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18

2002.01.17

‘미션 임파서블’ 완수 달콤한 휴식

  • < 노성두/ 미술사가·서울대 미학과 강사 > nohshin@kornet.net

    입력2004-11-05 14: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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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션 임파서블’ 완수 달콤한 휴식
    1546년, 로마를 떠들썩하게 한 사건이 벌어졌다. 고대의 폐허 더미에서 높이 3m를 웃도는 근육질의 대리석이 튀어나온 것이다. 팔다리가 부러지기는 했지만 생채기 하나 없이 멀쩡한 헤라클레스 입상이었다. 돈 주고도 못 산다는 파로스 대리석으로 빚은 진짜배기 고대 조각품을 폐허의 흙먼지 속에서 건지다니, 이만저만한 횡재가 아니었다.

    조각가 상갈로가 로마 시대에 지은 카라칼라 대욕장의 벽돌 더미를 헤집고 다닌 것은 고대 조각을 발굴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때마침 신축중이던 성 베드로 대성당이 자재 부족으로 공사가 지지부진했기 때문이었다. 상갈로는 교황 파울루스 3세에게 청을 넣어 무너져내린 벽돌과 대리석 따위를 가져다 써도 좋다는 허가를 얻어냈다. 좋은 석재는 따로 챙겨놓았다가 나중에 교황의 출신 가문인 파르네세의 궁전을 짓는 데 쓰겠다는데 교황이 반대할 까닭이 없었다.

    천장이 내려앉은 채 꼴사납게 방치되어 있던 카라칼라 대욕장은 규모가 콜로세움 버금갈 정도로 웅장했다. 산더미처럼 쌓인 석재만 재활용해도 웬만한 교회 여남은 채는 짓고도 남을 정도였다. 짐수레를 끌어다놓고 대욕장의 북서쪽 회랑 부분을 파 들어가는데, 벽돌 더미 속에서 우연찮게 고대 조각들이 쏟아져 나왔다. 거상 조각 헤라클레스 말고도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와 그의 딸인 보건의 여신 히기에이아, 흰 수염이 파도처럼 출렁거리는 강의 신, 또 디오니소스와 아프로디테 신상들이 앞다투어 얼굴을 내밀었다. 대체 이런 조각상들이 목욕탕에서 무얼 하고 있었던 것일까?

    로마 시대의 목욕탕, 특히 황제들이 시민의 환심을 사려고 지었던 공공 목욕장은 단순히 때 밀고 땀만 빼는 곳이 아니었다. 나라 안팎 돌아가는 정세부터 정치인 아무개의 새로운 시앗 이야기까지 갖가지 소식들을 시시콜콜 접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심심풀이 주전부리에 오락까지 즐길 수 있는 종합 레저 센터에 가까웠다. 그렇다면 술꾼들이 우러러 마지않는 디오니소스라든가 관능을 뽐내며 엉덩이를 살래살래 흔드는 아프로디테가 목욕탕 장식물로 등장한 건 너무나 당연하다. 또 의술과 보건의 신도 목욕 문화와 족보가 멀지 않으니 한자리 끼어들어도 이상할 게 없다. 그런데 헤라클레스까지 옷을 훌렁 벗어던지고 가세하다니?

    헤라클레스는 원래 괴물과 악당만 찾아다니며 요절내는 전문 킬러다. 뚝심과 배짱으로 치면 헬라를 통틀어 맞먹을 만한 상대가 없는 영웅 중의 영웅이다. 태양더러 넌 뭣 땜에 뜨거우냐고 활을 쏘아대는가 하면, 머리 백 개 달린 물뱀 히드라, 칼날 같은 부리로 생살을 찢는 식인 새조차 헤라클레스가 한번 떴다 하면 소금에 절인 배추 꼴이 되고 만다. 그러나 이런 화끈한 면모 말고 헤라클레스는 올림픽 경기의 창시자로도 유명하다. 그래서 그리스 문화를 흠모한 로마인들이 헬라인들에게 국민 건강의 대부였던 헤라클레스를 목욕탕에 모신 것이다.



    헤라클레스는 혼자 휴식을 취하고 있다. 눈앞의 적수를 꼬나보거나 을러대지 않고 몽둥이를 지팡이 삼아 혼자 생각에 잠긴 모습은 어째 괴물 사냥꾼의 자세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뻐근한 몸을 녹이러 목욕탕을 찾은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부담스럽지 않게 즐길 수 있는 주제다.

