰 내부에서는 동기는 물론 선후배끼리도 정도를 벗어난 경쟁과 암투를 벌이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총장과 김 전 고검장은 총장 임명을 앞두고 정치권 줄대기 등을 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정치권에서도 놀라워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총장과 김 전 고검장은 고교와 대학 1년 선후배 사이로 1966년 외환은행 외환3계에 함께 근무한 적이 있다. 1년 선배인 이총장이 먼저 입사해 근무했고 김 전 고검장이 1년 후 대학을 졸업 합류했다.

    이총장은 이 무렵 한국은행에서 근무하던 서울대 법대 동기 박경재 변호사가 “이렇게 살 거냐”며 강권해 사법시험을 준비했고, 김 전 고검장도 뒤를 따라 공부해 1970년 함께 합격, 30년 동안 같은 길을 걸어왔다.

    지난해 5월 당시 이명재 서울고검장이 “원로가 되면 후배들이 나아가는 길에 방해나 걸림돌이 되지 않는 아름다운 퇴장을 하자고 다짐해 왔고, 이제 그 다짐을 실천할 때가 왔다”며 ‘아름다운 퇴장’을 한 뒤 김경한 법무부 차관이 그 자리를 이었다.

    이번엔 김 전 고검장이 ‘아름다운 퇴장’의 배턴을 이었다. 김 전 고검장은 1월17일 가진 퇴임식에서 마지막으로 에머슨의 시 ‘무엇이 성공인가’의 한 구절을 남기고 떠났다.

    ‘내가 한때 이곳에 살았음으로 해서 단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해지는 것, 그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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