    헤라클레스는 벼랑에 기대섰다. 벼랑의 가파른 풍경은 고단했던 그의 삶과 일생 동안의 여정을 떠올리게 한다. 같은 주제를 끌로 새기지 않고 붓으로 그렸더라면 벼랑 옆에 나무도 몇 그루 서 있고 멀리 흰 구름도 떠다녔을 것이다. 헤라클레스는 벼랑에다 굵직한 몽둥이를 세워서 짚고 그 위에 사자 가죽을 덮었다. 옹이가 울퉁불퉁한 몽둥이와 머리갈기부터 꼬리까지 붙어 있는 사자 가죽은 헤라클레스의 표식이다.

    ‘미션 임파서블’ 완수 달콤한 휴식

    헤라클레스와 텔레포스

    헤라클레스는 어릴 적에 헬리콘 산에 올랐다가 수백년 동안 산속에서 얌전히 자라고 있던 올리브나무를 뿌리째 뽑아 지팡이를 삼은 적이 있었다. 이 지팡이는 훗날 몽둥이로 용도가 바뀌면서 괴물과 악당들의 피로 칠갑하게 된다. 또 아르골리스 지방 네메아 일대를 쑥밭으로 만든 사자의 가죽을 벗겨 겉옷으로 삼았다.

    고대 로마의 목욕장에서 나온 헤라클레스는 우선 파르네세 저택으로 옮겨졌다. 이때부터 ‘파르네세의 헤라클레스’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 다음 바티칸의 벨베데레 조각정원으로 자리를 옮겨 뭇 예술가들과 애호가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다 지금은 나폴리 국립 고고학 박물관의 파수꾼이 되었다. ‘고대의 살아 있는 교과서’ ‘자연을 뛰어넘는 예술의 참된 본보기’라는 찬사는 고전주의 미술이론가 벨로리와 같은 호사가들 입심 덕이다.

    파르네세의 헤라클레스는 원래 카라칼라 목욕장를 가로지르는 긴 통로 북서쪽, 원주와 벽면 돌출부 사이에 전시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대리석 헤라클레스의 앞쪽과 뒤쪽을 모두 돌아가면서 감상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열탕에서 빨갛게 익힌 몸을 식히느라 시원한 모자이크 회랑을 어슬렁거리던 목욕꾼들은 온몸이 구석구석 암팡지게 부풀어오른 거구의 남성을 곁눈질로 흘낏대며 “아니, 저런 곳에도 근육이!” 하면서 왠지 위축되지 않았을까?

    헤라클레스는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다. 입술도 약간 벌어졌다. 혼자서 무슨 생각에 잠겼을까? 대리석 입상 뒤쪽으로 돌아가보면 궁금증이 풀린다. 뒤로 숨긴 오른손을 올려다보면 사과 세 알을 가만히 굴리고 있다. 이건 에우리스테우스가 그에게 내린 마지막 임무 ‘헤스페리데스의 황금사과’다. 조각가는 열두 가지 ‘미션 임파서블’을 완수하고 잠시 숨을 돌리려는 순간을 주제로 삼았다. 헤스페리데스는 근심과 고통이 없는 낙원, 또는 영생불사의 정토라고 알려져 있으니 한바탕 늘어지게 목욕을 마치고 나서 감상하기에는 퍽 개운한 주제였을 것이다.

    파르네세의 헤라클레스는 누구의 작품일까? 오른쪽 벼랑 아래에 ‘아테네 사람 글리콘이 제작했다’는 작가 서명이 남아 있다. 하지만 이건 모각 조각가의 서명이다. 몽둥이 뒤쪽으로 버팀용 떡살이 두툼하게 붙은 것으로 미루어 원작은 틀림없이 청동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미션 임파서블’ 완수 달콤한 휴식

    화가 안도키데스의 '헤라클레스와 케르베로스'

    원작자는 뜻밖에 금세 드러났다. 헬레니즘 시대 시키온 출신의 조각가 리시포스. 펠로폰네소스뿐 아니라 남부 이탈리아의 그리스 식민도시에서까지 작품 주문이 몰렸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전속 초상조각가로 인정받을 만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솜씨 뛰어난 조각가였다. 파르네세의 헤라클레스와 똑같은 자세로 몽둥이에 기대 있는 조각이 대리석 거상 조각 여섯 점을 포함해 현재 90여점 확인되었다. 그 가운데 피렌체 피티궁(宮)이 소장한 복제품에 리시포스의 이름이 씌어 있다. 기원전 320년경, 그러니까 리시포스 말년의 수작으로 보인다. 원래는 잘 다듬어진 몸매였을 텐데, 서기 2세기 초에 복제 조각가 글리콘이 당시 유행에 따라 온몸 근육을 감자 자루처럼 무지막지한 과장법으로 재현해 놓았다. 각 부위마다 근육을 조금씩 덜어내면 원작과 비슷한 그림을 상상할 수 있다.

    그리스 조각을 베껴대는 유행은 기원전 2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청동을 녹여 똑같이 굽자니 너무 비싸고 그렇다고 달리 마땅한 복제 수단도 없던 터라 주로 대리석 모각이 성행했다. 때마침 로마 귀족들 사이에 전원주택을 짓고 정원 가꾸기 열풍이 불면서 복제 조각도 수요가 크게 늘어났다. 이때부터 300년 동안은 로마가 지중해 전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침략 전쟁의 전리품들을 싹쓸이할 때라 로마 시내는 신전, 도서관 극장, 관청 등 공공시설물뿐 아니라 사람들이 오가는 광장, 도로, 목욕탕에까지 으리으리한 조각들이 즐비했다. 서기 1세기에 박물지를 쓴 플리니우스에 따르면, 마르쿠스 스카우루스가 감찰관으로 있을 때 가설극장 한 곳에만 3000점의 조각상을 채웠고 뭄미우스는 아카이아를 정복하고 그곳에서 챙겨온 전리품 조각으로 로마시 전체를 도배했다고 한다. 무키아누스가 집정관으로 재직할 당시 그토록 긁어오고도 로도스에는 조각상이 3000점이나 남아 있었고 아테네, 올림피아, 델포이에도 조각작품이 그에 못지않게 널려 있었다고 한다. ‘정복당한 그리스가 되레 로마를 정복하고 말았다’는 카토의 탄식이 실감난다.

    귀족들의 호사 취미에 발맞추어 복제 조각품 목록도 다양해졌다. 군신 아레스나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로마식 이름을 얻어 마르스와 베누스로 국적을 바꾸는 일도 다반사였지만, 뭇 신과 영웅들 가운데서도 헤라클레스 인기가 제일 높았다. 일단 겉모습부터 ‘몸이 되는’ 데다 악을 물리치고 정의를 바로잡는다는 구실이 힘의 논리를 숭배하던 로마인들에게 먹혀들었기 때문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헤라클레스를 흉내냈다는 옛 고사도 그리스 영웅 따라잡기에 부채질했다.

    고대 이후에도 헤라클레스의 인기는 식을 줄 몰랐다. 12 노역 가운데 명부의 번견 케르베로스를 붙잡아오기 위해 죽음의 세계까지 갔다 왔으니 헤라클레스야말로 기독교적 부활의 예시라고 추켜세우는가 하면, 16세기에 도상사전을 펴낸 체사레 리파는 파르네세의 헤라클레스가 들고 있는 사과 세 알을 두고 분노를 눌러 다스리고, 물질에 대한 욕심을 누르고, 육신의 즐거움을 가볍게 여기는 세 가지 덕목을 상징한다고 단정하기도 했다. ‘헤라`-`클레스’의 이름을 풀면 ‘헤라 여신 때문에 유명해진 존재’라는 뜻이다. 죽는 순간까지 여신의 질시를 받으면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으로부터 도피하지 않았던 용기가 그의 빛나는 명성을 뒷받침하지 않았을까? 르네상스는 인간의 아들로 태어나 신의 반열에 오른 헤라클레스를 인문주의적 인간이 지향해야 할 표상으로 보았다. 인간은 스스로 타고난 자유 의지에 따라 짐승도 신도 될 수 있다고 보았던 르네상스 철학자 마르실리오 피치노의 사상을 헤라클레스는 2000년이나 앞서 몸으로 보여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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